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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들뢰즈 * 가따리 - [앙티 - 오이디푸스]. 최명관 역. 민음사

by 길철현 2016. 9. 20.

*쥘르 들뢰즈*펠릭스 가따리, [앙띠 오이디푸스], 최명관, 민음사(110811, 2241--2351)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Penguin)

 

몇 가지 기억들: 1)처음 이 책을 본 것은 신창동 수송 중학교 뒤편에 있는 시장 안의 헌 책방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 때 이 책을 살려다가 안 산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책이 물에 젖어 울었거나, 아니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 때가 97년 아니면 98년이었을 터인데, 상당히 이른 시기에 헌 책방에 나온 셈이다. 이 책을 산 것은 98년 신고서점에서이다. (기억은 없다.) [천 개의 고원]은 헌 책방에서 두어 번 본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만 해도 들뢰즈를 잘 몰랐거나, 그 책의 저자가 들뢰즈라는 것을 몰라서 사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도 나는 그것이 중요한 소설이라는 것을 몰라서 한 동안 사지 않았다. 제목에 연구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나는 논문이라고 생각을 했다.

2)1007년 여름, 석사 논문을 마치고 영광이 형이랑 내각리에서 술을 한 잔 하다가 분열분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영광이형이나 나나 분열분석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바는 없었는데, 영광이 형은 이 책이 정신분석에 반대하는 책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을 했던 듯하다. 나는 정신분석에 어떤 식으로 반대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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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형 선생님의 MSG에서 이 책을 두 번이나 세미나를 해서(한 달 가까운 시간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이 두 사람의 어조에 잔뜩 기가 죽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우선적으로 들었던가? 거기다, 번역자인 최명관은 이 두 사람의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번역을 한 까닭에(이 방대한 저서를 번역해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오역도 많고, 또 참고 읽어나가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에 더 주눅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1장은 영역본도 함께 읽었는데,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도 해낼 수 없다는 현실이 서글펐다. 읽는 것은 해낼 수 있겠지만,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사실. 나를 비하하는구나.) 그리고, 그 주된 공격 타겟이 정신분석이고, 오이디푸스 삼각 구도였다--나는 그 제목에 [안티]라는 말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신랄하게 정신분석을 공격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현재 일 주일에 한 번 정신분석적 상담을 받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상담의 무익함을 조목조목 파고드는 책이었다. 오이디푸스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것을, 정신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이게끔, 순종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는 그런 책이었다. 요즈음 상담에 대해서 자꾸만 회의가 드는 것, 지지부진하다는 것,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나의 생각을 흔든 것은, 20년 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을 읽은 이후로, 정신분석에 매료되어, 석사 논문마저도 정신분석학자인 마가릿 말러의 분리-개별화이론을 바탕으로 썼었는데, 그 모든 것을 들뢰즈와 가따리의 이 책은 뒤집어엎을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너무나도 자명하다는 듯이, 들뢰즈와 가따리는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양적인 것으로 추상화한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외에 있어서는 계속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 대신에 마르크스의 사회*경제 이론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주요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체로, 그럴 듯한 구절들은 공책에 옮겨 적으면서 부지런히 읽어나갔다. 그 와중에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을 읽고, 또 인터넷에서 박정수의 이 책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지만, 이해의 폭이 그렇게 넓어지지는 않았다.

책을 다 읽어갈 때쯤이야, 몇 가지 개념들, 연결적, 이접적, 연접적 종합, 기관 없는 신체, 몰적*분자적, 등록 등의 개념들이 어렴풋하게 다가오는 듯했고, 결국 이 두 사람도 자신들이 세운 체계에 따라 세상을 보고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왜 이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지를 따라갈 수 있을 듯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자신만만한 어조에 큰 회의를 갖게 된 부분은 아르또를 최고의 작가로 생각하고, 괴테를 비난하는 부분이었다. 이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작가들 중 카프카는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프루스트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로렌스는 공감이 가는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있는 듯하고, 헨리 밀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콘래드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헨리 밀러도 정신분석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구나.)

요 몇 년간, 아니 오래 전부터, 언어와 우리의 삶과의 연관성을 계속 생각해 보고 있는데, 현재의 결론은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와 삶은 불가분의 것이 되었고, 그래서 언어 밖의 삶, 혹은 세계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와 삶은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긴 한다. 인간이 없더라도 세상은 존재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생각은 모두 언어라는 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생각은 분명 언어 밖에 있는 세상을 반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이론으로 우리의 삶을 전제 군주적으로, 편집병적으로 옭아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욕망하는 생산--이 말도 참 어려운 말인데, 무슨 말인가--혹은 욕망하는 기계는 한쪽으로 비끌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분열증적으로 쪼개고 흘러가고 하는 삶을 강조하는 이들의 태도는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전복적이고 혁명적인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언어의 사용은 어떤 태도의 반영이 아닐 수 없으며, 언어가 그 근본적인 근거를 보장해 줄 것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나름의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내 머리가 닿는 한에 있어서, 이런 큰 이야기들보다도, 하나하나의 현실의 처리가 좀 더 부각되는 듯하다. 내 머리가 좁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말이라는 것은 언제나 폭이 좁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따져야 한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고통 속에서 허비된 듯하다. 아니, 그나마 제 궤도를 찾게 되어서 기뻐해야 할까?

-들뢰즈가 정신 분석을 기독교에 비유한 것도 생각해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