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으로

들뢰즈 * 가따리 - [안티 - 오이디푸스] 4장 분열분석 서론 (발췌)

by 길철현 2016. 9. 20.

[안티-오이디푸스](Anti-Oedipus)-- 4. 분열분석 서론(Introduction to Schizoanalysis)

 

길철현(발췌-요약*정리)

 

 

1. 사회 터전(The Social Field)

 

-아버지와 아이

오이디푸스 차체는 부모의 아이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또 모든 것이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숨길 수도 없다. () 오이디푸스는 신경증자의 어린 시절의 감정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편집병에 걸려 있는 어른의 관념이다.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가 먼저라고 말 할 때, 이 명제는 사회적 공급들은 가족적 공급들보다 먼저요, 후자는 전자의 적용 혹은 포개는 일에서만 생긴다. 아버지가 아이보다 먼저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의 공급이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 터전의 공급이요, 아버지와 아이는 이 사회 터전 속에 동시에 던져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73-74)

(사회와 가족의 관계. 사회적 맥락에서 가족이 형성됨을 강조)

 

-세 가지 결론

1) 소급(regression)의 관점에서 볼 때,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먼저인 것은 아버지이다. 아들을 오이디푸스와 하는 것은 편집병자인 아버지이다. 죄책감은, 아들이 체험하는 내면적인 감정이기 이전에, 아버지에 의하여 투사된 관념이다. 정신분석의 첫째 과오는 마치 사태가 아이와 더불어 시작된 듯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으로 하여금 환상에 관한 부조리한 이론을 전개하게 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이들의 실제의 행동과 정념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이의 환상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프로이트가 (부모의) 유혹의 주제(theme)를 버린 것).

2) 소급을 절대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이면 그것은 부적절한 것임에 분명한데, 이것은 소급이 우리를 단순히 재생산(reproduction)이나 생식(generation) 속에 가두어놓기 때문이다. 또 기관을 가진 신체와 유기적 조직을 가진 인간을 재생산이나 생식의 대상으로 취할 때, 소급의 이론은 재생산되는 대상을 획득할 뿐이다. 순환의 관점만이 정언적(categorical)이고 절대적(absolute)이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재생산의 주체인 생산에, 즉 무의식의 자동-생산의 과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섹슈얼리티가 생식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전진적인 혹은 소급적인 생식이 순환운동으로서의 섹슈얼리티에에 봉사한다. 정신분석의 둘째 과오는, 그것이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을 아주 분리시켰을 때에도, 여전히 완미한 가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점이다. 이 가족주의가 정신분석으로 하여금 소급이나 전진의 운동에서만 일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3) 이접적(disjuntive)이거나 순환에 있어서 이접들을 설명해 주는 공동체의 관점. 비단 생식만이 순환에 대하여 이차적이어서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이 정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이차적이다. 정확히 말해서 흐름의 유전은 없고, 흐름들에 정보를 전달하는 규준(code)이나 공리계(axiomatic), 즉 결합장치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 유전학의 혁명이 이루어졌다. 사회 터전에 있어서도 그 규준화(code)나 그 공리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 터전 안에서 무의식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규정한다. 모든 점에서 보아, 가족은 결코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기만 하는 것이다. 첫째로는 출발점의 자극으로서, 그 다음에는 도달집합점으로서, 끝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을 중개 혹은 방해하는 것으로서 규정될 따름이다. (275-76)

 

-사회적 투여(investment)의 두 가지 형태

1)분리차별형--파시즘화하는 편집병적인 형 내지 극. 이 형은 중앙주권의 조직체를 공급하며, 이 조직체를 역사상의 다른 모든 사회형태들의 영원한 목적으로 삼고서 이 조직체를 초공급하며, 욕망의 자유로운 형상 전체를 탈투여한다.

