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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인식론 - 황설중 (민음인 2009) [2011년] [1608 재독]

by 길철현 2016. 8. 9.


*황설중, 인식론, 민음인(110722)


(1432)

(들어가기 전에)

나는 내가 늦깎이 대학원생인 것이 부끄러운가? 아니다. 나는 떳떳하게 말할 것이다. 박사과정 중에 있다고. OK.

이 말은 많은 것을 포함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내가 지속해 나갈 것을.

그것은 많은 부분에서 어머니의 경제력에 도움을 얻고 있다.

 

(감상)

들뢰즈와 가따리의 [앙띠 오이디푸스]가 너무 어려워, 좀 쉬어가는 셈으로 집어든 책인데, 서양 철학의 인식론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요즘 들어 아니면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생각해 온 것은 인간이 언어를 써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는데, 그 출발점은 아무래도 박이문의 [존재와 인식],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적은 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이문이 세상을 존재와 인식의 차원으로 논의하는 방식에서 나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다고 할 수 있고, 그 생각은 우리의 언어 세계와 실제 세계, 혹은 외부 세계(사실 이 구분 자체도 혼란스럽긴 하지만)의 거리를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인식론은 회의주의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피론주의자인 회의적 논변 형식이 갖는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회의주의의 반대편에서는 소박 실재론, 대표 실재론, 관념론 등의 학설이 있었으나, 회의주의의 강력한 힘을 벗어날 수는 없었고, 이 회의주의는 흄에 이르러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홉스와 로크, , 이 세 명의 영국 철학자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의 부족.)

하지만 칸트는 이 회의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혁명적인 발상을 했다.

 

인식론에서의 문제의 관건은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주관의 능력이 대상의 인식을 선험적으로 조건지우는 형식에 있다고 칸트는 제안한다. 대상으로부터 우리 주관의 인식 능력으로 탐구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 바로 인식론에서 칸트가 감행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99)

 

하지만,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하는 칸트의 비판 철학은 흄의 경험적 회의주의에 대한 적절한 응답일 수는 있어도 철학적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어 만족할 만한 이론으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회의주의와 목표를 공유하는 협력자로서 만난다."(110) 그런 점에서 칸트의 비판 철학 또한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회의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공고한 답변은 헤겔에서 어느 정도 찾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 글의 내용을 정리하는 쪽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다.)

 

헤겔의 혁명적인 발상은 우리가 우리의 사유를 이용해서 개념을 도출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거꾸로 우리의 사유가 개념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하는 전환에서 정점에 이른다. 언뜻 우리가 개념을 이용하여 사유를 진행시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들의 질서가 우리의 사유를 이미 향상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22)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헤겔의 사변철학은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헤겔 철학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좀 제대로 정리가 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본질과 현상이 이전의 형식 논리학의 생각처럼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의 인식론이 결국 회의주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까닭은 본질과 현상이 맺고 있는 [이런] 필연적인 연관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현상의 근저에 있는, 그리고 현상과는 구별되는 무엇으로서 본질을 찾았기 때문이다. (129)

 

헤겔의 이러한 설명과 (이 얇은 책의 몇 마디 말로 논의의 핵심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으나) 내 생각에서 외부 세계와 언어를 구별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도 지성주의의 한계에 빠져 있는 것인지, 좀 더 공부를 함으로써 알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아펠의 선험화용론, 로티의 신실용주의, 가다머의 해석학이 보여주는 열린 순환론 등은 회의주의의 한계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현대적 방법을 제시하고, 그와 동시에 문제점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회의주의는 필요하면서도 넘어서야 할 그 무엇으로 이 책은 정리를 하고 있는 듯하다.

철학에 대한 공부가 너무나도 부족함을 느낀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부지런히. 이 생각은 좋다.

내 머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도 잘 가늠하면서 한 권 한 권 읽어나가야 한다. 책읽기가 좀 수월해 졌으면 좋겠다. 영어 능력도 는다면. (1519)

(끊임없이 밀려드는 부족함. 부끄러움. 그 속에서 살아간다.)



