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인식--영재에게
(지난 신입생 환영회 때(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영재와 예전에 [안암 극장]이 있던 건물 앞에서 꽤 긴 시간 인생과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두 사람 다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거기다 술까지 취한 관계로 뚜렷한 핵심이 없는 한담으로 흘렀지만, 내가 인식의 확실성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한데 반해, 영재는 “타인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생각하라(이 말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식의 확실성이 가능함을 주장했던 듯한데, 그때 나는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을 구체화하지 못했고, 영재는 그 의문을 나중에라도 체계화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다음 글은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을 구체화하고 또 나름대로의 대답도 찾아본 것이다.)
[덧붙임 - 위에 인용한 칸트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 중의 하나인데, 좀 더 정확하게 옮겨 보면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이다. 당시 대화를 나누었던 후배나 나나,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인식의 불확실성을 표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칸트가 내세운 이러한 정언 명령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지금 하고 있는 [프로이트 리딩] 수업에서 읽은 글 중의 하나인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에서 프로이트가 칸트의 이 정언 명령을 “칸트의 정언 명령은 따라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직속 후예이다(Kant's Categorical Imperative is thus the direct heir of the Oedipus complex 167 전집 19)”라고 하면서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지식이 부족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칸트가 세운 보편적 도덕 원리에 대해 프로이트는 ‘순수 이성에 따른 (도덕 법칙만에 의한) 동기부여라는 바로 그 생각이 근본적인 자기 기만’(For Freud, the very idea of motivation by pure reason (by the moral law alone) is the fundamental self-deception. Beatrice Longueness "Kant's 'I' in "I ought to and Freud's Superego" 3)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칸트의 정언 명령은 자아에 대해 ‘가혹하고, 잔인하며, 달랠 수 없는’(167) 어떤 것으로 작동하는 초자아의 영향력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칸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 정신의 형성 과정에 대해 프로이트가 조명해 보려고 한 데에서 발생한다고 하겠다.1]
나이를 먹고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나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다(‘있었다’라고 쓰는 것은 이제는 그 혼돈에서 조금은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대략 요약하자면 ‘어떻게 인식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되리라. 이 말을 좀 더 풀어보자면, 대상(존재)과 인식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혹은 유물론이나 관념론이 각각 안고 있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모델로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고대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하늘의 천체들이 여러 단계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으며, 지구에서 먼 별일 수록 신성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 등의 천체를 신이라고 생각해서, ‘태양이 그리스 크기 정도의 붉고 뜨거운 돌이고, 달은 지구와 같은 혹성’이라고 주장한 아낙사고라스를 신성모독죄로 처형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알고 우주론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우주 모델은 ‘빅뱅 이론’이다.2 잘 알고 있겠지만 이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약 이백억 년 전 쯤에 초고밀도의 물질이 대폭발을 일으킨 뒤 지금껏 팽창을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나를 계속 괴롭혀 왔던 의문은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가졌던 우주관이 현대에 와서 그릇된 것으로 밝혀졌듯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주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릇된 것으로 밝혀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회의주의였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생각에는 관찰 행위 자체가 대상(존재)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객관적인 혹은 절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이론’도 한 몫을 하고 있다.3 즉 대상의 인식 행위에 있어서, 인식 행위자가 갖는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한 번 이야기해 보자. 고대 그리스 혹은 삼천 년 전의 우주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우리는 당시의 우주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우주관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우주관을 가질 만한 기술의 축적도 도구도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고 있었고, 그 중 어떤 것이 주류적인 위치를 획득하여, 그와 배치되는 사고들을 배격하거나 심지어는 학대하기까지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였고, 지동설은 그 뒤로도 상당한 진통을 겪은 다음에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에 따른 나의 생각의 극단에는 우주가 각 시대별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엉뚱한 것이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는 큰 모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없었다. 다시 말해 대상이 인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고, 오로지 인식만이 중요성을 띤다고 말하는 것도 모순인데, 이 둘 사이에서 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우주가 우리의 인식과는 별개로 어떠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유물론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인지한다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으며(이 말을 다르게 이야기해 본다면,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존재한다거나, 어떻다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예를 들어볼 수 있으리라. 들판에 나무가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들판에 사는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고 한다면(즉, 어떤 수단으로든 지각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들판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나무가 존재한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 나무의 존재의 타당성은 다만 우리의 가정, 즉 들판 밖에 있는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주의 모습이 그들이 그리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고, 그들이 틀렸으며, 우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며, 그것은 다소간 유물론적인 입장을 띠는 그런 것이다), 반면에 관념론적인 입장이 갖는 난점은 인식 과정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정신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다시 나무를 예를 들자면, 들판에 나무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의식 혹은 인식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오류가 아닐까).4
