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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죽령에서 만난 사람

by 길철현 2016. 3. 13.


 죽령에서 만난 사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다소 막막하다. 당시에는 내 감정의 상태와 맞물려 가슴을 먹먹하게 한 그런 사건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세상의 하고 많은 일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때의 그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 않은 일이기에 시간이 오래 지나기는 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적어보기로 한다. 사실 몇 년 전인 2005년에 이 일을 단편 소설로 써보려고 한 적도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시도는 나의 다른 많은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 전인 98년도 여름에 나는 시작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써지던 시가 방앗간에서 가래떡이 뽑아져 나오 듯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었다(그 덕택에 석사 논문을 못 쓰고 말았지만). 이 때 약삭빠른 나의 머리는 지인들에게 자비로 출간할 시집의 후원금을 걷자는 쪽으로 움직여 갔고, 그래서 한 삼십 명의 사람들에게 일인 당 만 원 안팎의 돈을 받았다. 하지만 잠시 잘 써지던 시는 곧 씨가 말라버렸고, 사람들에게 한 나의 약속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2년 뒤에 나는 다시 맹렬하게 시작을 하기 시작했고, 또 다시 새로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나의 시도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후원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실망시키고 말았다. 아무도 나를 사기죄로 고발하지는 않았지만--법학 전문대 교수로 있는 고등학교 친구는 나를 사기죄로 고발하겠다고 몇 번 반협박을 하기도 했다--시를 쓰지 못하는 것과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항상 부채로 남아 있었다.

  2007년도에 나는 처음에 쓰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던 석사 논문을 가까스로 마쳤다. 당시 석사 논문 형식에 맞춘 검은 표지의 논문 외에, 따로 돈을 좀 투자해 예쁜 소책자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의식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이 책을 나를 후원해 준 사람들에게 주어야겠다는 의도가 작용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박사 과정을 수료하면서 석사 논문의 형식적으로 틀린 부분들을 다시 손보고, 내 개인적 소회나 논문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 작은 책자로 만들었다(전에 석사 논문을 50부 정도 찍었는데 다 나눠준 것도 한 원인이다). 당시에 나를 후원해 준 사람들 중 연락이 닿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시집 대신에 이 책으로나마 부채의 일부를 탕감하고, 또 나머지는 팔아서 제작비의 일부라도 충당하자는 생각이 작용했다(물론 가장 큰 욕망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고 싶다는 것이지만).

 그런데, 후원자의 이름을 적어 둔 수첩을 펼쳐보다가 낯선 이름 하나--당연한 말이지만 후원자는 대부분 나와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이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핸드폰 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 이름이 내가 속한 대학교 탁구 동아리의 후배 이름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굳이 핸드폰 번호는 왜 적어 두었을까? 하다가, 이 사람이 내가 글로 써보고자 했던 작은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퍼뜩 내 뇌리를 스쳤다(두 사람은 이름은 같은데 성이 달랐다). 지금도 이 분은 면목동에 살고 있을까? 그런데 이 글은 이 분이 사건의 핵심에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디쯤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일단 날짜부터 정확하게 적어보도록 하자. 2000년 12월 3일. 나는 내가 사는 곳인 서울에서 본가가 있는 대구로 차를 몰고 내려가는 길에 죽령을 넘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 당시 나의 정황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여 먼저 그 부분부터 적어보도록 하겠다. 이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디서부터 끌고 와야 할까? 이러다가 내 이야기만 많아지고 그 분의 이야기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마는 주객전도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어쩔 수 있겠는가? 언제나 무대의 중앙에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저자 혹은 화자가 중심에 있는 것을(물론 데리다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그걸 조금 바꿔 타협적으로 말을 해본다면 ‘글을 쓸 때는 저자가 주인공이고, 글을 읽을 때는 독자가 주인공이다’가 되지 않을까?).