[재독]


[이 책은 2011년도에 교내 서점에서 구입을 한 뒤, 하루만에 거의 다 읽었던 듯하다. 쉽고 간결하게 인식의 가능성의 문제를 규명해보려 한 책인데, 재독하면서 중요한 내용은 옮겨 본다.]


1.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14) 상식적 실재론, 소박 실재론 - 물리적 대상이 우리 밖에 실재하고 있어서 우리가 오감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됨.

(15) 피론주의자 (회의주의자) - 피론, 아에네시데모스

      - 감각의 신뢰성을 문제 삼음

(19) 물리적 대상의 속성들이 우리의 매개나 가공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순수하게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은 없음

(--) 아에네시데모스 -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 물리적 대상이 다른 물리적 대상과 관계할 뿐 아니라 결국 그것들을 감각하고 판단하는 주체(사람)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그것을 감각하는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지각될 수 없음.

(20) 회의적 논변들은 물리적 대상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는가?"의 현상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정말 어떤 것인가"의 실재에 관해서는 무엇이라 주장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 줌.


2.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없을까?


(33)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사악한 과학자나 악마가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이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내가 시종일관 속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한 나는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악마가 아무리 나를 기만하고 조롱하고 나를 갖고 어떤 짓을 하든 간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만은 그들이 아무리 사악하고 전능하다 하더라도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즉 나의 존재를 무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속이는 자가 속일 수 있는 대상을 상실한 셈이다. 이제 인식론적 방황은 끝난 것 같다.


(34) 니체의 반박

(만일 '생각한다'는 술어가 있다면 생각하고 있는 '나'(주어)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관례적이다. 활동이 있을 경우 그 활동을 행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철학적 가정이다. 사실상 데카르트에게서도 가장 확실한 것은 의심하고 있다는 사고 행위였을 뿐이다.)

(35) 그런데 이런 가정은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될 수 있을까? 사고 활동(술어)은 반드시 사고하는 자(주어)와 결부되어야 하는가? 20세기 철학의 혁명가이자 반데카르트주의자였던 니체에 의하면 모든 사고 활동은 사고하는 자를 필요로 한다고 우리가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언어 문법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도록 구조화된 탓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눈이 온다.(It snows.)"고 할 때, 'It'은 아무런 대상의 존재도 지칭하고 있지 않지만 문법상 주어의 역할을 한다. 사고 행위가 존재한다고 할 때, 생각하는 '나'는 전혀 의미가 없음에도 문법상 필요한 가주어의 역할에 그치는 것일지 모른다. 사고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해서 이로부터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듣거나 보거나 느끼거나 또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욕구하거나 의지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하고 선명하며 생생한 지각들을 갖게 된다. 이런 인상들은 매우 원초적이고 직접적이며 개별적이고 순간적인 지각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고 하는 자아의 인상은 갖고 있지 못하다. 자아란 개념이 성립하려면 자아는 지속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숙취에서 깨어난 사람이 간밤에 취했을 때의 자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통합적인 자아의 개념은 형성되지 않는다.(분열된 자아는 사이코의 징후이다.) 자아의 개념을 갖기 위해서는 지속적이며 동일한 인상이 있어야 하지만 인상이란 본질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 해도 우리는 '자아'와는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라고 한ㄴ 자아 개념은 허구가 아닐까?"하는 의심은 여전히 효력을 유지하는 셈이다.


3. 어떻게 우리는 외부 세계를 인식할까?   

(40) 로크 - 대표 실재론 (representative realism)

물리적 대상은 우리 마음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관념들을 통해서 물리적 대상과 간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 바깥의 물리적 대상과 우리 마음 사이에 (물리적 대상을 대표하는) 관념을 설정함으로써 상식적 실재론의 난점을 보완.


(42) 제일 성질 (primary quality) : 어떤 물리적 대상이 지각되는 조건들에 상관없이 또 지각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 때에도 그 대상이 자체 내에 갖고 있는 성질. (크기, 모양, 질량, 운동)

      제이 성질( secondary quality) : 대상 자체가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성질이 아니라 단지 지각하는 어떤 사람에게 감각을 일으키는 힘으로서 대상이 소유하고 있는 성질. (색깔, 냄새, 맛)


(43) 단순 관념 - 복합 관념

(44) 감각을 통하여 얻어진 단순 관념을 결합하여 복합 관념을 만들어 내는 우리 마음의 능력이 지성(understanding).

