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임 - 불안(Anxiety)은 내가 개인적으로 거의 한계점까지 경험했던 것이고,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해서 프로이트, 라캉에서도 핵심적인 개념이다(라캉은 "불안은 정동이다"라고 말했던가?). 이 불안의 개념을 내 논문의 주제로 삼아 콘래드를 분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피상적인 생각도 한다. 프로이트의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이 글에서 프로이트는 불안이 방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전 신호라고 자신의 이론을 또 크게 바꾼다) 다시 한 번 정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규정. 한길사(150214)
키에르케고르의 이 책은 작년 12월 6일에 시작해서 170페이지 정도 읽다가 중단하고 말았다. (내용 이해가 어려웠고, 다른 책들을 읽어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현재 읽고 있는 라캉 [세미나 10 - 불안]을 이해하는데 이 책이 중요할 듯하여(처음에 이 책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만) 올해 1월 29일에 시작해서 2월 9일에 끝마쳤다. 키에르케고르의 글 쓰는 방식, 그의 철학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기독교적인 사고에 대한 반감과 그 오류 내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분(구체적으로 떠오르는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인간을 ‘영과 육,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규정하는 것, 그것은 인간을 ‘몸’이라는 일원론적 측면에서 보는 나의 세계관 - 그 근간에는 다윈적인 진화론, 그리고 라일의 [The Concept of Mind], Churchland의 [The Matter and Consciousness] 등에서의 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물론 상징계라는 것이 시대적인 에피스테메를 따라 전개되기 때문에 그 시대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면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등으로 글을 다 읽는 것이 우선 수월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규정의 해설에서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으려 했고, 더 나아가서는 홍준기의 글을 통해 키에르케고르의 글이 정신분석학적 맥락으로 어떻게 파악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아보려 했다.
(책을 읽고 난 뒤 곧바로 쓰지 않고 홍준기의 “라깡과 프로이트*키에르케고르”[라깡의 재탄생]를 2독(총4독)이나 더 한 것도 (잘 파악되지 않는) 키에르케고르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때문에 독후감이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다.)
배경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핵심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먼저 사상적으로 볼 때 키에르케고르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었으면서도, 당대의 관념철학자인 “셸링, 피히테”의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좀 더 조사를 해야할 듯), 그리고 당시 최고의 철학자였던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그의 “보편 정신” 개념에 강한 반발을 보이며 ‘단독자’로서의 인간의 ‘실존적’인 측면을 강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 중에서 그래도 가장 이해하기가 쉽고, 정통 기독교 교의학에 대한 비판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정통 교의학에서는 아담의 죄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찰하지 않고, 그 죄의 결과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아담에게는 죄의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순진한’ 상태이기 때문에(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미 선악 개념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금제의 명령을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키에르케로르에 의하면 불행히도 전통적 개념들은 아담의 죄가 아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인류에 대한 아담의 죄의 결과만을 다루고 있을 뿐 - 임규정 126).
그러면서 키에르는 이 아담의 최초의 죄를 독창적인 시각으로 규명하려고 한다.
“최초의 죄는 질적 규정을 이루고 있다. 최초의 죄가 바로 그 죄이다. 이것이 최초의 죄의 비밀이다.” (137)
이 인용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키에르가 사용하고 있는 “질적 규정”이라는 말을 잘 파악해야 할 듯하다.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질’은 하나의 현상 및 현상이라는 개념의 고유한 특징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의 이행은 오로지 ‘비약’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도 물론 질적 비약에 대해 말하지만, 그러나 헤겔은 양적 변화의 기초 위에서만 그렇게 말할 뿐이다. (임규정 136 주 16)
그러니까, 헤겔의 경우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양질 변화’(이것은 마르크스에게서 많이 이야기 되던 부분인데)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키에르는 질적인 변화를 일종의 단절(비약)로 보고 있다. 다시 앞부분을 보자면 ‘죄’라는 개념이 어떤 질적인 변화를 통해 들어오고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어떤 철학자는 이 “질적 규정”이라는 용어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거기다 키에르는 또 “아담의 죄와 후대의 모든 개인의 최초의 죄 사이에는 아무런 질적 차이도 없다고 주장”(임규정 138-39 주 17)함으로써 이 죄의 문제가 정통적인 신학에서 보듯 아담의 원죄의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를 곧바로 정신분석으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 아니면 좀 더 깊은 고찰을 해봐야 정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현재 내가 파악한, 혹은 홍준기의 말에 기대어서 이야기를 해본다면 --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정신분석적 맥락으로 가져온다면 이 ‘죄’라는 것은,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근친상간적 오이디푸스적 욕망, 혹은 인간 정신이 넘어가야 할 한 단계라고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은 너무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죄와 무, 불안은 또 어떤 식으로 연결시켜서 이해할 것인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이것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인간 정신이 미분화된 아기의 상태와 연결이 된다)는 ‘순진함’의 상태이다. 