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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운악산 삼거리

by 길철현 2016. 3. 10.


운악산 삼거리


지금(2012년 7월 3일) 쓰려는 이야기는 나의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14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또 나의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여러 번 쓰려고 시도했음에도 번번이 중도하차하고만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글쓰기를 가로 막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일단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또 그 이야기를 쓰는 것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운 까닭은 확실하게 잡히지는 않으나, 뭔가 대면하기 싫은 두려움과 다시 마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 듯하다. 이 두려움을 앞에 두고 일단 밀고 나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 또한 나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장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운악산은 산을 좀 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서울 인근에서는 꽤 유명한 산으로 경기 5악에 속하는 산이다. 운악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포천군 화현면 쪽에서 올라가는 것과, 가평군의 현리를 거쳐 현등사 쪽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대표적인데, 내가 이 글에서 쓰고자 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은 앞으로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겠지만 현등사 쪽 운악산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운악산 삼거리’라고 했지만, 그것은 나의 자의적인 명칭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운악산 부근의 삼거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제대로 써지지 않더라도 끝까지, 이렇게 저렇게 밀고 나가볼 것이다. 사실 이 글은 그 사건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포착해보려는 시도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것이 쓰기가 힘든 까닭은 지금은 다소 낯간지러운 아픈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 올려야 하기 때문인가?)


그 날의 전말


지금 내가 쓰려는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1998년 2월 21일에 일어난 교통사고에 대한 것이다. 인명 피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때문에 든 차량 수리비용도 50만 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 작은 사고였지만. . . .

작년 8월 9일에 나는 여기까지 쓰고, 무슨 변덕이 일어났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글을 중단하고 말았다. 9개월이 지난 지금(2009년 5월 21일) 이 이야기에 다시 도전(?)한다. 완전히 새로 시작할 수도 있을 터이나, 내 머리는, 그 때 적은 것을 그대로 두는 방식이 더 나을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사고 당시 3일에 걸쳐 계속해서 일기에 적어두었다.


깨달음이 먼저였을까? 사고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던가? 삶의 조건은 내가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은 그걸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먼저, 어젯밤의 꿈부터 적어야겠다. S가 나에게 왔다. S와 나는 빈 교실로 들어갔다. S는 내 뒤에 서서 내 귀를 후벼주었다. 그녀가 나를 팔로 껴안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슴이 훈훈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생시만 같았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이제야 갖게 된 느낌이었다.

운악산, 현등사까지의 산행은 나에게 뭔가 깨달음을 주는 듯했다. 삶을 받아들여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는 길을 헤매었다.

[현등사에서] 일동으로 가는 길로 들어갔는데, 비포장이었다. 다시 돌아 나왔다. 삼거리에서 일단 정지. 차가 오는가 보았다. 차는 오지 않았다. 아니 아예 차가 없었다. 좌회전하는 순간, 큰 트럭이 백미러에 미쳤다. 핸들을 왼쪽으로 트는 순간, 트럭도 왼쪽으로 틀어 내 차를 추월하려고 하고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트는데, 백미러가 퍽 날아가고, 차 왼쪽 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사건은 정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왜 나는 그렇게 헤매이다, 또 하필 그 트럭이 오는 순간에 거기에 섰을까?

     (1998년 2월 21일)


50만 원 정도의 돈이 공중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을 본다면 일단 사람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 해도 천운이다. 그 다음엔 차가 깨끗해지게 되었다는 것, 정비공장이 돈을 벌게 해준다는 것. 그리고 내 정신이, 좀 더 날카롭게 담금질 되었다는 점 등이다.

사고는 어찌 보면 예정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흐릿한 정신을 일깨워서 좀 더 또록또록하고 분명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듯하다.

     (2월 22일)


요번의 차 사고는 내게 뭔가 깨달음을, 아니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하더라도, 내 속에 응어리진 뭔가가 부서져 나가는 느낌을 주었다. 운악산은 아름다웠고, 현등사까지 가는 길도 고즈넉하니 좋았다. 나는, 내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을 읽으면서 내 정신은 깨어났고, S가 나를 포옹하는 꿈과 함께 나의 낭만은 되살아났다. 부활을 위해서는 마지막 의식이 필요했다. 자동차 사고. 천운으로 나는 죽지 않고, 아니면 큰 사고가 나지 않고 범퍼와 프렌다만 부서지는 조그만(?) 파손으로 끝이 났다.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혹은 그 누구도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삶이다. 그리고 조지 엘리어트의 말처럼 우리는 환각제 없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삶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적당한 긴장감을 지니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