(44) 로크 - "지식이란 우리가 가진 관념들의 연결과 일치 또는 불일치와 대립에 관한 지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된다. 지식은 오로지 이것에 의해 구성된다."

(46) [로크에 따르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필연성의 지위를 갖지 못하며 확률적 지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

(48) 물리적 대상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접촉하는 것은 물리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일 뿐임을 대표 실재론은 역설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우리 외부의 물리적 대상이 관념을 야기하며 양자는 유사하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자기의 입장을 스스로 위반하고 만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자신의 경험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과 동떨어진) 있는 그대로의 대상 자체에 대한 접근의 길을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50)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그는 우리가 지각하거나 경험할 수 없었음에도 인정해야 했던 외부의 물리적 대상을 제거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존재하는 것이란 마음과 마음속의 감각 경험(관념)들뿐이다.


(54) 유아론(solipsism)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의 마음이며, 다른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의해 창작된 것이라는 견해이다.

(세계 전체가 나의 관념들에 의해 창조된 것일지 모른다는 귀결.)


(57) [버클리의 객관적 관념론]

세계의 객관성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정신에 의해서 철학적으로 보증된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신의 힘의 표시이며, 감각에 나타나는 것은 신의 마음의 역사"이다. 


(58) 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입증한 철학적 논증은 없으며,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어떤 논증이든지 동일한 설득력을 갖는 강력한 반대 논증에 부딪침.


(59) 관념론의 문제점

정신은 관념을 지각하고, 관념은 정신에 의해 지각된다.

(60) 버클리의 슬로건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다시 지각되지 않는 정신을 논의의 자명한 제1의 전제로서 받아들인다. 그가 호소하고 있는 정신이란 지각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61) 대표 실재론이나 관념론이 자기모순을 범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지각 영역 너머에 있는 어떤 (물리적 혹은 정신적) 실체를 인정한 데 있었다.


(63) 흄의 회의론

원인과 결과 각각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만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우리가 획득할 수 없다. 어떤 사건이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는 인과 관계는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뒤를 이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66) 현존하지 않는 인상들로부터 현존하는 관념들이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추론적인 비약이 숨겨져 있고, 따라서 우리의 앎과 삶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 신념들은 꾸며 낸 허구이고 착오이며 거짓으로 규정될 수 밖에 없다.


(67) 우리는 우리 지각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의 지식도 가질 수 없는데, 누차 강조했듯이 그것의 존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 . 사물의 본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전형 알지 못하기 때문에 침묵을 지켜야 한다.


(69) 흄

"행동과 일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 전념하는 것이야말로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원리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전복자."

(70) 흄은 "자연적 본능의 강력한 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의심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는 점"을 철저하게 확신.


(71) 이론적으로 대답할 수 없으면서도 그냥 살아도 된다는 흄 식의 해결은 일종의 정신 분열증 증세를 잠정적으로 감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4. 왜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을까?


(75) 아그리파(Agrippa) - 다섯 가지의 회의적 논변형식들(tropen)

1) 철학적 의견이나 믿음들의 상이성의 논변형식

- 어떤 독단주의자가 자기가 내세운 주장이야 말로 유일한 진리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회의주의자는 얼마나 많은 상이한 철학적 의견이나 믿음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가를 제시할 수 있다.

2) 독단적인 전제 설정의 논변형식

증명을 결여한 기준을 참된 전제로서 인정할 경우 어떤 임의적인 기준도 동등한 권리를 갖고 참된 전제로서 등장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여기서의 물음의 관건이 그 기준 자체의 참과 거짓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단지 자명한 기본 전제의 설정에 놓여 있기 때문.

3) 무한 소급의 논변형식

[이 논변형식은] 철학자들이 논증의 최후의 지점을 제시할 수 없는 난점을 드러낸다. 최후의 지점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곧 논증에서 최초의 출발점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

4) 순환의 논변형식

사태에 대한 진정한 해명이라기보다는 증명과 증명 기준, 근거와 근거지어진 것 간의 지루한 교체를 의미할 뿐.  닭과 달걀.

