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와 낙지 혹은 문어, 그리고 언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1. 경위 보고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이 이야기를 어디서 접하게 되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소설을 써본다. 여동생과 낙지를 먹다가 다리가 몇 개인가를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인터넷에서 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접하게 된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충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놀라움을 안겼을 이 일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 것은 다소 의아하다. 기억을 찬찬히 곱씹어 보니 위에 쓴 일이 정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구나. 이 이야기라는 것은, 우리(남한)가 오징어라고 부르는 것을 북한에서는 낙지라고 부르고, 낙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징어라고 정반대로 부른다는 것.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고 들어가 본다면 논문 한 편이 나올 듯도 한데 그것은 정말로 관심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어쨌거나 이 이야기 혹은 이 사실은, 언어라는 것이 외부 사물 혹은 대상과 처음부터 강한 접착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규약’의 성격이 강하다는 평소의 나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예(물론 남북의 언어의 이질화의 문제도 당연히 따라오긴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내가 가입한 정신분석 카페에 올라온 윤제림의 [누가 더 섭섭했을까]라는 시를 보는 순간 영감이라기보다는 자극을 받아 나도 같은 제목으로 오징어와 낙지에 관해 썼다.
북한에 갔더니
오징어를 낙지라 하고
낙지를 오징어라 하네
남조선에 갔더니
낙지를 오징어라 하고
오징어를 낙지라 하네
(여담을 좀 하자면 문학 카페에 이 시를 올렸더니 누가 5점 만점에 3점이라는 짠 평점을 주었다. 시적 성취도라는 면에서 보면 3점도 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이 시의 이면에 있는 여러 생각들을 읽어주기를 원했던 듯한데, 아무래도 그것은 나만의 불가능한 욕망인 듯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 제목을 [누가 더 황당했을까]로 바꾸었다가, 좀 폭을 넓히자는 의미에서, [지금 한반도에서는]으로 바꾼 뒤, 내가 가입한 탁구 카페에 올렸는데, 시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주꾸미와 꼴뚜기 등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댓글만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흔히 먹는 것들이긴 하지만 정말로 그것들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고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 지도 잘 모르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쳐서, 그걸 좀 조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조사를 하다보니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관도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는 쪽으로 자꾸만 확장되어 갔다.
2. 오징어와 낙지 혹은 문어
(일단 말하고 싶은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머리가 좀 아프다. 너무 많은 정보 앞에서 어느 것이 맞고 또 어떤 것은 부정확한지를 분별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전문지식이 없는 인문학도의 입장에서 파악한 것을 정리해본다.)
오징어와 낙지(혹은 문어)는 둘 다 연체동물문(이건 쉽다, 둘 다 몸이 흐늘흐늘하니까, 조개들도 여기에 포함), 두족류(이것은 머리 바로 밑에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새아강(이건 아가미가 한 쌍이라 그렇게 부른단다. 두 쌍이면 사새아강이라고 한단다)에 같이 속한다.
그런데 생물 분류 단계(이러한 분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초를 잡았다고 했던가? 그리고 현재 우리의 분류는 린네의 설을 따르고 있구나) 중 목에서 오징어는 십완목, 낙지(혹은 문어)는 팔완목으로 나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오징어는 다리가 열 개, 낙지(혹은 문어)는 다리가 여덟 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지와 문어의 차이는 어떻게 되는가? 인터넷 자료가 서로 상충되는 면이 있어서 정확히 말하기는 힘이 드는데 큰 맥락에서 파악을 해 본다면, 둘 다 낙지과(문어과라고 한 곳도 눈에 띈다)에 속하는데, 낙지속과 문어속으로 나뉘는 듯하다. 또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힘드나 낙지보다 문어가 크고, 낙지가 연안이나 갯벌에 산다면 문어는 심해에 산다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우리가 흔히 문어라고 부르는 것은 왜문어라고 소개한 곳도 있었다).
대충 정리가 된 듯도 한 데 이제 남은 주꾸미와 꼴뚜기와 한치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주꾸미는 좀 더 큰 분류로 보면 문어(혹은 낙지?) 쪽에 꼴뚜기와 한치(한치의 원래 명칭은 한치오징어인 듯. 한치라는 말은 크기가 한치밖에 안 되는 작은 오징어라는 데에서 나왔다고 한다. 세발낙지가 ‘발이 가늘다’에서 나온 것처럼. 언어가 은유 혹은 비유라는 것이 여기에서도 잘 드러나는 구나.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한치를 한치꼴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오징어 쪽에 넣을 수 있다.