2)유목형--혁명적-정신분열증적인 형 내지 극. 이 형은 욕망의 도주선(탈주선)을 따라가며, 벽을 뚫고 지나가 흐름들을 통과시키며, 자기의 기계들과 자기의 융합집단들을 외딴 곳이나 변두리에 설치한다. (277)

 

-기관들 없는 신체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우주의 알과 같은 것, 거대한 분자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의 두 면은 큰 덩어리의 현상과 이에 대응하는 편집병적 공급이 현미경적 규모로 조직되는 면과, 또 하나는 분자적 현상들과 이것들의 정신분열증적 공급이 현미경 이하의 규모로 꾸며지는 면이다. 편집병과 정신분열증 간의 분수령이 생기는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사이의 접합점, 즉 경계인 한에서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이다. 사회체는 기관들 없는 신체의 하나의 투사가 아니라, 오히려 기관들 없는 신체가 사회체의 극한, 사회체의 탈토지화의 접선, 탈토지화한 사회체의 최후의 잔재이다. (281)

 

(282페이지 도표)

 

<보충>

) 몰적/분자적 (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368-69)

몰적과 분자적을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의 연결에 관해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인 투여(investment, cathaxis 에너지의 집중)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우선 몰적과 분자적의 차이는 수나 크기와 무관하며, 개체와 집합체 사이의 차이를 지시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이미 집합적이어서 차이는 두 종류의 집단, 혹은 개체군들과 관련되어 있다. 몰적인 것은 거대한 집계 혹은 통합 과정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통계학적인 그룹화를 가리킨다. 다른 한편 분자적인 것은 탈주의 운동과 관련되어 있는 미시-다양체들 혹은 단독성들을 가리킨다. 혹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몰적과 분자적은 두 종류의 집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차적으로는 두 종류의 집단 투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몰적이라는 개념과 분자적이라는 개념은 예속 집단의 투여 및 주체 집단의 투여와 함께 욕망과 사회적 장의 관계를 미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이것들은 욕망이 사회적 장에 투여될 수 있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인 것이다.

 

) 서동욱, 기관들 없는 신체와 스피노자의 신, [들뢰즈의 철학]

 

들뢰즈는 이 기관들 없는 신체를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라고 설명하는데, 기관들 없는 신체가 욕망하는 기계와 별도로 독립해 있는 어떤 초재적인 존재자나, 우리의 경험의 표상될 수 있는 어떤 객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욕망하는 기계들이 하나의 동일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이접적으로 등록된다는 주장이 담고 있는 <유기체>에 대한 비판을 간파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계들간의 이접성(비관계성)은 당연히 그 어떤 유기체적 모형을 통해서도 해명되지 않는다.

(등록: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가 맺는 관계를 <등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라캉이 먼저 사용한 것이다. 라캉은 하나의 충동과 그 충동에 고유한 기관과의 관계를 <등록>이라는 말로 나타냈다. 가령 우리는 시각적 충동은 눈에 등록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들뢰즈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칸트가 신을 해명했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칸트처럼 신을 <실재의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객체에 술어를 귀속시키는 방식, 즉 판단을 산출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 한 사물(객체)에 대한 인식(판단)은 가능한 술어 전체를 전제하고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모든 가능한 술어(속성) 전체 또는 모든 가능한 실재의 총체가 각 사물에 대한 규정(판단)의 배후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실재의 총체>, 들뢰즈식으로 표현하자면 속성들이 모두 등록되어 있는 하나의 신체를 일컬어 칸트와 들뢰즈는 바로 <>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재(술어)의 총체라는 칸트의 신 개념은 의외로 스피노자의 신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칸트에게서 모든 실재(술어)의 총체가 신이듯 스피노자에게서도 모든 속성의 총체가 신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그 말의 가장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인 동시에 칸트적인 의미에서 <실재의 총체>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기계에 대해 독립된 지위를 가지는 존재자도 아니요, 경험상에 현시될 수 있는 표상도 아니요, 오로지 <서로 이접적인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체>이다. 마치 스피노자에게서 실체가 속성에 대해 상위의 독립적인 형이상학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속성들의 총체>이듯이 말이다. 스피노자가 속성들의 총체를 신이라 부르고, 칸트가 술어들의 전체 저장 창고(실재의 총체)를 신이라 부른 것과 동일하게, 개별자가 지닐 수 있는 모든 힘의 원천인 욕망하는 기계들 전부가 귀속되어 있는 총체라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신적이며, 그것의 에너지(누멘)도 신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스피노자적 욕망 이론이 보이고자 하는 바는 욕망의 본래적 형태는 분열증이라는 것인데, 분열증자의 임상적 사례인 슈레버가 바로 스피노자적인 방식으로 매우 정확하게 자기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와 슈레버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170-76 요약)