<소설 거리>

현리-->새문안 교회 들어가는 길-->현등사-->포천(일동)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가 비포장이라서 돌아 나옴-->3거리 충돌

   (2월 23일)


그리고, 사고가 있고 1주일이 지난 뒤 나들이(이 당시에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근교의 산을 오르거나, 혼자 드라이브를 즐겼다)를 나선 김에 다시 사고현장을 찾아 왜 사고가 났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이때의 일은 여정만을 간략하게 메모해 두었기 때문에 정확히 그 때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어렴풋하게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왜 그 큰 트럭이 오는 것을 못 보았는가, 혹은 보지 않았는가?’하는 의심과, 또 ‘트럭을 못 본 것이 그 길의 구조상의 어떤 특성 때문인가?’하는 점들을 확인해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써나가면서 다시 그곳에 가서 확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래서 다시 고쳐 쓰거나, 아니면, 덧붙여 쓰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기억으로 돌이켜볼 때, 사고가 났던 그 삼거리는 특별히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못 볼 사정이 있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삼거리에서 한 오십 미터, 혹은 백 미터 떨어진 곳부터 길이 약간 오른쪽으로 굽는다는 그런 인상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긴 한데, 그것의 사실성 여부에 별다른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1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이 사건은 내 마음을 계속 자극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확히 말하자면 99년 3월 30일에 이 사건을 정확히 어떤 형식으로 쓴다는 뚜렷한 생각도 없이 적어나갔다(이 당시에 나는 시를 많이 썼기 때문에, 출발은 아마도 산문시를 쓰려 했다는 쪽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글은 곧 그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로 이어졌다.)


그 날


이제서야 그 날을 적을 수 있을 듯하다. 확신이 서는 것은 아니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아직도 내가 나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제일 무섭다, 나는 그 날을 적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언어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내 굳어진 혀는 자꾸만 움츠려 들고, 감추고, 머뭇거리고, 더듬거린다. 그 날,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 날은 내 주례 등산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배낭 하나 챙겨 아반떼를 신나게 밟았다. 47번 국도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금화 쪽으로 신나게 달리다 우회전 37번 국도로 접어든 뒤, 굽이치는 도로를 한참 달리다, 현리 직전에서 좌회전, 또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 거기가 내 등산의 목적지 운악산이었다.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계곡물 풀리지 않은 2월 초순, 현등사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밟으며, 난 S가 나를 버린 것을, 세상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이라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러거나 저러거나 세상살이란 짧고 덧없음을, 이런 생각에 몰두하다, 종시에는 뭔가 깨달음을, 이를테면 내가 운 나쁜 카드를 뽑았다고, 아니 나에게 주어진 카드가 보잘 것 없다한들 어쩔 것인가 하는, 체념의 도를 깨달았고, 죽음을 헤매던, 아니 삶도 죽음도 아니던 불안감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일동으로 가는 길을 찾다가 비포장도로라 돌아 나왔는데, 그 운명의 T자형 삼거리에서, 나는 좌회전을 하기 위해 일단 멈추어 섰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분명 내 눈은 도로를 보았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서 좌회전을 했고, 좌회전을 하고 나니 백미러로 고래만한 트럭이 나를 덮치고 있었다.

그랬다. 그 때 나는 트럭 운전수의 재빠른 순발력으로, 물론 그가 과속한 잘못도 깡그리 무시할 순 없지만, 구사일생 살아났다. 그 때는 부주의, 부주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치부해 버렸지만, 이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왜 나는 보고도 보지 못했던가 하는 점이다.

나는 나를 기만하지 않았던가? 나쁜 카드를 뽑았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카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나의 재수 없음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렵다. 그 날의 전말은 이러하다.


(090527)그리고, 다음 글은 정확히 언제 쓴 것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여러 정황에 비춰볼 때, 2007년경이 아닐까 한다.