 

  일단 밀고 나가보자. 당시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지 못하고 또 1년 가까이 대구에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여동생을 간호하는 과정과 그에 뒤따르는 우울과 무기력의 반대급부로 상당히 고양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시를 얻었다는 생각, 또 어쩌면 여인의 사랑을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 등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이 당시 나의 생활은 다소 허공에 뜬 그런 것이었다.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난 외부적으로 이룬 것이 별로 없었고, 대학원 후배였던 그녀와의 만남도 그녀에게 다른 남자--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혹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그런 마음이었다. 이날따라 난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철원의 삼부연 폭포로 차를 몰고 가는 와중에 걷잡을 수 없는 울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울음을 나는 그 때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이라고 적었는데, 이 울음은 단순히 그녀와의 이별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 울음의 와중에 “엄마, 엄마, 왜 날 버려”라고 외치기도 한 걸로 보아 내 마음의 좀 더 깊은 곳과 맞닿아 있는 슬픔이고 아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나는 이 날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뚜렷한 생산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아 남는 것이 시간이었기에, 그녀와 이틀 전에 놀러 갔던 삼부연 폭포를 다시 찾아 시도 쓰고(머릿속에서는 「부연사에서」라는 시를 이 여정 내내 써나가고 있었다), 북한강 위에서 은빛 물고기떼처럼 반짝이는 햇살도 구경하면서 돌아돌아 대구로 내려가고 있었다(정작 무슨 일로 대구에 내려간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려했던 대로 글은 결국 나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느낌이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난 춘천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탔던 듯하다. 당시 중앙고속도로는 죽령터널 구간이 미완공이어서 그 구간은 5번 국도를 타고 길고 험준한 죽령을 넘어야 했다(우리나라 터널 중 가장 긴 죽령터널은 일 년 뒤인 2001년 12월 4일에 완공되었다). 이제부터 그 분 이야기이다. 2005년도에 나는 다음과 같이 글을 시작했으나 이내 중단하고 말았다.


힘겹게 고갯마루를 넘은 차는 이제 급커브를 조심하면서도 제법 속도를 붙여 내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오를 때만 해도 사위가 환했는데, 고개를 넘자마자 짧은 겨울해가 단박에 넘어가고 말았는지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강행군이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서울을 출발하여, 연천의 재인폭포, 철원의 삼부연 폭포, 그리고 수피령을 넘어, 국도 5호선을


 그 당시 써둔 일기를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자꾸만 속도가 붙으려는 차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제어를 하면서 길고 긴 내리막을 한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고개 중턱에 있는 희방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막 지났을 즈음 바로 앞에서 내려가던 대형 트럭이 좌측으로 빠지면서 중앙선을 넘다시피 했다. 나도 그 트럭을 따라 얼떨결에 좌측으로 핸들을 틀었다. 그 때 내 눈에 웬 남자가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 대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사고라도 났는가 했다. 그래서 또 엉겁결에 차를 세웠는데, 손을 흔들어 대던 남자가 차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나로서는 정확한 상황 판단이 안 되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내가 차를 세운 것을 내 차를 타라는 의도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중키의 그 남자는 6,70년대 영화배우들이 잘 쓰는 듯한 챙이 거의 없는 베이지색 중절모에다 진회색 계통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사정을 펼쳐보였다.

  “영주에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왔다가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그만 핸드폰을 두고 왔지 뭡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영주역에 맡겨 놓았더라고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운전 기사분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니까 여기에 세워주더라고요. 그런데, 한 시간 가까이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손에다 만 원을 끼워가지고 흔들고 있었다 아닙니까?”