 

2. 분자적 무의식(The Molecular Unconscious)

 

-욕망과 기계

무의식은 물리학에 속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그 강도들이 물질 자체라 하는 것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무의식 속에는 주민들, 집단들 및 기계들밖에 없다. 우리가 한 편에 사회기계와 기술기계의 무의지를, 다른 한 편에 욕망하는 기계들의 무의식을 정립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복잡하게 결부된 힘들 간의 필연적 관계이다. (283)

 

-생기론(vitalism)과 기계론(mechanism)을 넘어서

기계론은 기계들로부터 하나의 구조적 통일을 추상하여 이것을 따라 유기체의 기능을 설명한다. 생기론은 생물에 특유한 개체적 통일을 끌어대고 모든 기계는 이것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새뮤얼 버틀러--[에러혼](Erewhon) “The Book of Machines”

버틀러는 대립하는 두 주장을 각각 그 극단에까지 밀고 나가, 더 이상 서로 대립할 수 없는 점, 즉 무차별지점 혹은 분산(dispersion)에 이르게 한다. 다시 말해, 그는 <기계들은 유기체의 연장이지만 사실은 한 사회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존재하는 지체들과 기관들이요, 인간들은 그들의 힘과 부를 따라 이 지체들과 기관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가난하면 마치 팔다리가 잘린 유기체들인 양 이 지체들과 기관들을 빼앗긴다>고 말하는 것과, <유기체들은 기계들이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들을 지니고 있어서, 이 부분들은 서로 관련하며 서로 기계화하는 뚜렷이 다른 기계들의 서로 다른 부품들에 비길 만하다>고 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기체에 특유한 개체적 통일을 의문시하여 생기론의 주장을 폭파하고, 또 기계의 구조적 통일을 의문시하여 기계론의 주장을 폭파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생기론과 기계론을 그 극단으로 밀고 나가서 그 구분이 근거 없음을 주장)

일단 기계의 구조적 통일이 파괴되면, 그리고, 일단 생물의 특유한 개체적 통일이 없어지면, 기계와 욕망 사이의 직접적 유대가 나타나고, 기계는 욕망의 핵심에 이행하여, 기계는 욕망하는 것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욕망은 주체 속에 있지 않고, 기계가 욕망 속에 있다--잔재인 주체는 다른 쪽에, 즉 기계 쪽에 속한다. (283-85)

 

(보충: 박정수--인터넷)

고전주의 기계론

욕망생산의 기계적 성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번의 단절이 요구됩니다. 먼저, 데카르트의 기계론과 린네의 박물학을 동시에 감싸고 있는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와의 단절이 요구됩니다. 이 표상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기계는 생명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구분의 선은 사고하는 존재’(res cogitans)연장된 존재’(res extensa) 사이에 그어집니다.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이성을 제외한 인간의 신체 역시 동물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기계로 파악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계적이라는 단어에서 필연적 메커니즘, 수학적 규정성, 구조적 통일성 따위의 의미를 떠올리는 것은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의 잔영입니다. 이런 기계론의 관점에서 보면 유기체 역시 복잡하지만 구조적 통일성을 지닌 완벽한 기계입니다.

 

근대의 생기론

19세기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이 일반수학의 분류공간이 파괴되면서 출현했습니다. 분류학적 공간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구분선이 생겼는데, 그것은 생명과 무생물(기계) 사이에 확고히 그어졌습니다. “큐비에 이후로 분류의 외부적 가능성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은 비지각적이고 순수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생명”(말과 사물, 315)입니다. 이제 생물은 연장의 속성을 갖는 존재의 일반적 규정을 벗어나게 됩니다. 오히려 생명의 본질은 수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인과적 필연성과 구조적 통일성을 항상 벗어난다는 점에서 찾아집니다. 생물학이 출현한 이래 생명체는 그 가시적 형태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기능들의 통일체로 규정되고, 무생물은 유기체가 자신의 개체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호흡이나 영양섭취 등 생명기능의 수행과정에서 부단히 상호 작용해야 할 외부 환경에 자리잡게 됩니다. 18세기의 생기론vitalisme17세기의 데카르트가 했던 것을 뒤집어서 이번에는 기계 역시 유기체의 기관이 연장된 것으로 보거나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을 유기체의 기능적 통일성으로 환원시켰습니다. 19세기 초반 후기 낭만주의 소설에서 생기론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자동기계인형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계의 두 상태

