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팝송 두 편
--Johnny Horton의 "All for the Love of a Girl"과 Harry Nilsson의 "Without You"
어느 책에선가--Richard Altic이 쓴 [Victorian People and Ideas]라는 책이었던 것 같은데,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내 기억 속의 구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처음으로 기차(증기기관차)를 탄 귀부인--빅토리아 여왕 본인이었을 수도 있다--이 기차에서 내리면서 “너무 빨라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물론 이 말에는 나의 변형과 과장이 들어있다--라는 말을 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이때가 1840년대 혹은 50년대였고, 이 당시 증기기관차의 속도는 내 기억이 맞다면 빨라야 시속 30킬로미터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타고 빨리 달린다면 시속 30킬로미터는 충분히 낼 수 있다고 볼 때 역사 이래 인간의 육상 이동 속도는 여인의 과장과는 달리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KTX의 최고 속도가 300킬로미터를 상회하니까, 백육칠십 년 사이에 인간의 육상 이동 속도는 열 배 이상 빨라진 셈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첨예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컴퓨터이다.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등장한 컴퓨터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거의 전면적이라고 할 정도로--다시 말해 컴퓨터와 뗄 수 없는 것으로--바꾸어 놓았고--단적인 예로 나는 예전처럼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 새롭게 등장한, 그리고 빛의 속도로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컴퓨터에 적응하지 못해 좌절감(OTL)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음악 역시도 이런 변화의 물결 가운데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라서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들었던 팝송, 그 중에서 대부분의 올드 팝은 현재의 노래들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굼벵이나 달팽이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Patti Page--아 오랜만에 불러보는 정겨운 이름이다--의 1953년도 곡인 Changing Partners와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듯한 Tung Twista--나중에 Twista로 바꾼 듯. 이름부터 Tongue Twister라는 기존의 표기법이 아니라 발음에 충실한 자기식의 표기법을 취하고 있다--의 1992년도 랩 곡--이 노래도 나온 지 상당히 오래 되었구나--Runnin' Off at da Mouth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Changing Partners가 최대한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걷는 산보라면 Runnin' Off at da Mouth는 카 레이서의 전력질주를 떠올리게 한다--명세기 영문과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고 하지만 그의 노랫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전력질주에 들어가기 전 워밍업 하는 부분은 그런 대로 들리고, 다시 한 번 들어보니까 tung twista를 비롯하여 간간이 몇 마디 말이 들리긴 한다.
글을 쓰다 보니까 이 글은 애초의 취지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와 버린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이 21세기에 제목에 맞춰 글을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아직 버리지 못하는 구닥다리(?)가 있을까? 그렇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목은 애초에 이 글을 촉발시킨 촉매였으니까 또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또래의 많은 학생들이 그러했듯 나는 팝송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가요에서 출발했으나 더 넓고 새로운 세계인 팝송--미국 대중문화의 표본 중의 하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그 당시 학생들의 공통적인 의견은--설득력이 있는지는 차치하고--가요는 들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팝송을 처음 들을 때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가서 녹음을 하곤 했는데--백판으로 테입에다 녹음을 해주고 돈을 받는 이것은 저작권에 위배되는 불법이었으나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당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가 바로 Johnny Horton의 All for the Love of a Girl(1959)이었다.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라고 해석된--정확한 해석은 “(모두가) 한 여자를 사랑해서” 정도가 아닐까--이 노래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지금은 그 연유를 정확하게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곡의 시작과 끝 부분에 나오는 여자 코러스의 환상적인 목소리, 아니면 자니 허튼의 별로 꾸밈없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 한 구석에 이 노래의 가사처럼--물론 노래 책에 번역된 것을 읽은 것이었겠지만--한 여인을 사랑하고 또 버림받은 그 아픔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까? 지금 들어도 이 노래는 여전히 좋기는 하지만 참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Mariah Carey의 노래(1994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Harry Nilsson의 Without You는 자니 허튼의 All for the Love of a Girl보다 12년 후에 나온 노래인데, 이 노래를 나는 두 번째로 좋아했다--혹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세월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가수가 해리 닐슨이 아니라 Badfinger라는 영국 그룹이었다는 것이다. 이 그룹이 이 좋은 노래를 히트시키지 못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으나, 해리 닐슨 특유의 목소리--다소 여성적이면서도 애잔한--가 자아내는 아우라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아니면 우리의 뇌리를 때리는 피아노 소리가 배드핑거의 노래에는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어쨌거나, 나는 이 노래와 해리 닐슨을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노래 또한 이별과 상실의 노래이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 그렇지 않은 노래가 별로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 두 노래는 내 청소년기의 한 장으로 내 가슴을 차지했었고, 이제는 회상의 형식으로 나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애초에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건 친구 종찬이와의 전화통화에서 알게 된 엇갈린 기억이었는데, 글은 언제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니. 얼마 전 이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내가 “내가 제일 좋아한 노래는 All for the Love of a Girl이었고, 그 다음으로 좋아한 노래는 Without You였지. 그런데, 너는 Without You를 제일 좋아했고,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그 다음으로 좋아했지”라고 하자, 종찬이는 “그래? 난 내가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제일 좋아했고, 그 다음으로 Without You를 좋아했는데, 니는 Without You를 제일 좋아했고,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그 다음으로 좋아한 걸로 기억하는데.”
