[과음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기분을 언짢게 하는 일이 있어서, 그 전날 저녁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고, 잠이라도 푹 잤으면 좋았을 텐데, 잠도 빨리 깬 일요일 아침. 만사가 다 귀찮은 가운데 영화를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하고 VOD 목록을 보다가 좀 오래된 영화 한 편의 제목이 내 눈을 고정시켰다.]
이 영화가 나온 것은 1985년, 국내 개봉은 1987년인데 아마도 영화관에서는 보지 못하고 나중에 비디오로 본 듯하다. 꽤 감동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따로 감상을 적어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북 유럽의 영화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소재가 '어머니를 여의게 되는 한 소년의 정신적 고통과 성장'이라는 보편적인 것이라 접근이 용이하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은 또 영화가 나오기 거의 30년 전이라,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거의 60년 전의 스웨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과거가 배경이라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의 문화 생활이 라디오로 주로 이루어지고, 주인공 잉게마르의 외삼촌이 흑백 텔레비전을 구입해 사람들과 같이 시청하는 것 등이고, 그리고 잉게마르 요한슨과 플로이드 패터슨의 헤비급 복싱 타이틀 매치에서 스웨덴인인 요한슨이 승리하는 마지막 장면은 1959년 6월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생활의 리듬이 지금처럼 분주하지 않고 다소 여유가 있던 시기라고나 할까? 그리고, 스웨덴은 이 당시에도 이미 경제적으로 발달한 모양으로 주인공 가족을 비롯하여 경제적 궁핍 때문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우선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그 제목이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이기도 했는데, 원제인 Mitt liv som hund는 그렇게 부정적인 뜻은 아니라고 한다. 리매스터링한 것이 아니라서 화면이 어둡고 화질 자체도 요즘 영화들처럼 선명하지는 않아서 보기에 좀 답답한 면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향수를 느끼게 하는 면도 없진 않다.
레이다르 옌손(Reidar Jönsson)의 반자전적인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 영화이자, 정신분석적 시각에서 볼 때 오이디푸스 과정이 잘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해변 혹은 호숫가에서 어머니가 아프기 전 어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과거이다. 이 장면은 영화 내내 몇 번 더 되풀이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그로부터 몇 년은 지난 뒤,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개 '시칸'의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영화의 전환점이다(어머니의 죽음은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말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두 번째로 외삼촌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날 밤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는 가운데(그 가운데 대표적인 생각은 인간 우주 실험의 희생양이 되어 스푸트니코 2호에 탑승했던 '라이카'라는 개에 관련된 것이다) 1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 시간부터 이 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다가, 이 시점까지 이르고 그리고는 그 다음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 약간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제일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이 구조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다소 혼란스러웠던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거기다가 친척 관계 용어들의 부정확한 번역 때문에 내용 파악에도 어려움이 따르고 지금도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영화가 그리 길지 않고 글을 쓰려니까 내용 정리가 안 되어서 방금 전에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았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아마도 먼 외국에 선원으로 가 있어서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그리고 결국 죽게 되는 어머니 밑에서 11살, 12살 가량된 주인공 잉게마르가 겪는 정신적인 고통과 성숙을 다루고 있다. 개구장이인데다가 불안감-- 밤에 오줌싼 이불이 들킬까봐 우유잔을 들고 심하게 떨다가 급기야 자기 얼굴에 우유를 뿌리고 마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도 심한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인해 예전처럼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고 신경질도 심해진 것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압박감 속에 있다. 어머니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형은 할머니 댁으로, 그는 외삼촌 부부가 있는 시골로 가는데, 영화의 주 무대는 이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의 유리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 곳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소위 말하는 '괴짜들'이 있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하루 종일 자신의 지붕을 수리하는 프란손과 외발 자전거로 줄을 타는 남자, 잉게마르에게 여성 란제리 광고가 실린 잡지를 읽어달라고 하는 오비슨 할아버지--외숙모의 아버지-- 등일 것이다).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져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다른 삼촌(이 사람이 친삼촌인지 외삼촌인지는 불분명하다) 집에서 지내던 두 형제는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병문안 가는데, 잉게마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새 '토스터기'를 사려 한다. 하지만 그의 형 에릭은 어머니가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형제가 한 바탕 싸움을 하고 나서 잉게마르는 두 번째로 외삼촌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잉게마르가 겪는 심리적 압박감이나 슬픔과는 별도로 그는 또래 여자들로부터 인기가 있다. 원래 있던 곳에서도 여자 친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삼촌의 동네에서도 두 여자 아이가 그를 두고 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사내 아이처럼 축구도 하고 권투도 하는 사가의 다리를 잡고 잉게마르가 '개처럼 짖어대기 시작'(영화의 제목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에 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외삼촌이 외숙무에게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개 흉내를 낸 것을 잉게마르도 따라한 것인데, 이 장면에서도 자신에게 닥쳐온 갈등이나 성적인 욕망을 제대로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개 흉내를 낸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힘겨워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이 됨으로써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나 할까?)하자 그와 권투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 사가는 잉게마르가 사육장으로 가 있다고 믿던 자신의 개 '시칸'이 이미 안락사되었다고 정곡을 찌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잉게마르는 외삼촌이 지어 놓은 '여름 집'에서 하룻밤을 지새면서--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난로도 없이 담요만을 덮고--시칸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한다. 그에게는 이들의 죽음 자체도 슬픈 일이지만, 이들 -- 특히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지나친 장난이나 잘못 때문은 아닐까 하는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아침 일찍 그를 찾아온 외삼촌에게 잉게마르에게 '내가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러한 죄의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홀로 남겨 두고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도 동시에 드러난다('내가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말한 다음에 그는 곧 '왜 나를 원하지 않죠?'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자꾸 쓰게 된다. 영화 자막 자체가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아서 나름대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인 것도 같다.]
