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작시

부연사에서

by 길철현 2016. 4. 15.

 

부연사에서

 

 

조심스레 쪽문을 열고 법당으로 들어서자

세상의 번뇌 모두 떨쳐버리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이치를 되새기라는 듯

폭포 소리가 오히려 크게 들려온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절박하게 만드는가

나는 불제자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불전함에 시주 드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부처님께 지성으로 절을 올린다

내 사랑하는 님은

세상의 백팔 번뇌를 백팔 배례로 풀어내려는 듯

쉬임없이 쉬임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나는 안다

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또 나는 안다

님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쓸쓸한 늦가을 폭포 소리가 내 안을 가득 채울 즈음

진정으로 님을 사랑하는 길은

님의 발걸음을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님의 발걸음을 축원하는 것이라는 묵언

부처님의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그 축원이 내 폐부가 너덜거리는 아픔이라는 걸

묵언을 뒤따르는 부처님의 미소는 모두 헤아리고 계신 것일까

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달래보아도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울음

걷잡을 도리가 전혀 없다

 

*부연사(釜淵寺): 신철원의 삼부연(三釜淵) 폭포 맞은편에 위치한  사찰

 

(2000년 12월 6일)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길에서  (0) 2016.04.15
직소 폭포에서  (0) 2016.04.15
서해 대교를 건너다  (0) 2016.04.14
우울이 나를 찾아와  (0) 2016.04.14
쌍문역 연가  (0) 2016.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