  나보다 좀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남자--사십 대 초반이나 중반 정도--는 어색할 수도 있는 중절모가 잘 어울렸고, 그래서 그런지 다소 거친 피부에다 뚜렷한 윤곽의 얼굴이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조연이나 단역배우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상과는 달리 집은 면목동이고 직장은 인천에서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게 되어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풍기에서 곧바로 중앙고속도로를 타면 되었지만 이왕 도와주는 김에 그를 그의 목적지인 영주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영주 시내까지 들어갔다가 영주 인터체인지를 탈 경우에는 나로서는 최소한 이십 분 정도는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었다(이 날 대구에 내려간 것이 단순히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것만은 아닐 것이나, 낮 동안에 너무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를 헤집고 다닌 탓에 대구 도착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이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울 겸 그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고향은 앞서 말한 교수로 있는 친구와 같은 춘양이었다. 또 내가 그 전 해 9개월 간의 긴 동생 간호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 넘었던 춘양 근처 노루재 이야기를 하자, 그는 노루재는 안개가 많이 끼고 상당히 높고 험한 고개라고 받아 주었다. 노루재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노루골이라 노루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도.

영주 시내에 들어가서 나는 적당한 위치에 그를 내려주려고 하는데(영주역까지 가는 것은 지나친 친절이자 또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고 생각을 했던가?) 그가 만 원을 내밀었다. 나는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내가 미안해서 안 되니까 받으세요.”

  “돈 받자고 태워준 것이 아닌데.”

  “내가 미안해서 그런다니까.”

  “그럼, 이렇게 하시죠. 내가 시 쓴 걸 묶은 것이 있는데 그걸 드릴 게요. 시집을 내려고 후원금을 걷고 있거든요.”

  “나도 시 좋아합니다. 2년 전에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얼마나 허한지.”

  아내의 죽음이라는 뜻밖의 말에 내 가슴은 갑자기 먹먹해졌다.

  “어쩌다가?”

  “그게 말이죠, 나도 잘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뇌진탕으로 인한 뇌출혈이라고 했는데. 아내가 갑자가 어지럽다고 해서 병원에 갔지요. 병원에서는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일단 자세한 조사를 해봐야 하니까 입원을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 다음 날 그냥 죽고 말았지요.”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의 삶은 멜로드라마보다도 더 극적이고, 그리고 또 극적인 사건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인과 관계도 찾을 수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더욱 기가 막힌다는 생각을 했다. 트렁크에 넣어둔 시 묶음을 꺼내는 동안 석 달 전 자다가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하고만 고등학교 친구 기택이의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사람은 죽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

  나도 죽는다.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 . . Time to die.

  왜 우리는 모두 거리로 뛰쳐나가 “죽고 싶지 않다”고 외치지 않는가?

  죽음이 나를 찾아오기 전에 내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무에 그리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죽음은 없다.


  그에게 시 묶음을 전하고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굳게 악수를 한 뒤 그와 나는 헤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의 나의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런 것이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가 앉았던 운전석 옆자리 앞 구석에 둔 싸구려 내 카메라가 온전히 있는가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가 처한 아픔에서 나의 아픔, 아니 우리 인간 모두의 아픔을 끌어냄과 동시에, 그를, 혹은 타인을 잠재적인 도둑으로 여기는 이 아이러니. 이 당시에 난 나 자신의 행동을 치졸함으로 몰아부쳤지만, 지금은 우리의 삶이 그러한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영주 인터체인지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올라선 다음 대구로 향하는 길에 다시 울음에 사로잡혔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부연사에서」를 계속 머릿속에서 써내려간 것은 분명하다.


조심스레 쪽문을 열고 법당으로 들어서자

세상의 번뇌 모두 떨쳐버리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이치를 되새기라는 듯

폭포 소리가 오히려 크게 들려온다


사실 나는 이 날 친구들과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하고는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딱히 전화가 올 때도 없었는데--아니 투정부리는 아기처럼 여자 후배를 애태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핸드폰을 꺼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는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뒤덮고 있는 치울 수 없는 먹구름 앞에서 티격태격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난 꺼두었던 핸드폰을 가만히 켰고 기름을 넣을 겸 군위 휴게소에 들어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이것이 내가 죽령에서 만났던 그 분에 대한 이야기의 전말이다. 기억이 미치지 않는 부분에는 약간 허구가 가미된 것도 있다. 이를테면 그 분 부인의 죽음의 세세한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생각보다 쓰기가 힘들었고, 거기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적어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이 많이 간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만 글을 접는다.

                                                                                                                              (1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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