소련과의 냉전, 또 당시 고조되던 우주 개발의 열풍 등도 엿볼 수 있는 이 영화는 일차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따른 죄의식, 슬픔과 분노 등을 극복해 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코믹하고도 엉뚱한 에피소드들 속에 큰 군더더기 없이 잘 녹여낸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서 보이는 사건들과 이미지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정신분석, 그 중에서도 오이디푸스의 과정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 먼저, 잉게마르의 형이 아이들 앞에서 성교육을 한다면서 잉게마르의 성기를 병에 꽂는데 성기가 빠지지 않아 병을 깨트려야 했고, 그래서 상처를 입게된다는 에피소드는 '거세 불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 다음 밤에 오줌을 싸는 일 또한 그의 성적 욕망과 연관지을 수 있고, 또 쓰레기장에서 불을 피우다가 엄청나게 큰 불을 일으키고 마는 것은 잉게마르의 욕망의 거대함과 강렬함, 또 그것의 위험함 등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 과정의 일반적인 진행은 사내 아이의 경우 '어머니로 향하는 성적 욕망의 단념과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접고 "아버지의 법" 즉 상징계적 질서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인데,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갈등'은 주로 형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부재한 아버지 대신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은 삼촌들이나 형이다). 조금 전에 지적했던 영화 앞부분에서 성교육 에피소드나, 잉게마르가 오줌을 쌌을 때에도 그를 감싸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큰 불안을 느끼도록 하고 마는 것, 또 잉게마르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 '시칸'을 향해 장남감 총을 겨누다가 잉게마르와 싸우게 되는 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를 병문안 갔을 때에도 두 사람은 누가 어머니의 사랑을 더 받고 있는가를 두고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 작품에는 여러 성적 에피소드들과 함께 추락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외발 자전거 위에서 줄을 타는 남자가 줄을 타다가 떨어지는 장면(사람들은 그가 크게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을 했지만 잠시 기절한 듯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난다), 그 다음은 잉게마르가 배릿이라는 젊은 여성의 누드를 훔쳐보려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창으로 떨어지는 장면(아래 누워 있던 배릿이 몸을 피하고 그 밑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서 잉게마르는 약간의 생채기만 입게 되는 정도로 끝난다), 세 번째는 사가와 권투 대결을 벌이다 이층 난간으로 떨어지는데 밑이 목초가 깔린 곳이라 다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잉게마르와 사가 등이 짚라인에다 기구를 매단 듯한 것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추락하지만 웅덩이에 떨어져 역시 별로 다치지 않는다. 이 장면들은 '성적인 흥분과 그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전체적인 정조가 비극보다는 희극으로 흐르고 있어서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여름 집'에서의 극적 클라이막스를 지나자 겨울은 지나가고 다시 여름이 찾아온다. 자신에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던 사가와 화해한 두 사람은 잉게마르 요한슨과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타이틀 매치를 라디오로 듣다가 서로 껴안채 잠이 드는데, 두 사람의 시합에서는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요한슨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칸'의 죽음이라는 힘겨운 과정을 극복하고 나서 -- 그것은 근친상간적 욕망의 포기와 자기 자신의 일종의 정신적 죽음이기도 하다 -- 새로운 성적 대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 또 다른 의미에서 잉게마르가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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