<교통사고> 1998년 2월 21일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 년 전에 일어난 이 사고의 전말을 다시 한 번 세밀하게 기록해 봄으로써, 당시 내 정신의 움직임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사고가 일어날 때의 정황을 간단히 기술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전해에 한 여인을 사랑했는데, 내 감정이 막 솟구쳐 오르는 순간에, 그녀는 자기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애원하고, 매달리고, 결국에는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심한 신경불안을 겪었다. 내 신경불안의 극점은 대학원 종합시험을 보다가 달아난 것이 될 것이다. (달아나서의 나의 행각,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허방에 발을 내디디듯 푹푹 빠지면서 돌아다니는 그런 느낌, 그것 또한 글로 적어보고 싶은 그런 상황들이다. 왜? 무엇을 위해?) (하나의 사건을 적으려 하니까, 그 사건의 원인이 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이끌려 나온다. 내 생애의 이후의 사건들의 연쇄작용은 지금 현재로서는 ‘SI’(마가릿 말러의 분리-개별화 이론)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상당 부분 귀결된다고 보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이 당시는, 지금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그런 상태였던 것으로 비친다. 먼저 당시 공책에 적어둔 이 사고 전날에 꾸었던 꿈을 옮겨 적어 보도록 하자.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꿈에서 깬 나는 꿈이 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꿈을 꾸고 곧바로 적은 것도 아닌데 생생했다는 사실은 이 꿈이 아주 강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시간이 나서이기도 할 것이고, 또 내 마음의 아물지 않은 상처도 달랠 겸 운악산으로 차를 몰았다. 다시 당시의 일기를 인용해보자.

운악산은 아름다웠고, 현등사까지 가는 길도 고즈넉하니 좋았다. 나는, 내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를 읽으면서 내 정신은 깨어났고, S가 나를 포옹하는 꿈과 함께 나의 낭만은 되살아났다.

  (2월 23일)


현등사까지 올라가는 2킬로미터 남짓한 그 넓은 산길은 지금 남아있는 인상을 더듬어 본다면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았으나, 계곡의 얼음이 다 녹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문인인 최익현인가, 누군가가 계곡 바위에 써놓은 글씨도 기억에 남는다. 쓸쓸한 고요함, 고요한 쓸쓸함. 차분함. 이런 것들이 나를 채우고, 가벼운 산행이나마 내려오는 길에는 다리가 좀 피곤했을 것이다.


(11월 21일)이 날의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이날 산행과 그 이후의 나의 경로를 먼저 살펴보자. 47번 국도를 타고 포천 쪽으로 달리던 나는 신팔리 부근의 분기점에서 우회전하여 37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현리에서 362번 지방도를 타고 운악산 쪽으로 향했다. 지금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새문안 교회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서 어느 정도 달렸던 기억도 있다.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이 호기심, 그러나 난 이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한다.) 새문안 교회 앞에서 다시 돌아 나와 나는 운악산 앞에 차를 세우고 등산에 나섰다. 여기까지가 운악산 등산에 나서기까지의 나의 경로이다. 등산을 마친 나는 곧바로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여행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내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돌아다님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362번 지방도로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362번 지방도로는 명지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끝이 났다(이 사실을 나는 이미 이전의 여행에서 알고 있었다). 이 날의 경로는 362번 지방도를 달리다가 좌회전해서 339번 지방도를 타고 포천 일동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던 것이 339번 지방도는 비포장도로였던 것이고, 아반테인 내 차의 성능이나 손상, 안전 등을 고려해서 비포장도로는 달리지 말자는 주의였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나는 이해 여름인가 이 지방도를 굳이 달렸다. 여름 홍수 때문이었는지 길이 정말 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길을 끝까지 달려 나갔다). 어쨌거나 초입 1킬로 정도 포장되어 있었던 이 도로는 사설 낚시터를 기점으로 비포장이었고, 나는 차를 돌려 나왔다.

이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에 도달했다. 나는 362번 지방도와 339번 지방도가 만나는 삼거리로 가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망설였던 듯하다. 서울로 돌아가기는 싫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갈 곳은 없다. 그래도, 나는 삼거리에 정차하면서 362번 지방도 끝까지--그래 봐야 거기서 몇 킬로 되지 않는 거리지만--가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이 때, 명지산 쪽으로 가자면 좌회전깜박이를 켜야 했는데, 굳이 나는 우회전깜박이를 켰다. 그러나, 이 행동은 나의 무의식적 실수가 아니라, 정방향 깜박이를 넣어도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 그 깜박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편 깜박이를 넣어야 한다고 누가 일러 준 것을 듣고,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었다(물론 이것은 상호 의사소통에 혼돈을 불러오는 짧은 생각이라는 것을 이 날 사고 이후 명백하게 의식하게 되었지만). 그런 다음 나는 왼쪽을 먼저 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좌회전을 하는데 백미러로 정말이지 고래만한 트럭이 나를 덮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에 아무리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해도 충돌을 피할 수가 없을 듯해서, 나는 있는 힘껏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그런데 어느 새 트럭은 내 좌측에 와 있었다. 트럭 운전수가 내 차를 피하기 위해 자신도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던 것이다. 다시 내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데, 트럭이 내 차의 왼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트럭이 길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트럭 운전수는 오른쪽으로 차를 꺾었고, 그러면서 내 차의 왼쪽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앞바퀴의 휠에 찍힌 자국이 났고, 프렌다(펜더?)가 구겨지고 앞 범퍼가 떨어져 나갔다. 트럭 운전수가 과속을 했다(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는 과실을 물을 수도 있으나, 깜박이를 잘못 넣은 것이나(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트럭 운전수는 내가 우회전깜박이를 넣고 있어서 좌회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차량을 확인하지 않은 나의 잘못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재빠른 순발력이나 판단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큰 사고가 날 뻔한 일이었다(이 당시 자동차 수리비로 오십 몇 만원 정도가 들었다). 다행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일기 혹은 창작노트를 다시 살펴보자. 나는 이 때의 일을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굳이 말하자면 산문시에 가까운) 적어보았다. 다음은 그 초고이다.


