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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아리랑 단상 (091031)

by 길철현 2016. 4. 19.

<아리랑 단상>


문득 <진주난봉가(진주낭군가)>라는 민요가 머릿속에 맴돌아, 인터넷에서 그 노래를 찾아 듣고(이름을 알 수 없는 여자가 부른 것인데, 목소리가 탁 트인 것이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따라 부르기도 하다가, 갑자기 또 <아리랑>이 듣고 싶어서 이 노래도 찾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리랑>은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경기 아리랑>인데,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찾아보니까,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이 노래가 쓰인 이후로 그렇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서는(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가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것이었으나, 곡조는 나운규가 편곡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자료를 보니까, 나운규가 편곡한 <아리랑>은 우리의 전통적인 리듬이 아니라, 서양의 리듬인 4분의 3박자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이 문제는 흥미롭고 정확히 규명해야 할 것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범주를 넘어가므로 이 정도로 줄이겠다). 또 어디에서는 우리의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1위’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정말 <아리랑>은 언제부터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그 말이 뜻하는 바도 잘 알 수 없지만 우리 민족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해온, 지구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全)민족적 애창곡이자, 무수히 많은 변종들을 지닌 노래이다([아리랑]의 저자 김연갑에 따르면 50여종, 3000여 수에 이른다고 한다). 이 <아리랑>이 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무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다시 한 번 사랑의 좌절을 맛보면서, 나는 내 마음의 간절함이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한다는 걸 적실하게 절감했고, <아리랑>의 가사가 그 이별의 아픔과,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상대방이 발병이라도 나서 떠나지 못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그 짧고 쉬운 몇 마디에 다 담고 있어서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내 마음을 잘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인터넷에서 찾아 읽은 <아리랑>에 얽힌 전설 중에서 ‘리랑과 성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는데(아래 자료 참조할 것), 같은 전설인데도 우리의 것은 두 사람의 이별에 오해와, 비논리가 끼여 있고, 북한의 것은 계급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이 사뭇 흥미롭다. 이 <아리랑>에 나오는 이별,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이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 대한 노래가,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을 언어로 풀어내기란 지난할 작업일 듯하지만, 직관적으로, 느낌이 가닿은 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것이 ‘인간 정신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한 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을까, 바꿔 말한다면 ‘인간 의식의 활성화, 즉 언어의 습득에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인 대상과의 일체감의 해체(?)’ 이런 것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사랑하는 님과의 이별’이라는 형식으로 제시되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게 되는데, 그건 또 아마도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 느끼게 되는 가장 강한 감정이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이러한 생각들은 지속적으로 해온 것이면서도 또 동시에 이렇게 구체화하는 것은 다소 즉흥적이다. 계속 생각을 밀고 나가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나의 생각은 일제 강점기에 나온 세 작품, 즉 나운규의 <아리랑>과, 김소월의 <진달래꽃>, 그리고 한용운의 <님의 침묵>으로 이어진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가 ‘한’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김우창은 이 ‘한’이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는 듯한데) 이 당시에 이러한 정조가 강하게 부각되는 까닭은 당연하게도 그 ‘한’의 정서가 ‘나라를 잃은 슬픔과 결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아리랑>이나 <진달래꽃>이 그 슬픔을 노래하거나, 절제하는 정도에 머문 것과는 달리 <님의 침묵>에서는 그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다(<진달래꽃>은 22년에, 영화 <아리랑>과 <님의 침묵>은 26년에 발표되었다). <아리랑>은 현대에 와서는 지바 탁구 선수권 대회에 남북이 공동으로 출전을 했을 때, 그리고 특히 한*일 월드컵에서 한 번 더 전(全)국민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윤도현이 편곡한 <아리랑>은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그것은 슬픔의 가사를 흥겨운 가락에 실어버린 데에서 오는 불협화음, 혹은 그 ‘발상의 전환’이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단번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이러한 현상은 마야가 부른 <진달래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윤도현의 <아리랑>은 나에게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우리나라가 ‘한’의 국가가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한용운 식의 ‘한’의 극복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한’을 마음껏 비웃고, 훌쩍 도약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참고 자료> 리랑과 성부의 전설


1.離郞이란 노복과 成富란 노비의 사랑 이야기.


경기도 어느 지역에 김판서가 낙향해서 살고 있었다 한다. 이 사람이 인근 농토를 장악하고「장리」,「도지」,「물세」등 을 가혹하게 받아내는 바람에 농민들은 매년 끼니 잇기가 힘들었다. 거기에도 설상가상으로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마 을 사람들은 거의 아사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김판서의 가혹한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자연히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극으로 치달려 김판서를 쳐 없앨 모의를 하 기에 이른다.

한편 김판서 집엔 성부란 노비와 리랑이란 노복이 있었는데 둘은 터놓고 말은 못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리랑은 동 리 사람들의 모의에 깊이 가담하고 있었다. 성부도 사랑하는 리랑의 일에 반대할 리가 없었다. 모사는 빈틈없이 무르익어 갔다.