진정한 차이는 기계와 생물, 생기론과 기계론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의 두 상태이기도 한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다. 구조적 통일 속에 갇힌 기계, 그 특유의 개체적 통일 속에 갇힌 생물은 덩어리 혹은 몰적 집합들의 현상이다(mass phenomena and molar aggregates); 이런 자격으로는 기계와 생물이 서로 외적으로 관계한다. 그래서 설사 이 양자가 서로 구별되고 서로 대립한다 해도, 그것은 다만 동일한 통계학적 방향에서의 두 국면으로서만이다. 그런데 다양한 것들의 더 깊은 혹은 내적인 다른 방향에는, 분자적 현상들과 생물의 단일체들 간에, 즉 기계 전체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기계들과 유기체 전체 속에 널려 있는 작은 조직체들 간에, 상호침투,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이 영역에서는 마이크로 물리학과 생물학이 구별되지 않으며, 기계 속에 생물들이 있는 그만큼 생물 속에 기계들이 있다. 이 기계들은 무한정하게 중계를 거듭하고, 작동의 순환 속에서 서로 맞물린다. 이 기계들은 일단 조립되면 열역학의 법칙들을 따르지만, 조립되는 과정에서는 이 법칙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285-86)

 

-분자적 기능주의

기능주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현미경 이하의 차원, 즉 욕망의 기계적 배열들, 욕망의 공학의 차원에만 있다. 왜냐하면, 오직 거기서만 작동과 자기형성, 사용과 조립, 생산물과 생산이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바로 우리가 그것들을 재료삼아 만드는 그것이요, 우리가 그것들을 도구삼아 만드는 그것이요, 그것들이 그것들 스스로 만드는 그것이다. (288)

 

-손디(Szondi) 유전적 무의식(289)

 

-비인간적인 성(nonhuman sex);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n개의 성

거세는 성욕을 인간의 형태로 또 몰적으로 표상하는 근거라고 말한다. 거세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의식의 동일한 하나의 착각의 멍에 아래 결합시키는 동시에 흩어지게 하며, 또 이들로 하여금 이 멍에를 숭배하게 하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거세의 신화를 그대로 두고서 성의 비인간적인 본성, 가령 (라깡의) <대타자>를 규정하려는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빗나간 것이다.

욕망을 인간 형태의 몰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이 표상의 근거를 이루는 것, 즉 결여의 이데올로기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이에 반하여 분자적인 무의식은 거세를 모른다. 왜냐하면 부분적 대상들은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것들인 한에서 자유로운 다양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절단들은 흐름들을 고갈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일한 독자적인 절단으로 이 흐름들을 억제하지 않고, 끊임없이 흐름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요, 둘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라 수천 수만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이다: 하나의 성이 아니요, 두 개의 성도 아니라, n개의 성이다. 분열분석은 한 주체 속의 n개의 성의 분석이다. 사회는 주체에 대하여 성욕을 인간의 형태로 표상할 것을 강요하고, 또 주체 자신도 자기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 이러한 표상을 자기에게 주지만, 분열분석은 이러한 표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욕망하는 역명의 분열분석의 정식은 무엇보다도 각자에게 그의 여러 성을이 될 것이다. (295-96)

 

3.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분열분석의 주장(표상과 생산)

욕망은 기계요, 기계들의 종합이요, 기계적 배열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분석이 이 생산의 질서를 박살내고, 이 질서를 표상 속에 옮겨놓은 것을 비난한다. 무의식의 표상이란 관념은, 정신분석의 대담함이기는커녕, 처음부터 그 파탄과 그 단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이제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믿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무의식이다. (296)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정신분석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욕망하는 생산의 탈규준화(탈코드화)한 흐름들을 극한으로서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을 규준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공리계 속에 묶음으로써 이것들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탈토지화의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자본주의는 모조의 인공적인 재토지화들을 통하여 이 운동을 쫒아버린다. 자본주의는 토지적이고 전제군주적인 표상들의 폐허 위에 건설되지만, 이 표상들을 자본의 심상들이란 자격으로, 하나의 다른 형태로 재건하여 이용한다. (303)

