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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토교 저수지

by 길철현 2016. 3. 6.


토교 저수지


일요일 저녁(2월 12일, 2012년)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우연찮게 토교 저수지에 관한 뉴스를 보고 있자니 이곳과의 예전의 인연이 새삼 떠올라 몇 자--혹은 몇 천자--적어본다. 뉴스에서는 민통선 내의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이 토교 저수지에서 원래 금지되어있는 낚시를 대회까지 열도록 후원한 철원군 당국을 비난하는 환경단체의 목소리와, 또 철새들에게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고 철원군을 홍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했다는 철원군수의 목소리를 동시에 들려주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천여 명이 네 시간 동안 참가한 이 대회에서 잡은 물고기의 수가 고작 스무 마리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역 개발과 환경 보존은 대체로 양립하기 힘든 현안인데, 분쟁으로만 치달릴 일이 아니라 타협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오지랖 넓고 원론적인 이야기. 이번 일을 계기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토교저수지가 내가 처음으로 찾았던 2001년과는 달리 지난 십 년 사이에 상당히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근의 명소(?)들을 엮어 팔경이나 구곡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요즈음의 유행이긴 하지만, 이 토교 저수지가 고석정이나 삼부연 폭포와 함께 철원팔경에 들어간다는 것은 뜻밖이다--물론 이 팔경에는 제2땅굴도 있어서 쓴 웃음을 자아낸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더 전인 2001년 4월 12일부터 20일까지 7박 9일 동안 나는 혼자 전국을 내 애마인 아반테로 누빈 적이 있다. (주: 이 여행은 내 삶이 갈피를 잡지 못한 가운데--어찌보면 한 친한 사람의 말처럼 지금도 불안정하고 흔들림이 많은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나름대로 이 삶에 대해 답을 찾아보려 한 시도였다. 낮에는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 그리고 전방, 대체로 우리나라--남한--의 경계를 따라 정신없이 차를 몰고 밤에는 또 머물게 된 도시의 극장에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친구>라는 영화를 되풀이해서 본 따분하면서도, 그 안에는 또 몇 가지 흥미로운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 그런 여행이었는데, 그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지리산 야간 등반이나, 혹은 그 여행 전체를 적고자 하는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여행에는 잘못 건드리면 내 마음의 아픈 생채기를 덧나게 하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적을 수 있을 것도 같고--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방학 초에 굳은 결심으로 다시 이 지리산 등정기를 써보려 시도해 보았으나 글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것으로 보아 아직은 미지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화천의 한 모텔을 출발하여--여행의 막바지에서 내 마음은 상당히 불안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5번 국도를 타고 김화까지 왔다가, 43번 국도를 타고 서울로 오다가 다시 464번 지방도로를 탔던 것으로 추정된다--반겨줄 사람은 없지만 서울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내게 있어 가장 흔하게 되풀이되는 갈등--이 부딪히고 있었을 것이다. 도창리를 지나 민통선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고--그 와중에 주민등록증을 검사하고 군인들은 열심히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고. 민통선 안쪽의 도로를 달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그렇게 동송 쪽으로 가다가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상당히 긴 둑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 그 이후의 기억들과의 조합을 통한 허구적 기술을 하도록 할 것이다.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불분명하다. 사실적 기술에 허구가 개입하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글쓰기다.) ‘저 정도 길이라면 못이든 저수지든 상당히 크겠는데’하는 생각을 하면서 논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못 쪽으로 차를 몰았다. 못 아래에는 집이 두어 채 있었는데, 그 중 한 집에는 “철새 보는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 집 옆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나는 어렵지 않게 둑에 올랐다. 저수지는 ‘상당히 크구나,’ 또 ‘나름대로 아름답구나’하는 인상 외에 다른 저수지와 색다른 어떤 특별한 느낌을 전해주지는 않았다--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또 하나 알게 된 것은--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이 토교 저수지가 이런 류의 농업용수용 인공저수지로는 우리나라에서 예당 저수지 다음으로 크다는 점이다--이 토교 저수지 인근에 있는 학 저수지는 그 전에 몇 번 가보았으며, 이곳도 나름대로 즐길만한 그런 곳이었다. 못 둘레를 걸어서 한 바퀴 돈 기억이 있다. 나는 둑에서 저수지 쪽으로 약간 내려간 곳에 자리를 잡고 잔잔한 물을 바라보았다. 겨울 철새들은 이미 북쪽으로 돌아가 버렸는지 못은 고요하고도 쓸쓸했다. 둑에서 바라본 못의 반대편은 양쪽에서 야산이 못 쪽으로 많이 내려와 있었고, 중앙에도 땅이 못 쪽으로 많이 밀고 들어와 있었다. 이 중앙의 양쪽 부분은 흡사 큰 개천 같은 느낌을 주면서 그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문득 그 보이지 않은 끝은 북한 땅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수첩을 꺼내 시를 써보려 했으나 “이 저수지의 아득한 저 끝은 / 갈 수 없는 땅에 가닿아 있는 듯하다”라는 말 정도만 떠오를 뿐이었다(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 북쪽에서 남으로 토교저수지를 찍은 사진에 따르면 중앙에 땅이 못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고 생각한 곳은 실제로는 저수지 내에 있는 꽤 큰 섬이었다).