나에 대한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친구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우리 두 사람은 모두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제일 좋아했고, 그 다음으로 Without You를 좋아했는데, 상대방에 대해서는 서로 틀리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또 그것에 나름대로 연유가 없지 않겠으나--누구의 기억이 맞고 틀리고가 지금에 와서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변화와 속도의 경쟁, 그리고 거기에 뒤지지 않으려고 거품을 물고 헐떡이는 우리의 삶에도 제자리에 머물러 우리를 위안해 주는 것들, 항상 그렇게 앞으로 뛰어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이 좋은 음악들--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무차별적으로 들어온 외래의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이 이 삶을 그래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이 글을 쓰면서 이 두 노래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들었다.
(덧붙임 : 며칠 전[150208] “서프라이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를 소재로 해서 그 창작 과정과 이 곡이 어떻게 해서 해리 닐슨에게까지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제2의 비틀즈를 표방했던 배드핑거가 비틀즈의 해산과 함께 팬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명곡이 제대로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때문에 이 곡을 공동으로 작사*작곡했던 그룹의 두 멤버(Pete Ham과 Tom Evans)가 자살하기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이고 또 어느 정도가 지나친 과장인지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그룹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곡이 실린 앨범을 발매할 당시 이 노래를 따로 ‘싱글’로 발표하지 않은 것만 놓고 볼 때에도 이 노래에 배드핑거가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으리라는 점 정도는 분명하다(또 하나 분명한 점은 프로그램에서 팬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는 과장과는 달리 이 앨범에서 싱글로 발표되었던 "No Matter What"은 이 그룹의 노래 중에는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0위권 안에 진입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따라서 이 노래가 이후 180명이 넘는 가수들이 리바이벌할 정도의 명곡이 된 데에는 이 노래를 살려내서 빅히트를 시킨 해리 닐슨의 역할이 상당히 크다고 봐야할 것이다.
원곡이 히트를 하지 못하고 다른 가수에 의해 그 노래가 히트를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겠으나, 이 노래처럼 팝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 중의 하나가 처음 발표 당시에는 그렇게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다가 오히려 해리 닐슨의 후광을 입고서야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이 글을 쓸 때에도 이 문제를 약간 언급하긴 했지만 여기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좀 더 자세하게 개진해보려 한다. 워낙 해리 닐슨의 버전--그의 창법이나 그 밖의 연주들--에 익숙해져 있고 또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에 약간 거리를 두면서 공정하게 이 두 버전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분석을 해본다면 배드핑거의 경우 메인보컬인 피트 햄의 목소리는 흡인력이 있는 반면에 코러스 부분(다른 멤버들이 부른)이 단조롭게 구성된 것은 아닌가, 또 중간의 간주 부분이 곡 전체를 약간 늘어지고 지루한 느낌을 주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한다. 반면에 해리 닐슨은 이 원래의 코러스(닐슨의 경우에는 이 부분도 본인이 직접 부르기 때문에 후렴구라는 말이 적절하겠지만) 부분을 낮게 시작해서 고음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으로 구성하여 그 안에 뭔가 드라마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곡의 제작자인 Richard Perry는 “이 노래는 당시로서는 색다른 방식을 취했다. 무거운 백비트를 담은 웅장한 발라드(a big ballad with a heavy backbeat)인데, 이후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노래를 이 곡처럼 발표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위키피디아 참조)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자면 이 노래의 가사 도입부가 약간 바뀌었다는 점이다. 원곡의 "Well, I can't forget this evening / And your face when you were leaving"을 "No, I can't forget this evening / Or your face as you were leaving"으로 변화를 주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곡을 리메이크한 해리 닐슨의 아이디어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Well"보다는 단호한 어조의 "No"가 이 곡 전체의 이별의 정조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특히 "face"에서 "when"으로 넘어갈 때에는 좀 급작스럽고 단절감을 주는데 반해 "face as"에서는 s음과 z음이 묘하게 어울어지면서 마력을 발휘하는 느낌을 준다.
이 명곡을 만든 원작자들이 이 노래를 히트시키지 못하고 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지만, 이들 덕택에, 그리고 이 노래를 멋지게 소화해내 사람들에게 어필해 낸 해리 닐슨 덕택에 우리는 잠시의 위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