그 날


이제서야 그 날을 적을 수 있을 듯하다. 확신이 서는 것은 아니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아직도 내가 나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제일 무섭다, 나는 그 날을 적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언어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내 굳어진 혀는 자꾸만 움츠려 들고, 감추고, 머뭇거리고, 더듬거린다. 그 날,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 날은 내 주례 등산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배낭 하나 챙겨 아반떼를 신나게 밟았다. 47번 국도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금화 쪽으로 신나게 달리다 우회전 37번 국도로 접어든 뒤, 굽이치는 도로를 한참 달리다, 현리 직전에서 좌회전, 또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 거기가 내 등산의 목적지 운악산이었다.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계곡물 풀리지 않은 2월 초순, 현등사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밟으며, 난 수경이가 나를 버린 것을, 세상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이라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러거나 저러거나 세상살이란 짧고 덧없음을, 이런 생각에 몰두하다, 종시에는 뭔가 깨달음을, 이를테면 내가 운 나쁜 카드를 뽑았다고, 아니 나에게 주어진 카드가 보잘 것 없다한들 어쩔 것인가 하는, 체념의 도를 깨달았고, 죽음을 헤매던, 아니 삶도 죽음도 아니던 불안감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일동으로 가는 길을 찾다가 비포장도로라 돌아 나왔는데, 그 운명의 T자형 삼거리에서, 나는 좌회전을 하기 위해 일단 멈추어 섰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분명 내 눈은 도로를 보았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서 좌회전을 했고, 좌회전을 하고 나니 백미러로 고래만한 트럭이 나를 덮치고 있었다.

그랬다. 그 때 나는 트럭 운전수의 재빠른 순발력으로, 물론 그가 과속한 잘못도 깡그리 무시할 순 없지만, 구사일생 살아났다. 그 때는 부주의, 부주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치부해 버렸지만, 이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왜 나는 보고도 보지 못했던가 하는 점이다.

나는 나를 기만하지 않았던가? 나쁜 카드를 뽑았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카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나의 재수 없음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렵다. 그 날의 전말은 이러하다.

(99년 3월 30-31일)


이후 나는 사고가 난 지점을 다시 찾아보았고, 그 길이 약간은 커브가 져 있긴 하지만, 그 트럭을 못 보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트럭 운전수는 내 차 깜박이의 방향까지도 보았다). 그리고, 이 사고를 표면적인 부주의의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그러한 부주의가 가져올 엄청난 파국을 생각해 볼 때 내 무의식이 작용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프로이트의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학]을 읽고 난 지금 더욱 공고해졌다. 사실 이 글을 적게 된 동기 중 일부는 이 책이 나에게 미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 내 무의식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고, 너무나도 화가 많이 나 있었던 것이다. S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나에게는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부족했고, 어머니에게 너무나도 죄송스러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의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지만, 내 무의식은 현실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현실이 나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으므로, 나도 현실에 복수를 하겠다. 그것이 나의 파멸을 불러오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도. 아니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 이 고통을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던가한다. 그러나, 이 사고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조그마한 물질적인 피해로 끝이 났다. 그 정도의 피해라도 없었다면 내 무의식은 달래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은 내 심리적 갈등이나 불안증 등이 말러의 SI 문제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삶이 우리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그 안에서 헤엄쳐 나가야 할 장이라면, 자신에게 맞는 수영법을 끊임없이 강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또 슬기롭게 살아나가는 방편이리라.