이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 구형 삼성 카메라로 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저수지를 찍은 사진은 없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이곳을 찾았는데도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니. 이곳이 최전방이라는, 그래서 사진을 잘못 찍었다가는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작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날 시를 써보려 한 것은 아니다. 내 수첩에 “토교 저수지에서”라고 제목을 적은 글을 써보려고 한 것은 4월 29일이었으니까. 이날 1킬로미터에 달한다는 둑을 달렸는지--차를 오래 타서 찌뿌둥한 몸을 풀려고, 미친 놈처럼--아니면 또 못 오른쪽에 있는 길을 따라 좀 걸어 들어갔는지 불분명하다--그 때 군인들을 만나기라도 했다면. 나는 이곳이 최전방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도 내가 이곳에 들어오는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민통선 안쪽이라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드는 생각은 금기나 경계를 벗어나고 싶은 탈주의 욕망과 또 처벌에 대한 두려움 등등이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정도이다.)

이 당시 나는 이따금씩 헤어나기 힘든 무력감과, 또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불쾌감에 시달리곤 했는데, 그럴 때엔 대체로 차를 몰고 전곡, 연천, 철원 등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를 돌아다니곤 했다. 이해 4월 25일,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두 번째로 이 토교저수지를 찾았다. 일기에 적어둔 글이 있어서 옮겨본다.

 

어제 다시 찾아본 토교 저수지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저수지 둘레를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저수지를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제방에 와 부딪히는 물살, 두루미로 생각되는 큰 새, 그리고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 산자락 사이로 그 끝을 감추어 버리는 저수지의 저 건너편. 내가 글에서 써야 할 것은 그런 것이고, 그런 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그리고 서정적으로 써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저수지를 보고 난 다음에 나는 이 저수지의 이름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수지의 정확한 위치나 그런 것은 어렴풋한 채로 묻어두었던 듯하다.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는 것은 또 어렴풋한 채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토교저수지와의 인연 중에서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자 내가 가장 중점적으로 써보고 싶은 일이 역시 이해 5월 11일에 일어났다. 이날은 내 주중 산행일이어서 나는 명성산을 찾았다. 이 산에서 역시 혼자 산행을 온 나보다 연배가 한 열 살은 위인, 오십은 된 분과 의기투합하여 즐겁게 산행을 마치고 난 다음 혼자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토교 저수지로 향했던 것이다. 캔 맥주를 하나 사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또 시를 쓰려고 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산그늘에서는 두 사람이 낚시인지 뭔지를 하고 있었다. “내 사랑은 언제나 한 두어 걸음쯤 늦어 / 내 몫으로 돌아오는 건 눈물 한 줌뿐이지만” 이 정도 적었을까, 철모를 쓰고 총까지 든 군인 세 명이 둑을 달려오고 있는 것이 눈꼬리에 잡혔다. 처음에 나는 이들이 무슨 훈련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이 부분은 그 다음 날 일기에 적은 것을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써보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 근처에 온 군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아저씨 지금 뭐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아저씨, 여기로 올라오십시오”라고 했다. 나는 제방 안쪽 꽤 낮은 곳까지 내려가 있었다. 군인들은 나보고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으나 뭔가 일이 꼬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소령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에게 “낚싯대는?”하고 물었다. “이 아저씨는 그냥 있었습니다.” 병사의 말. 소심한 성격이지만 마냥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왜 그러는데요?”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소령, “못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나, “지나다가 못이 아름다워서 못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소령, “여기는 민통선 지역이라서 허가 없이는 못 들어오는 것 아십니까?”