오징어와 낙지 혹은 문어를 잘 먹지 않는 영어권에서는 단어가 우리만큼 발달해 있지는 않은 듯한데, 하지만 오징어에 해당하는 영어는 squid, cuttlefish이고(거기다 먹는 오징어는 calamary라고 불리는 듯하다), 낙지나 문어는 대체로 octopus라고 부르는 듯하다. 조금만 더 논의를 연장해보면 다들 알다시피 쌀을 주식으로 하지 않는 영어권에는 우리처럼, 벼, 쌀, (쌀)밥으로 세분화되어 있지 않고 rice밖에 없다. 다시 말해 벼도 rice이고 쌀도 rice이고 밥도 rice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3. 언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그런데, 내가 한 이 작업은 오징어를 낙지라 하고 낙지를 오징어라 하는 북한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분류가 다 뒤바뀌어야한다. 이러한 상황은 상당한 혼란을 초래함과 동시에 언어라는 것이, 플라톤이 [크라튈로스](언어의 기원을 다룬 책 중 하나인데)에서 헤르모게네스(사람 이름)의 규약주의(원문을 인용해 본다면, 이름은 합의된 표시로서 합의를 한 사람들, 그러니까 이름 붙일 사물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물을 표현해 주며, 바로 이 합의가 이름의 올바름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네. 누군가가 현재 합의된 그대로 합의를 하든 그 반대로 합의를 하든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보다 크라튈로스(사람 이름)의 자연주의(다시 원문을 인용해 본다면, 표현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과의 닮음에 의해서 표현하는 쪽이 우연적인 것에 의지해서 표현하는 쪽보다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뛰어납니다)를 옹호하는 측면보다는, 소쉬르가 기표와 기의라는 개념을 통해 언어(말)의 자의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일차적으로는 더 설득력(구체적으로 하늘에 떠있는 밝고 둥근 것을 해라고 하든, 태양이라고 하든, sun이라고 하든, die Sonne라 하든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모든 말이 동일하게 하늘에 떠 있는 밝고 둥근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약간 논점에서 벗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이 글을 촉발시킨 것이 남한과 북한의 오징어와 낙지의 차이였으므로, 남한과 북한의 언어의 차이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구체적이고 단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남한 사람)는 육이오가 남침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아니 거의 대다수(아니 이 말보다도 더 높은 퍼센티지의 사람들이)가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글로 표현하는 사람은 잘못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릴 지도 모를 일이다. 이 미묘한 이야기를 최대한 객관적으로(내가 가장 믿지 않는 말 중의 하나이지만) 서술해보자.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87년 우리 국민의 민주화를 향한 강한 열망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제동을 걸었고, 그 여파로 그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책들도 많이 출간되었다. 그 중에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라는 책도 있었는데, 이 책을 나는 93년도에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육이오 부분을 서술한 것을 보고 오징어와 낙지 이상으로 깜짝 놀랐다. 북한에서는 육이오를 명백한 북침으로 규정짓고, 침략한 국군 부대의 이름과 그 지역까지 명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북침이라고 교육을 받아온 북한 사람들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다수(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높은 퍼센티지의 사람들)가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런 남북한 사람들이 대면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극렬 무신론자와 극렬 기독교도가 논쟁을 벌일 때 이상의 반목이 일어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 적절한 대응 관계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 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심지어 대부분의 철학자들조차도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어가 문화로서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징어와 낙지의 예가 보여주듯 언어가 사물 혹은 실재를 적절하게 반영한다기보다는 규약에 지나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언어라는 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문제를 창조자에게로 환원시켜버리지만, 사실 언어의 기원 문제는 인간의 지속적인 관심사 중의 하나였고 많은 논자들이 글을 써왔다(한 때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답을 얻을 수 없고 혼란만 가중시키기 때문에 파리 언어학회에서는 1886년에 “본 회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는다”라고 공표한 적도 있었다).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언어의 기원 문제는 상당한 궁금증으로 남아 있고, 그래서 기회가 닿는다면 언어철학을 좀 더 집중적으로 공구해보고 싶기도 하다.