이 부분을 홍준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아담의 상태는 선악의 개념 너머에 존재하는 순진함의 상태이다. 여기에서의 순진함이 도덕적*인식론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담의 상태는 모든 구분과 차이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순진한 상태이다. 선악을 알지 못하므로 죄의식도 없으며, 성 구분을 알지 못하므로 수치심도, 성적 욕망도, 시기도, 질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는 평화와 평화와 안식이 있다.”(키에르159) 평화와 안식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싸움*질투*시기*미움 그리고 성적 욕망과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또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무이다. “그런데 무는 어떤 작용을 하는가? 무는 불안을 낳는다. 순진함은 동시에 불안이라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이 순진함의 심오한 비밀인 것이다. 꿈꾸면서 정신은 자기 자신의 현실성을 투영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성은 무이다. 그리고 순진함은 끊임없이 이런 무를 자신의 바깥에서 본다.”(키에르 159)
순진함의 상태는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차이’(홍 220)가 무가 되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해 이 ‘차이의 무화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불안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인간 정신이 -- 이 부분은 쉽사리 한쪽 방향으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불안이라는 개념을 정리해본다면 ‘보편적인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정서’(202)라는 견해를 따른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징계로 진입하면 결여 속에 존재하게 된다(하이데거 -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는 말이 되리라. (상징계 속에 거주하는 인간은 절대적 향유라는 낙원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존재(202).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의 불안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우리는 이 결여를 메우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거기에서 불안이 당연히 따라올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결여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거기에도 보편적 만족이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불안이 따른다). 라캉이 주장하는 “욕망의 주체”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후자에 방점을 두는 것이리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불안과 현기증을 느낀다. 현기증은 주체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며 도전이다.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고 살 것인가? 불안 때문에 이를 포기하는 것이 신경증으로의 도피이다.”(203))
(라깡에 따르면 불안의 본원적 모습은 사랑의 대상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주체가 가늠할 수 없는 타자의 욕망, 그리고 주체를 위협하는 전능한 타자의 향유 앞에서 느끼는 정서(Affekt)이다. . . 라깡은 대상 a를 향유로 해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안의 대상은 대상 a라고도 할 수 있다. 199)
다시 이 부분을 좀 더 정리하면 정신병적 불안(경악, 소타자에 함몰), 신경증적 불안(근친상간을 욕망하거나 거세 불안에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서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즉 결여된 주체(빗금친 S)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앞에서 막혔던 부분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인간 정신의 분화와 연결지어 생각한다면(아니면 자유와 연결지어 볼 수도 있다) 인간 정신은 (언어로 인해) 차이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고 파악이 안 된 부분들을 억지로 연결시키는 다소 폭력적인 작업이다.) 그것이 차이 없음의 상태(언어 이전의 상태?)와의 간극으로 인해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꿈꾸는 정신’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그러니까 차이 없음의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라캉적 용어로는 ‘결여의 결여’가 된다.) 이 불안 앞에서 인간은 (정신병적으로 혹은 신경증적으로 도피하지 않고) 이 불안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은 공감적 반감, 반감적 공감이다”(160)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안을 진실로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때문이다. (164)
홍준기는 어떻게 결론은 내리고 있는가? “불안은 자유의 인식근거이며 자유는 불안의 존재근거이다.”(224)
브레인스토밍 식의 글쓰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 생각을 한 것들의 집약이므로 이 시점에서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자. (키에르케고르와 홍준기, 그 다음 라캉의 글이 갖는 중요성은 아주 현실적인 것이기도 한데, 이 불안의 문제가 현재의 나에게는 아주 밀접한, 정말 한 몸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나에게는 특히 이 불안이 불면과 불쾌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자라면서 상징계의 규약 내로 진입해야 한다. 그런데 상징계는 그 근본 토대가 “결여”(빈 곳)이다(이 말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근거가 없는 것, 혹은 중심이 비어있는 것, 이 부분도 계속 고찰해 나가야 한다). 이 때문에 인간 정신은 원래적인 혹은 상상적인 ‘전능한 만족’감을 갈구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의 (전능한)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이란 주체의 소멸, 결여의 결여에 다름 아니다-정신병적 불안) 그래서, 타자의 결여를 인정하면서도 그 결여를 (상상적 팔루스로)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것은 ‘거세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라캉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 허용된 바람직한 태도는 타자의 결여뿐만 아니라 주체 자신의 결여(상상적 팔루스가 없음)를 인정하고 ‘주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발췌]
- 데카르트는 사고를 통해서 회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회의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회의에 빠진 것. (56)
- 죄에게는 그 어떤 자리도 없으며, 이것이 바로 죄의 독특한 본질이다.