 

-신화와 비극에 대항하여

 

-신화나 비극에 관한 정신분석의 애매성

정신분석은 신화와 비극을 객관적인 표상들로서는 파괴하고 그것들 속에서 보편적인 주관적 리비도의 형상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신화와 비극을 주관적 표상들로서 되찾아내어 승격시키는데, 이 주관적 표상들은 신화와 비극의 내용을 무한히 높인다. 정신분석은 신화와 비극을 다루되, 이것들을 사적인 인간, 즉 가족인(Homo familia)의 꿈이나 환상으로서 다룬다--그런데 사실 꿈과 환상이 신화와 비극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사유재산이 공유재산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신화와 비극에서 객관적인 영역의 상태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정신분석에서 다시 거론되고 높여지되, 주관적 표상의 무의식적 차원으로서 문제되고 높여진다.

정신분석은 신화와 비극을 주관적인 보편자의 차원들에 옮겨놓는다: 오이디푸스 자신이 <콤플렉스 없이> 존재한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없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정신분석에 스며들어 있는 신화와 비극의 객관적 표상들의 체계를 파괴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 욕망하는 생산을 주관적 표상들의 체계 속에 옮겨놓는다. 결국 남는 것은 친밀한 가족적 극장, 사적인 인간의 극장이다. 이 극장은 욕망하는 생산도 아니요, 객관적인 표상도 아니다. 무대로서의 무의식이다. (304)

 

-정신분석이 표상을 파괴하고 회복하는 것

리카르도가 <단적으로 노동 자체>, 따라서 또한 표상을 실제로 넘어서서 넘쳐흐르는 생산의 영역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듯이, 프로이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그야말로 옮겨놓아진 표상내용이다; 그렇다, 거세는 그야말로 표상하는 자요, 옮겨놓은 자요, 시니피앙이다--그러나 이 모든 것의 어느 하나도 무의식의 질료를 구성하지 않으며, 무의식의 생산들에 관여하지 않는다. (313)

 

-자본주의의 요구들

-신화적, 비극적, 정신분석적 표상

-극장

-주관적 표상과 구조적 표상

-구조주의, 가족주의, 결여의 숭배

 

-분열분석의 파괴작업, 무의식의 청소: 적의 있는 활동

정신분석이 발견한 수법, 정신분석이 수행한 기능은 신앙들을 부인한 후에도 신앙들이 살아남게 하는 것이었다! 즉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사적인 토지, 사적인 원국가, 사적인 자본을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분열분석은 거꾸로 전력을 다하여 필요한 파괴에 전념하여야 한다. 신앙들과 표상들, 극장의 무대들을 파괴하여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아무리 적의 있는 활동을 해도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와 거세를 폭파하라. 환자가 신화의 노래나 비극의 구절을 뇌까릴 때마다 언제나 난폭하게 멈추게 하고 그를 언제나 공장으로 다시 데리고 가라. (314)

 

-탈토지화와 재토지화: 이것들의 관계, 그리고 꿈

분열증적 욕망의 흐름들의 탈토지화들은 전체적인 혹은 국지적인 재토지화를 수반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다. 이 재토지화들이 언제나 표상의 해변을 다시 형성한다. 뿐만 아니라, 탈토지화의 집요한 힘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 탈토지화를 표상하는 재토지화의 유형들을 통해서만이다; 탈토지화와 재토지화는 표리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사랑은 탈토지화와 재토지화의 복합물이다.