내가 읽은 책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의 [인간언어의 기원에 대하여]는 쥐스밀히 등의 신수설에 반박하며, ‘이성을 갖춘 인간이 언어를 만들었고, 그 이후로 언어는 인간과 함께 발전해 왔다’는 생각을 자신감 있게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인간이 언어 표현을 하게 된 데에는 감정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대담한 상상력을 내놓는다(본문을 인용해보면, “욕구는 첫 몸짓들을 유발했고, 정념은 첫 목소리들을 토해내게 했다. . . .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토해내게 하는 것은 배고픔도 목마름도 아니고 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 같은 것들이다”). 언어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도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의 글은 난해하다고 정평이 나 있어서, 유명한 철학자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없는데, 책은 수십 권을 구해놓고도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하고, 다만 해설서만 한두 권 읽었을 뿐이지만, 이명현이 쓴 [이성과 언어]에 깔끔하게, 그러니까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서,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도 본문을 인용해보면, 그의 초기 철학에서는 “인간의 개념 체계는 세계의 구조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으로서, 개념 체계 구성은 언어 사용자인 인간의 조건과 무관하다”라고 주장했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그 언어관이 “인간의 개념 체계는 인간의 삶의 조건(형식) -- 원초적 조건과 문화적 조건 --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구성된다”로 바뀌면서 <말놀이>(Sprachspiel)와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내 언어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것은 니체의 언어관, 즉 언어라는 것인 인간중심적인 작위적이라는 것이었다. (왜 거기에 그렇게도 매달렸는가 하는 것에 대해 지금은 좀 알듯도 한데 이 부분은 다른 기회에 또 써볼까 한다.)
언어의 제정이 진리의 첫 번째 법칙을 규정한다. 언어에 의해 처음으로 진리가 거짓과 대비된다. 그런데 언어라는 관습은 과연 실재의 올바른 표현인가? 언어는 어느 사물의 이런저런 특징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호하고 다른 요소는 자의적으로 제한함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인간은 사물의 인간에 대한 관계만을 주시하며, 이 관계마저 과감한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가령, 사물이라는 신비로운 X는 처음에 신경자극으로, 다음에는 이미지로, 마지막에는 기호의 소리로 번역된다. 이처럼 대상 X가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는 언어와 X 사이의 어떤 유사성에 관심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무의식적 상상력에 의해 양자가 마치 동일한 것인양 연결하는 은유작용이 작동한다. 즉, 언어의 발생은 논리적인 연결 과정을 밟지 않는다.
거기다 니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일본의 학자인 마루야마 게이자부로는 ‘<모든 현실은 말이 만들어가는 기호공간으로서의 텍스트>(이 말은 직접 한 사람은 이즈쓰 도시히코이다)이며, 이러한 현실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 이어서 <존재 자체가 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으로 확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말은 나에게 말과 우리가 흔히 “실재”(Reality, 혹은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부르는 것의 관계를 잘 밝혀주는 언명이라는 생각에 한 동안 마치 큰 발견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도시히코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라캉이 “상징계”라고 부르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일 년 전쯤에 나는 김우창이 미국 시인인 월러스 스티븐스의 시에 드러난 언어관을 이야기하면서 메를르-퐁티를 원용하고 있는 부분에서 니체의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부정적인 언어관에서 벗어날 길을 찾게 되었다. 그 때 그 글을 읽고 난 뒤의 소감을 간략하게 적은 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언어라는 것이 “닫힌 체계”라면(language is at bottom a closed system that refers only to itself) 어떻게 리얼리티라고 하는 것, 혹은 “언어가 아닌 것”과 연관을 맺을 것인가, 라고 했을 때, 퐁티의 견해는 언어가 적어도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인 필요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초적인 리얼리티가 인간 언어로는 번역해 낼 수 없는 침묵”이고(어떻게 이 주장이 가능한지, 또 거기에 동조하는 지는 글을 좀 더 읽어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언어는 이 침묵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이 글을 읽어보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몇 구절을 옮겨본다.
- the origin of language lies in our bodily presence in the world. The body is itself an expressive being. Language is an elaboration of the originary expressivity of the body. The body here referred to is not merely the fleshly object that exists as a thing among the world of things, but a phenomenal body that while serving as "the common texture of all the objects" transcends itself into the world. (182)
- A view of the world is a function of biological necessities, which guarantee and at the same time distort its truth. (184)
- Primordial reality is silence untranslatable into human speech. The function of speech is not to decipher it but point to this silence. (187)
- The language of man is the language in nature and yet through it, man realizes himself. (188)
- the beginning of sound in nature, its entrance into a vital community of man and the eventual, complete lingualization of the world. (189)
김종길 편, [현대영미시연구] 중
부족한 대로 오징어와 낙지에서 꽤 먼 길을 온 듯하다. 또 어딘지 모를 그곳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리라.
(언어의 간주간성(intersubjectivity)을 강조한 훔볼트, 또 언어 행위를 복합적인 일련의 과정(process)로 본 프로이트, 인간이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은 돌연변이로 인해 언어 유전자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는 촘스키 등에 대해서도 좀 더 공부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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