- [정통 기독교 신학의 문제는 “아담의 죄가 아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다만 인류에 대한 아담의 죄의 결과만 다룸.”
- 불안은 공감적 반감이며 반감적 공감이다. (160)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안을 진실로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때문이다. (164)
-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사람들은 오로지 고독하게 혼자 힘으로 이해. (178)
- 불안 - 원죄에 대한 교의를 항상 마음속에 그리고 눈 앞에 두는 그런 방식 (100)
- 죄 - 어떤 훨씬 깊고도 깊은 전제. 개인을 훨씬 넘어서는 전제. (윤리학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어떤 범주가 출현) (109)
- 아담은 인류와 본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인류와 다르다면 인류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인류라면 그 때도 또한 인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인류이다.
- 최초의 죄는 질적 규정을 이루고 있다. 최초의 죄가 바로 그 죄이다. 이것이 최초의 죄의 비밀이다. (137) [질적 비약이라는 말]
(원죄는 오성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그런 어떤 초월성을 함축 (141)
- 순진함은 언제나 오직 개인의 질적 비약에 의해서만 상실될 뿐 (152)
- 금령이 타락의 필요조건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면, 그것은 또한 과도한 욕망의 필요조건이 되는 것으로도 간주된다. (157)
[이 부분이 중요하다.]
- 불안은 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 (160)
- 원죄의 본성은 ... 가장 중요한 범주 하나[는]. . . 불안이다.. . . 불안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어떤 갈망이며 일종의 공감적 반감이다. 불안은 개인을 사로잡는 어떤 낯선 힘이다. 그렇지만 개인은 불안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은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또한 갈망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최초의 죄는 언제나 나약함에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죄에는 언뜻 보기에는 책임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책임의 이러한 결여가 바로 진짜 함정인 것이다. (161)
- 자유가 감성적인 것(심미적인 것)과 이어질 때 더욱 커다란 불안 속으로 들어감. (226)
-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서의 현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감성적 삶의 불완전성이 있다. 영원도 또한 과거도 미래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서의 현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원의 완전성이다. (259)
- 불안과 무는 언제나 서로 상응한다. 자유의 현실성과 정신의 현실성이 정립되는 순간 불안은 지양된다. (277)
- 유한한 정신이 신을 보려고 할 때, 유한한 정신은 허물 있는(죄를 지은) 자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297)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들은 죄-불안-무-자유-질적비약 등이다. 이 용어들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 자유가 스스로를 전제하는 것처럼, 죄는 스스로를 전제하며, 자유가 자신에 선행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죄도 역시 자신에 선행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다. (311)
[키에르케고르의 여기서의 이야기는 금제, 아버지의 이름 등의 정신분석적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이 된다.]
- 악마적인 것은 선에 관한 불안이다. 순진무구함에서 자유는 자유로 정립되지 않았다. 자유의 가능성은 개인 안에 들어 있는 불안이었다. (331)
- 사람들은 영원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은 채 다만 영원성에 대해서 불안해 한다. 불안은 수많은 도피를 획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악마적인 것이다. (389)
-불안하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누구든지 궁극적인 것을 터득한 법이다. (395)
-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397)
* 임규정 - 인간의 존재론적 상실을 의미하는 불안의 개념
- 키에르케고르의 물음의 주제
당신은 실존하는 한 인간, 혹은 인간적 존재이다. 당신은 이 사실이 요구하는 진지함과 관심을 지니고 있는가? 혹은 당신은 이 물음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25)
- 키에르케고르에 의하건대 회의에 대한 해결책은 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단에 있는 것이다. (46)
- 실존의 본질적인 규정은 자유에 대한 규정이지 필연성에 대한 규정이 아님. (48)
-[키에르]의 심층적 정서는 한마디로 말하면 무에서 비롯되는 불안. (51)
[이 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우리를 받쳐줄 것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키에르를 이해하는 핵심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라깡은 그것이 대상 a라고 했다. 상징계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 키에르로서는 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구나. 상징계에는 없는 것. 이제 뭔가 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 모든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느님에게 잊힌 채, 그리고 이 엄청난 세대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간과된 채 이 세상에 홀로 있게 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여전히 살아 있다. (53)
- 그를 사로잡은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존재론적 불안이다. 그는 이런 불안을 무의 불안이라고 부른다. 이 무야말로 키에르 철학의 아르키메데스적 점이다. (55)
- 아담의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질적 비약 이외에는 없다. 키에르는 “죄는 죄성에 의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질적 비약에 의해서 들어온다”고 단언한다. (59)
-자기 앎은 오직 실존하는 인간 자신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자기 앎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신의 가능태가 현실화되는 것. (66)
[거울 단계]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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