다른 여러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이때의 시도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사실 지금의 시도도 어디까지 진척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이 날 있었던 일은 사건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단순하고, 사소한 착오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별로 쓸 내용이 없는 그런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까지 몇 번의 시도는 간단하게 정리하는 수준에서 끝을 맺거나, 그게 아니면 시작과 동시에 막을 내리고 말았던 듯하다(일을 벌여만 놓고 마무리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의 무책임한 성벽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날의 사건과 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을 가능한 한 내 생각이 미치는 대로 면밀하게, 또 필요하다면 사고가 났던 현장을 다시 답사하면서 역추적 해보는 가운데, 이 단순한 사건의 이면에 담긴 중요한 의미가 드러날 듯한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가능한 한 자세하게 적는다는 것은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을 따분하게 할 위험성이 크긴 하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는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나를 찾아나가는 그런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쯤은 감수해야 한다.

좀 더 명백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아니, 그 보다 한 마디로 정리를 해보자면, ‘사고 당시 내 정신의 작용방향을 내 언어가 닿는 한계까지 밀고나가 보겠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때 이미 나는 내 정신의 한 부분, 보다 감춰져 있고, 보다 깊은 곳에 있는 부분,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부분에서는 생각이 ‘죽고 싶다,’ 내지는 ‘어떻게 되든 모르겠다’(Que Sera Sera)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의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의식적으로는, ‘그 날’에도 적었듯이, 이 날 그 동안 계속 불안했던 내 마음이 산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받아들이기가 죽기보다도 싫지만, S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이 날의 사건은 우리 정신작용에서 의식보다 무의식이 우선함을, 또 그것이 보다 강력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이 사건은 우리의 행동에 있어 1차과정의 사고가 2차과정의 사고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 한 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건 당시 단순한 사고였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 날’을 적을 무렵에 가졌던 생각, 즉 사고로 위장된 (무의식적인) 자살 기도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사정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단순화시켜서 될 문제인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이때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사고 당시 내 정신의 나침반 바늘이 어떠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를 면밀히 추적해보고자 한다.


(090603) 지난 금요일(5월 29일)에 나는 십일 년 전의 그 행로를 다시 밟았다. 그 전에 몇 가지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 몇 가지 중 첫 번째는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또 몇몇 사람들에게는 삶이 버겁고, 지겹고, 벗어 던지고 싶은 것처럼(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겠으나 에라 모르겠다 시팔), 이 글을 끝까지 써나갈 수 있을지 아무런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할까 말까 망설임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반면에, 나 같은 사람은 대체로 접는 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우선적으로는 내가 나에게 건네는 글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밝힐 필요는 없을 듯도 하나, 또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누군인지 조금은 밝혀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을 일으킨다. 기표는 자꾸만 미끄러진다는 라캉의 말에 취해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주절주절 대고 싶다. 내가 쓰기로 한 글보다 그냥 넋두리가 더 손쉽고 더 매력 있는 듯하다. 말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믿음. 말, 말, 말. 내 좁은 머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쓴다. 지난 금요일에 나는 십일 년 전의 그 행로를 다시 밟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에 몇 가지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을 맺어야 할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어디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지 누가 알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어디서 끝내는 것이 옳은지 누가 알 수 있는가? 그 판단의 주체는 누구인가? 결국에는 내 마음대로 아닌가? 그런데, 내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모든 것은 결단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하나의 결단이고, 또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결단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이야기를 S와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 부분은 그러고 보니 「재인폭포」라는 글을 쓸 때 어느 정도 정리한 것이라 그걸 인용하기로 한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S가 잠시 잠깐 K에게 한 눈을 팔았다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얼른 K와의 관계를 접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S의 입장에서 보자면 K가 자신을 좋아하길래 그 마음을 그대로 접기도 그래서 잠시 두고 보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솔직하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셈이었다. 사정이 이렇다고 본다면, S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털어 놓았을 때, 서른두 해나 이 세상에 두 다리를 붙이고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또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인 S의 인생 선배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를 하거나, 아니면 보다 직접적으로 욕이라도 한 마디 해주거나,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처 입은 자아에 대한 보상으로 뺨이라도 한 차례 때려 주는 것으로 상황을 끝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K는 젖 조르는 아기마냥 엉엉 울며 유치하게 S에게 매어 달렸고, S가 오히려 누나가 되어 K를 달래고 얼러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왜 S가 K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했을 때 K는 이제 이 세상이 끝났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십 대에 이미 겪었어야 할 통과의례를 늦은 나이에 그것도 아주 미숙하게 치르고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던 삶의 공허감, 무목적성, 무의미성 이런 것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는데--물론 이것은 삶이라는 복잡다기한 총체를 일면적으로 단정 짓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삶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나 인상이 그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는데--또, 거기다가 대학 시절 내내 혼자 좋아했던 후배에게 어쭙잖은 마음을 고백했을 때, 그 후배가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되받았을 때, 하우스만의 시처럼 주지 말아야 할 마음을 주어버린 뒤, 땅바닥에 버려진 마음 때문에, 기나긴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 그래도 그 때는 이십 대였으니까. 그 때로부터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 후배인 S에게로 K의 마음이 쏠릴 때, K는 이전의 상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S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결과는 역시 7년 전의 되풀이였다. 아니 그때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것은 이번에는 K가 자신이 사랑할 수 있고, 또 자신을 사랑해 줄 여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막 갖게 된 그 순간에, 그러니까 조심조심, 그러면서도 크게 크게 불어 올리던 풍선을, 아니 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마음을, 바늘인지, 칼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터뜨려 버린 그런 격이었다. 터져서 찢어진 채 형편없이 쪼그라든 풍선, 그 풍선 같은 마음. 견딜 수가 없어서, S에게 매어달리고, 젖 조르는 아기 마냥 엉엉 울고. 마침내는 죽어버리고 말아야겠다는 극언까지 내뱉고. 그러다가, 닷새간이나 단식을 하면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해해 보려 했던 것. 전화도 끊어 버리고, 물만 먹으며, 누워서 보낸 그 긴 시간. 정체된 듯한 시간. 그때 재차 확인되던 자신의 어리석음, 혹은 자신과 타인과의 넘어설 수 없는 그 거리감. 자신의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