풀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뒤엉킨 실타래 같은 난제라고 생각했던 나의 문제는 사실은 존재 차원과 의미의 차원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온 오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박이문의 말을 인용하자면 ‘사물이나 현상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고 간에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것들을 “의미”하는 언어[와]는 두 가지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49).’ 그러니까, 사물이나 현상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으며, 그것이 (언어를 매개로) 인식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나는 ‘대상과 인식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그 의문의 답은 대상(존재)과 인식이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명백히 인지할 때 나온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불가지론이나, 회의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대상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다음에 나온 인식은 정확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본다. 자연적인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인식을 가지기가 지난하지만, 우리가 창조한 세계, 이를테면 수학이나 바둑의 경우에는 아무리 여러 각도로 생각을 뒤집어 본다 해도 답이 하나로 정해진 그런 경우가 있다. 1+1=2일 수도, 1+1=10일 수도 있다. 앞의 것은 십진법에 따른 계산법이고, 뒤의 것은 이진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결과가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십진법이라는 약속에 따르면 1+1은 언제나 2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지구의 형태가 적도부분이 좀 불룩한 구체라거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도 앞으로 바뀌어 질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한 인식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것이며, 그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있어서 그 인식에 오류가 없다면, 그 인식은 유보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제대로 정리가 되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내 생각을 일단 한 번 적어보았다.5 철학을 좀 더 공부해 나가는 가운데, 내가 화두로 삼았던 이 문제를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이창재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칸트의 도덕적 정언명령은 정신의 고양을 위한 실천 이성의 성숙한 합리성 기호가 아니다. 이것은 초자아에 의해 처벌받을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초자아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유아적 자아'의 방어적 합리화 기호로 재해석된다.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참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창재 [정신분석과 철학] 291 [본문으로]
- 빅뱅 이론을 다룬 책으로는 가모브의 [우주의 창조](현대), 조지 스무트*키이 데이비슨의 [우주의 역사](까치) 등이 있다. [본문으로]
- 이러한 현상은 특히 소립자의 세계에서 두드러지는데, 불확정성의 이론을 다룬 재미있는 책으로는 도모나가 신이찌로의 [양자역학적 세계상](권용래 역, 현대)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소설가인 성석제는 불확정성의 이론을 일반인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아주 재치 있는 예를 들어주었다. 냄비 속에 끓고 있는 물의 온도를 재려고 냄비에 온도계를 집어넣으면 온도계의 온도가 물의 온도를 변화시키는 까닭에 결국 물의 온도를 정확히 잴 수가 없다.(‘20세기의 겨울에서 21세기의 봄 사이,’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본문으로]
-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신은 물질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는 유물론과 그 반대로 ‘물질은 정신이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유심론은 근본적으로 모순된 진술이다. 왜냐하면 정신과 물질은 완전히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그 어느 하나도 딴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물론이나 유심론에는 다 같이 어디가 잘못이 있음을 즉시 알 수 있다. . . . 유물론은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를 갖고 있음에 착안함으로써 모든 현상은 그러한 인과관계로 환원된다는 주장을 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유물론은 처음부터 물질적 관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유심론은 모든 현상이 의식된 상태, 즉 의미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을 택함으로써 처음부터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다 같이 그것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기보다는 각기 자기대로의 입장에 처음부터 참여, 즉 코미트 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119--120) 더 나아가 유심론, 혹은 관념론을 주장한 버클리의 입장을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요약*비판하고 있다. 버어클리의 주장을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의식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의식된 것은 필연적으로 비물질적, 즉 정신적인 것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즉 관념적인 것이라고 따져 나갔다. (50) 버어클리는 “지각되지 않는 것은 지각되지 않았다”, 또 거꾸로 말해서 “지각된 모든 것은 반드시 지각된 것”이라는 아주 자명한 사실에서 “지각되지 않는 존재는 없다” 혹은 “모든 존재는 지각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 달리 말해서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내게 지각되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된다”라는 자명한 사실에서 “그러므로 내게 지각되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의미차원과 존재차원, 인식과 대상을 혼돈함으로써 생긴 논리이다. 내가 존재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전자를 하나의 전제로 할 때 그것으로부터 후자의 결론이 연역될 수 없는 것이다. (68) [본문으로]
- 박이문은 철학을 지도에 비유하고 있는 라일 Ryle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내 생각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옮겨 본다. 라일 Ryle을 따라 우리는 철학을 지도에 비유할 수 있다. 지도는 지면에 그린 일종의 도식이지만 그러한 도식은 건축설계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집을 상상하면서 그리는 여러 가지 모양의 설계도와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다. 철학의 목적은 지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는 구체적인 현실이란 대상을 갖고 있고 그 대상을 나타내려고 한다. 따라서 아무리 묘하고 깔끔한 지도라 해도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지도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17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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