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한 사발>
오전 강의를 마치고 지친 심신을 달래느라고 <더풋샵>에 가서 마사지를 받고 교대로 돌아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지역번호가 대구라 별 생각 없이 받았다. 그런데,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내용은 나를 긴장하게 하는 것이었다.
“저는 대구지방 검찰청 수사관인 하진원이라고 합니다. 수사상 협조를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혹시 강철수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예전에 고등학교 친구가 수사관을 사칭하여 나를 놀린 적이 있어서 나는 혹시 대구의 친구가--그럴 나이도 아니지만--장난을 치는가 하는 생각과, 또 몇 년 전에 전화번호를 줬던 술집 여자가 살해된 끔찍한 사건으로 실제로 형사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나는 그 사건이 소설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내용을 다룬 소설이 있었다--다시 말해 살인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오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살짝 긴장을 하는 면이 동시에 있었다. 큰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법을 어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걸고 들자면 걸릴 만한 것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강철수라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화 받을 당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말투는 대구 말씨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는 것 같고, 말의 톤에 높낮이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를 청각이 둔한 나로서는 더 이상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힘이 든다.
“잘 모르겠는데요.”
“안산에 살고 나이는 사십이 세인데.”
“그런데, 뭣 때문에 그러시는 데요?”
“강철수를 주범으로 한 일당 여섯 명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된 차명 계좌를. . . .”
이때쯤 난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뭔가 진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며칠 전 확인한 통장 잔고가 많이 준 것이 내 정보가 새어나가 나도 모르게 빠져 나갔기 때문인가--하고 생각했던 것인가? 강의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잤는데, 마사지를 해준 중국 남자도 마사지를 건성으로 한다는 느낌을 주어서 마사지를 받고 나서도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은 듯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정신이 버쩍 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아마도 사태를 정확히 판단하자는 그런 것이었으리라--이번에는 내가 공격적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잠시 만요. 지금 전화 하시는 곳이 어디라고요?”
“대구 지방 검찰청입니다.”
“그리고, 전화하는 분의 성함은요?”
“하진원 수사관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 . .”
“야, 이 개시팔놈아, 중간에 말 자꾸 끊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으라니깐. 당신 생년월일이 육십 육년. . . .”
갑자기 전화기 저쪽에서 거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전화 상대자는 욕설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어이 없이 욕을 먹은 나는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조용히 휴대폰의 통화종료를 터치했다. 물론 내가 대화를 세부적인 데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좀 더 긴 대화가 오고 간 느낌인데, 지금 기억이 미치는 한에서는 이런 정도이다. 공권력을 사칭한 사기. 요즈음 세대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독재 권력 아래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나와 같은 40대 이상의 세대들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 혹은 부당하게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잘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공권력과 트러블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혹은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물론 요즈음 같은 세상에 수사관이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가지를 내걸지 않고는 하기 힘든 일임에도 나의 불안감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만의 하나라도 내 돈이 새어나가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보이스 피싱 사기꾼에게 나의 개인정보가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대구에 있는 경찰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았으나 바쁜지 받지 않았다.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 했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기꾼은 신용카드도 통장도 없는 내 친구--이 친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에게 신용카드 도난을 이야기하고, 통장 이야기를 자꾸 했다고 한다.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내가 그의 정체를 캐물은 것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로 정곡을 찌른 처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가장 불안해하는 부분--자신의 가짜 정체성--을 괜히 자극해 결국 욕까지 먹게 되었다는 것은 현명치 못한 처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욕을 하는 그에게, 나도 “야, 이, 개시팔놈아! 너 같은 놈 때문에 대한민국이 발전이 안 된다”고 맞받아쳤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이렇게 글로라도 욕을 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풀리는가?).
그래도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이 글을 쓰면서, 전화가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한 번 해보았다. 053840****.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성이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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