5) 상대성의 논변형식

모든 것들이 이미 타자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대상을 독립적으로 분리해서 고찰하게 되면 독단적인 견해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83) 알베르트(Albert) - 현대의 비판적 합리론자.

인간은 항상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인식의 최후의 근거를 확보하기란 불가능. (귀납법과 연역법의 문제)


5. 우리는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까?


(93) 신앙주의 - 몽테뉴, 파스칼, 베일

아무리 위대한 정신일지라도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며, 진리는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95) 파스칼 - 도박사의 논증


(96)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인식론에서의 문제의 관건은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주관의 능력이 대상의 인식을 선험적으로 조건지우는 형식에 있음. 대상으로부터 우리 주관의 인식 능력으로 탐구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100) 칸트는 "세계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어떻게 세계에 관한 지식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의 전환이 인식론에서 선행되어야 한다고 [칸트는 봄].


(102) 다양한 인식 소재를 수용하는 우리 마음의 감각(칸트 - 직관) 능력이 감성. 감성은 그것을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최초의 인식 능력. . .. (103) 우리의 감성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인 직관 형식을 통해 그 자체로는 혼돈스러운 인식 내용에 최초의 질서를 부여.


(103) 대상이 그렇게 우리에게 인식되는 까닭은 대상이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주관의 현식들이 대상에 그런 성질을 부여하기 때문.

칸트 -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107) 칸트 - 비판철학 

독단주의는 감성적 세계와 초감성적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이 두 세계를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한 신뢰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성적 세계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회의주의는 감성적 세계와 초감성적 세계를 막론하고 이 두 세계를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과도한 불신이다. 우리는 비록 초감성적 세계는 알 수 없지만 감성적 세계와 관련해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 실재론과 유사.)


(108) (구성된) 현상과 (있는 그대로의) 물자체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회의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바. . . 칸트의 비판 철학에서 회의주의는 근본적으로 극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원리적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

(109)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하는 칸트의 비판 철학은 흄의 경험적 회의주의에 대한 적절한 응답일 수는 있어도 철학적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어 만족할 만한 이론으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회의주의와 목표를 공유하는 협력자로서 만난다.

(112) 헤겔 - 사변철학 [근대 철학의 완성자이며 현대 철학의 시조]

(116) '무한'과 '유한', '직접성'과 '매개', '근거'와 '근거지어진 것'등의 개념들을 하나의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한다면 회의주의는 원리적으로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헤겔의 착상은 회의주의를 적대시하지 않고, 또는 칸트처럼 (초험적 영역에서 주장을 맞세우는) 회의적 방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전면적으로 회의주의자의 사유 방식을 흡수하는 데에 있다.

(117) 서로 상이하거나 대립하는 개념들이 맺고 있는 관게를 파악하고 서로 반대되는 유한한 개념들을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계기들로 정립함으로써 개념들의 총체적이며 통일적인 연관 관계를 파악하는 사유를 헤겔은 (긍정적) '이성(Vernunft)' 혹은 '사변'으로 부르고 있다. 사변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드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필연적인 계기들로 이해하고 파악하기 때문에, 사변에게는 타자에 맞서는 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119) 사변을 통해 (자기 한계에 처하게 되는 지성적인) 개념들의 완전한 전체 체계를 파악하고 서술함으로써 어떤 대안적인 경쟁 개념도 등장할 수 없도록 원리적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것이 회의주의에 대한 헤겔의 핵심적인 대응.


(122) 헤겔의 혁명적인 발상은 우리가 우리의 사유를 이용해서 개념을 도출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거꾸로 우리의 사유가 개념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하는 전환에서 정점에 이른다. 언뜻 우리가 개념을 이용하여 사유를 진행시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들의 질서가 우리의 사유를 이미 항상 규정하고 있다는 것.


(123) 헤겔

우리는 "자연과 유한한 정신이 창조되기 이전에 영원한 본질 속에 깃들이 신에 대한 서술"을 할 뿐.