(090608)「재인폭포」에서 인용한 부분은 그런 대로 마음에 든다. 그 당시(2001년도)엔 그래도 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언어가 좀 살아서 숨 쉬는 느낌이 든다. (글을 어떻게 진척시켜야 할 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 좀 더 읽고 생각해야 한다. 나르시즘이다. 자기애적 인격장애이다.)


(120703)2009년도에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상당히 많이 나아갔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 글은 그런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그냥 적당히 마무리를 하자는 것이 지금의 마음 상태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 글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다. 아마도 혼란스럽고, 중복이 심하고,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하는 물음표를 마구 쏠 지, 그것이 아니라면 초반에 벌써 포기하고 나가 떨어졌으리라. 뭐, 이런 따위의 글을. (120705) 이번의 이 글은 현재 생각에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교통사고와 관련해서 내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추적하는 그런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당시에는 잘 의식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이 일종의 자살의 기도였거나, 아니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기 방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S와의 관계는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내 정신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와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고방식을 밀고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 사이에 내 언어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새롭게 가지게 된 언어관에 따르자면 언어라는 것은 애시당초 그 출발부터가 우리가 그 전에 생각해 왔듯 믿을 수 있는 것, 혹은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20712)인간의 모든 사고나 행위, 판단 등에 의혹의 눈길을 갖게 된 것은 니체가 언어의 기원에 대해 한 이야기, 그 출발점에 대해 강한 의문을 표한 것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제정이 진리의 첫 번째 법칙을 규정한다. 언어에 의해 처음으로 진리가 거짓과 대비된다. 그런데 언어라는 관습은 과연 실재의 올바른 표현인가? 언어는 어느 사물의 이런저런 특징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호하고 다른 요소는 자의적으로 제한함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인간은 사물의 인간에 대한 관계만을 주시하며, 이 관계마저 과감한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가령, 사물이라는 신비로운 X는 처음에 신경자극으로, 다음에는 이미지로, 마지막에는 기호의 소리로 번역된다. 이처럼 대상 X가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는 언어와 X 사이의 어떤 유사성에 관심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무의식적 상상력에 의해 양자가 마치 동일한 것인양 연결하는 은유작용이 작동한다. 즉, 언어의 발생은 논리적인 연결 과정을 밟지 않는다.


니체의 위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설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언어의 기원이나 출발에 있어서의 비논리성을 니체는 그 언어를 매제로 하여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냥 슬그머니 펜을 내려놓고 싶기도 하다. 이만큼이나 말했으면 되지 않느냐고, 뭘 덧붙이려고 그러느냐고. 말을 가진 이상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 말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 말을 잘 사용하려고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지러운 한바탕의 춤이 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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