꿈의 경우는 오이디푸스적인데, 왜냐하면 꿈은 수면과 악몽의 탈토지화에 비하면 도착된 재토지화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재토지화의 상상적이고 구조적인 표상표현들에 집착하지만, 분열분석은 탈토지화의 기계적 지표들을 추구한다.) (316)

 

-기계적 지표들

-정치화: 사회적 소외와 정신적 소외

-인위적인 것과 과정, 낡은 대지들과 새로운 대지

-정신의학 혹은 반정신의학의 참된 정치

1) 광기를 정신병으로 변형시키는 모든 재토지화를 파괴하는 일

2) 모든 흐름에서 이 흐름들이 탈토지화하는 분열증적 운동을 해방시키는 일. 이때 이 분열증적 성격은 더 이상 어떤 특수한 잔여물을 광기의 흐름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고, 노동, 욕망, 생산, 인식, 창조의 흐름들을 이것들의 가장 깊은 경향에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321)

 

4. 분열분석의 첫 번째 적극적 임무

 

-첫 번째 적극적 임무

모든 해석을 떠나 환자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성, 그 자기형성 혹은 작동을 발견하는 것이다. 네 욕망하는 기계들은 무엇인가? 네가 네 기계들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 거기서 나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은 돌고 있는가? 비인간적인(nonhuman-인간적인 것이 아닌) 성들은 어떤 것인가? 분열분석가는 하나의 기계기사(mechanic), 분열분석은 오로지 기능적이다. (322)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들은 실상 분산의 어떤 문턱을 넘어 상상적인 동일성도 구조적인 통일도 존속하지 않게 되어야만 도달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부분적 대상들을 부품들로 가지고 있다; 부분적 대상들은 분명 작동하고 있는 기계인데, 이것은 한 부품이 끊임없이 전혀 다른 기계의 부품과 관계하는 분산의 상태에서 그렇다.

집합을 구조화하고 부품들을 인물화하여 통일하고 전체화하는 남근 같은 항을 서둘러 끌어들이지 말자. 어디에나 기계의 에너지인 리비도가 있으며, 경적도 꿀벌 수컷도 남근으로 존재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근이 개입하는 것은 구조적 조직과 이 조직에 유래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들 속에서만이다. (322-23)

 

-부분적 대상들의 규정(status)

분열분석이 분산되어 있는 것들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것은 무의식의 궁극적 요소들인 부분적 대상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적 대상들은 하나의 분산되고 무정부적인 순수한 다양성이요, 통일도 전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요소들은 실제적인 구별 혹은 연결의 부재에 의하여 접합되고 밀착된다. 요컨대, 부분적 대상들은 무의식의 분자적 기능들이다. (323-24)

 

-수동적 종합들

두 개의 부분적 대상에 결부된 각각의 흐름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서로 겹쳐 있다고 가정하자: 이 흐름들의 생산의 활동은 이 흐름들을 생기게 하는 대상들 xy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뚜렷이 달라 구별되지만, 이 흐름들이 현전하는 터전은 이 흐름들에 눌러 붙어 있으면서 이 흐름들을 절단하는 대상들 ab하고는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분 a와 부분 b, 이 점에서, 구별할 수 없게 된다(따라서 입과 항문, 거식증자의 입-항문). 또 부분 a와 부분 b는 단지 혼성영역에서만 구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 영역에서 그 기능을 맞바꾸었으므로, 두 흐름이 겹쳐지지 않는 곳에서도 배타택일적으로 더 이상 구별될 수 없다고 언제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ab가 포함적 이접의 역설적 관계 속에 있는 새로운 수동적 종합이 성립한다. (325)

 

-기관들 없는 신체의 규정

기관들 없는 신체는 그 자체 욕망의 두 가지 활동, 욕망의 두 개의 머리(분열-흐름, 흐름-절단)를 중화시키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작동시키게 되는 것으로서, 연결의 최초의 수동적 종합에서 산출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대상들-기관들을 밀어젖힐 수도 있고, 이것들을 끌어당기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부분적 대상들-기관들은 유기체에 대해서 함께 대립하고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사실상 하나의 전체로서 산출되지만, 부분들 곁에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산출된다.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실제로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부분들에 곁들여진다.