(126) 본질적인 세계는 다양한 현상 세계의 근거라는 지위를 갖는다. 본질 세계와 현상 세계가 이렇게 근거 관계에 있다는 것은 양자가 이미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근거지어진 것 속에 없는 것은 근거에도 없고, 근거에 없는 것은 근거지어진 것에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바로 그것을 현상으로 드러나게끔 한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상이 없다면 근거는 스스로를 드러낼 터전을 잃게 된다.

(전도의 관계) 내용적으로는 동일하면서도 형식적으로 대립하는 관계

(129) 헤겔이 생각하기에 자기 이전의 인식론이 결국 회의주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까닭은 본질과 현상이 맺고 있는 이런 필연적인 연관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현상의 근저에 있는, 그리고 현상과는 구별되는 무엇으로서의 본질을 찾았기 때문이다.

(130) 사변은 회의주의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주의를 통해 사변에 이른다. 사변은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회의주의"이다.

(131) 헤겔이 개념들의 운동에 주목함으로써 그리고 지성과 대비되는 사변을 제시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대한 원칙적인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6.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까?

(136) 아펠 (Karl - Otto Apel) - 선험화용론

- 칸트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 자체를 탐구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아펠은 아그리파의 논증 자체가 아니라 아그리파의 논증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을 탐구하고, 이 조건을 밝힘으로써 논변형식들을 물리치려 한다.

(137) 아그리파가 아무리 회의적인 논변형식을 제출했다 하더라도 이 논변형식이 사람들에 의해 의미 있게 의사소통되기 위해서 이미 항상 (암묵적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회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43) 전통적인 인식론이 자리 잡고 있는 의미론적인 차원과 (이 차원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드는) 신험적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선험적 차이(die tranzendentale Differenz)'를 간파하지 못하고 모든 논의를 의미론적 차원에서만 구명하려고 하는 가운데 아그리파의 논변형식들에서 빠져나오려 할수록 우리는 그 늪에 빠져들게 된다.


(147) 가다머 (Hans - Georg Gadamer) 해석학의 거장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항상 무엇인가를 암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150) 가다머는 사태 자체의 규정으로서의 선입견을 모든 이해의 근본 규정성으로 기술한다.


(158) 로티(Richard Rotty) 신 실용주의. Neopragmatism

(159) 로티에게 지금 여기에서 우리 삶에 가치 있는 과제는 '실재', '이성', '본성' 등의 개념들과 관련된 인식론이 아니다. 우리가 온통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미래로 대치할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과연 있는 그래도의 실재를 표상할까?"하는 인식론의 과제는 우리 삶에서 이해할 수도 없고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낡아 빠진 철학적 전문 용어이며, 지껄임을 위한 지컬임에 불과하다.

(162) 프래그머티스트에게 우리의 지식이란 밖에 존재하는 것을 복사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인간 유기체가 외부의 환경을 다루기 위한 도구이며 또한 인간 유기체와 우주 사이의 굉장히 복잡하고 인관적인 연관의 산물이다.


7. 다시 인식론으로?

(167) 진리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인식과 우리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일치할 경우 참된 지식(진리)로 봄

        진리정합설(coherent theory) 외부의 대상과의 일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 체계 내에서 일관성을 유지할 경우 그것을 진리로 간주.

       진리실용설(pragmatism) 실생활에서 그 지식이 쓸모가 있다면 그 지식을 진리로 여기는 것.


(169) "우리가 세계를 정말로 알 수 있는가?"하는 물음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시금석과 같은 역할을 함. 이 물음은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숙고를 통해 낱낱이 해명함으로써만 해결(혹은 해소)될 수 있고, 나아가 이런 경우에 있어서만 우리는 인식론적 지평을 폐기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다. 어쩌면 인식론이란 우리가 사나운 지식의 강을 건너오기 위해 의지했지만 건너온 후에는 버려야 할 사다리인지도 모른다.


(169) '인식에서 실천으로'의 전회는 사실상 인식론적 물음과의 고투를 통해서만 그 의의를 획득할 수 있다. [발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