마침내 거사일로 작정한 시월 그믐날이 닥쳤다. 달도 없는 캄캄한 어둠을 틈타 농군들은 김판서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김판서를 처단한 즉시 관가를 습격해 대부분의 아전을 죽이고 말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급히 관군을 풀어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관군의 창칼 앞에 농민들은 이겨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다행히 성부와 리랑은 구사일생으로 마을을 탈출해서 인적이 드문 수락산 속으로 숨어들었다.관군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성부와 리랑은 부부로 결합되어 몇 달 동안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내게 된다.

그러나 리랑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다시 사람을 규합해 탐관오리와 대항하겠다는 재거사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달덩이 같은 어여쁜 성부와 이별해야 한다는 아픔이 거사계획 못지않게 그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리랑은 자기의 속뜻을 성부에게 호소했다. 성부는 침묵으로 승낙했고 리랑은 꼭 백일이 되면 온다고 약속했다. 山中에 혼자 남은 성부는 리랑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작은 밭을 일구고, 해가 질 녘이면 '리랑-'하고 외쳤다.

그런 성부의 아리따운 모습은 차츰 동리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고 마침내 어느 날 음탕한 산마을 부자 백가의 눈에도 띄고 만 것이다. 그날부터 백가는 치근덕거리며 성부를 꾀어내기에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시작했다. 성부가 백가를 피하면 피할수록 백가의 눈은 더욱 충혈 되어갔다. 매일같이 찾아와 아랫목에 버티고 앉은 백부자를 속여 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성부는 더 이상 그를 피할 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성부는 리랑의 제사만이라도 치르고 몸을 허락하겠노라 백부자에게 말했다.

리랑의 거짓 제사가 치러지는 날도 백부자는 일찌감치 성부의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성부는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체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날이 바로 리랑이 돌아오마고 약속하며 떠난 지 꼭 백일이 되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자 제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백부자는 빨리 제사를 치르라고 성화를 해댔다.

그때 인기척과 함게 한 사내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한동안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먼저 리랑의 비수가 번득여 백부자를 쓰러뜨렸다. 리랑은 아내 성부가 백부자와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잘못 알았다. 그렇게 의심하게 되니 칼날은 백부자에게서 성부로 옮겨졌다. 그러나 리랑은 차마 성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간다'란 말을 남기고 리랑은 훌쩍 성부 곁을 떠난 것이다.

뒤에 남은 성부는 사라진 리랑을 부르며 산속을 헤매다 결국 자결하고 만다. 아리랑의 전설은 예외 없이 모두 슬픈 것뿐이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애절한 恨의 무게를 재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재어 볼 수도, 만져 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 이야기로 엮어내고, 노래로 삭히면서 사람들이 토해내는 핏덩이! 그것이 전설에 얽힌 아리랑이다.


2. 북한의 아리랑 전설 - 리랑과 성부  


리조 중엽, 어느 한 마을에 김좌수라고 하는 지주네 집에서 리랑이라고 하는 총각과 성부라고 하는 처녀가 머슴을 살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 마을에는 전례가 없었던 혹심한 가물로 하여 흉년이 들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가을부터 식량난으로 아우성들이였다. 그렇지만 지주놈은 이에 아랑곳없이 기어이 소작을 바치라고 하면서 농민들과 소작인들을 못 살게 굴었다.

지주의 마름놈이 이 마을, 저 마을로 동분서주하였지만 빈 손으로 돌아 오군 하였다.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지주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집집마다 다니며 고간을 뒤졌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없게 되자 지주는 매농가들에서 얼마 안되는 종곡마저 모조리 빼앗아 냈다.

마을농민들은 종곡이 있어야 래년에도 농사를 지을수 있으니 제발 그것만은 돌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였으나 악착한 지주는 기어이 농민들에게서 종곡을 빼앗아 가고야 말았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는데 리랑과 성부도 이 폭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워낙 교활하기 그지 없는 지주는 머슴의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빠져 나와 고을 관청에 찾아 가 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주의 고발을 듣고 난 원은 폭동을 진압할데 대한 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폭동을 일으킨 마을농민들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였고 온 마을은 농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바로 이 류혈적인 참변에서 리랑과 성부는 다행하게도 관군의 추격에서 몸을 피하여 수락산이라고 하는 산속에 들어 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후 봉건관료배들과 지주의 착취를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이 고을의 여러곳에서 일어 났다. 리랑은 폭동군의 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마을사람들의 원쑤를 갚아 줄 결심을 품고 싸움터를 향해 고개를 넘어 갔는데 그때 성부가 사랑하는 남편과의 리별이 서글퍼서 즉흥적으로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아리랑>(我離郞)이란 어원은 문자 그대로 사랑하는 나의 랑군(님)과 헤여진다는 뜻에서 유래된 곡명이라고도 하며 성부의 남편인 리랑의 이름에서 유래되였다는 설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