나, “못 들어오게 막지도 않는데, 내가 못 들어오는 곳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내가 군인들의 제지를 뚫고 들어왔다면 위법이겠지요. 하지만, 그냥 도로를 달려와서, 못이 크고 좋아서, 그걸 보고 있는데, 그것가지고 뭐라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나름 찔리는 데가 없지 않으면서도 세게 밀고 나갔다.)

소령, “그러니까 저 도로 북쪽, 즉 이쪽 편은 민통선인데, 이곳 지역 농민들이 농로를 여러 개 내 놓았어요. 우리가 그런 것까지 통제를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군이 국민들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주민들의 편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시고 가세요. 일단 여기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저쪽 아래에 있는 초소에도 나갈 때 신고를 하도록 하세요.”

괜한 사람을 잡는다고 시비를 걸 수도 있었으나 무사히(?) 풀려난 것에 안도를 하며 나는 차를 몰고 나왔다. 낚시를 한 사람들은 벌금을 물거나 그래야 할 듯했다. 대화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농민들이 아스팔트 포장까지 한 농로를 여러 개 내었고, 엄밀하게는 그게 위법일 수도 있으나 주민 편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묵인하는 그런 사정이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 이곳을 지날 때보니까 도로에서 농로로 들어가는 입구마다에는 아래쪽에 있는 초소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군인들에게 혼이 난 사건도 있고 또 신고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신고를 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지도 알 수 없고--때문에 한 동안 이 토교저수지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뒤인 2003년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이제는 확실히 위법인 줄 알면서도 나는 가슴을 졸이며 둑 위에 올라섰다--이 중간에 못 아래에 “양수장”이 들어서서 못으로 가려면 이 양수장을 통해야 했고, 양수장 문이 잠겨있을 때에는 수로를 따라 다소 위태롭게 올라야 했다.


펀치를 연달아 두 방 맞고서(주: 과외를 잘리고 또 엘보가 와 좋아하는 탁구를 못 치게 된 것을 가리킴) 나는 멀리 토교 저수지까지 갔다 왔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토교 저수지를 가득 메우고 있던 기러기 울음소리. 그리고,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던 수천 마리의 기러기 떼. 그 끝을 산자락에 감춘 저수지와, 끼룩끼룩 울어대며 하늘을 날아가던 기러기 떼는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해 주었던가? 살아라, 살아가라. 하지 않았던가? (10월 15일)

이 토교저수지를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일기에 따르자면 2004년 6월이다. 아마도 그 중간에 한두 번은 찾은 듯한데,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에는 제방 옆 한 쪽에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군인은 나에게 “왜 왔느냐?”고 물었고, 내가 “못을 보러 왔다”고 하자--그는 이곳에 들어오는 것이 위법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못을 보는 내 곁에 서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 편하게 못을 볼 수는 없었고, 그래서 더 이상은 이 토교저수지를 찾지 않았다. (주: 인터넷 상에 올라온 blue라는 ID를 가진 사람의 글이 흥미로워 인용해 본다. 이 글은 2006년 5월에 작성한 것으로 그는 아예 못 둑으로 올라서지도 못했다.


토교저수지(土橋貯水池).


남쪽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 하지만 시베리아 철새들이 이미 알고 겨울마다 둥지를 트는 곳.

한때는 군인들이 북쪽에서 이 저수지를 무너뜨리면 철원에서는 어찌 농사짓느냐며 철통같이 지키던 곳이었죠. 지금도 민간인은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 보는 뚝방의 길이로 보아 그 규모만 짐작할 뿐입니다.

"토교저수지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사 한 명에게 물었습니다.

"바로 이길로 올라 가면 됩니다."

"나 사진 쪽 찍으려는데 좀 들어가서 찍자구"

"선생님, 여기 들어 오시면 안됩니다. 민간인 통제 구역입니다."

"사진 한 장 못찍게 한다고? 여기는 군사지역과는 상관이 없지 않나?"

"그래도 안됩니다. 사단 정훈장교 대동 하에 찍을 수 있습니다."

젠장...

저수지 개방과 주변지역 생태조사와 같은 일들이 어째서 안보와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변하지 않는 곳이 국방부인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둑에서 볼 때 그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 아득함이 신비를 자아내는, 또 철새들의 군무와 끼룩끼룩대는 소리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저수지. 그러나 민통선 안에 있어서 쉽게 접근 할 수는 없는 곳. 언젠가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렇게 되면 신비감이나 가슴 졸임은 또 없어지고 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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