부분적 대상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직접적인 힘들이요,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부분적 대상들의 가공되지 않는 질료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내재적 실체, 이 낱말의 가장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부분적 대상들은 이 실체의 궁극적 속성과 같은 것이다. 이 속성들은 실제로 뚜렷이 구별되고 이 때문에 배타 혹은 대립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는 한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에 속한다. 부분적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분열증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두 가지 질료적 요소이다. 한 쪽은 일하는 부품들로서의 요소요, 다른 한 쪽은 부동의 동자로서의 요소이다. 한 쪽은 마이크로-분자들로서의 요소요, 다른 한 쪽은 거대한 분자로서의 요소이다--이 둘은 욕망의 분자적 연쇄의 두 끝에서 연속의 관계를 가지고 집합을 이룬다. (325-27)

 

-시니피앙의 연쇄

무의식의 시니피앙의 연쇄, 즉 누멘은 욕망의 규준(code)들을 발견하는 데에도 또 해석하는 데에도 소용이 없고, 이와는 반대로 절대적으로 탈규준화(decode)한 욕망의 흐름들, 즉 리비도를 통과시키고, 모든 규준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모든 토지를 파괴하는 것을 욕망 속에서 발견하는 데에 소용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가족의 토지와 거세의 시니피앙으로써 정신분석을 하나의 단순한 규준의 지위에 다시 인도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더 나쁜 일은, 정신분석이 그 자체 하나의 공리계의 가치를 지니려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이 더 이상 가족의 무대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진리를 보증한다고 여겨지는 정신분석의 무대와 자기 자신의 성공을 보증한다고 여겨지는 정신분석적 조작에만 관심을 쏟게 되는 저 유명한 전환점이다. (329)

 

-죽음과 욕망

기관들 없는 신체는 죽음의 표본이다. 죽음의 표본은 기관들 없는 신체가 기관들을 거절하고 폐기할 때 나타난다. 그런데, 죽음은 욕망되지 않는다. 기관들 없는 신체나 부동의 동자의 자격으로, 욕망하는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또 일하는 기관들의 자격으로 욕망하는 삶이 있다. 여기에는 두 욕망이 있지 않고, 기계 자체의 분산 속에, 욕망하는 기계의 두 개의 부품, 두 종류의 부품이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순환 속에서, 죽음의 경험이 죽음의 표본에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다. 죽음의 경험은 그야말로 넓은 경험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 욕망하는 기계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고 알게 하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또 인접부품으로서의 주체는 언제나, 죽음의 경험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지, 죽음의 표본을 받는 <>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표본 자체는 <>가 아니라, 기관들 없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표본이 다시 죽음의 경험을 향하여 재출발하지 않고서는, 죽음의 표본에 합류하지 않는다. 언제나 표본으로부터 경험에로 나아가고, 재출발하고, 표본으로부터 경험에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을 분열증화하는 것이요, 욕망하는 기계들이 실지로 행하는 일이다. (329-31)

 

-정신분석에 있어서의 죽음의 기묘한 숭배: 유사 본능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에서 정말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숨기지 않았다: 어떤 사실이건 사실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원리만이 문제이다. 원리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죽음의 본능은 순수한 침묵, 순수한 소멸이요, 경험에서는 주어질 수 없고 주어지지도 않는다. 프로이트가 죽음을 초월적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은, 그에 의하면, 죽음이 표본도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본능을 부인한 정신분석가들은 무의식 속에는 표본도 경험도 없기 때문에 죽음의 본능은 없다고 말하였고, 죽음의 본능을 인정한 분석가들은 표본과 경험이 없다고 하는 바로 이 이유로 해서 죽음의 본능은 있다고 말하였다. 분열분석가는 이와 반대로 무의식 속에는 죽음의 표본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본능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때 죽음은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이 부품은 기계의 작동과 그 에너지의 변환 체계에서 판단되고 평가되어야지 추상적 원리로서 평가될 것이 아니다. (332)

 

-분열분석의 기계기술적 임무

욕망하는 기계들에는 세 개의 부품들, 세 개의 에너지, 세 개의 종합이 있다: 그 부품들은 일하는 부품들, 부동의 동자, 인접부품이요--그 에너지들은 리비도, 누멘 및 볼룹타스요--그 종합들은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의 연결적 종합들, 단일자들과 연쇄들의 이접적 종합들, 강도들과 생성들의 연접적 종합들이다. 분열분석가는 해석자도 아니요, 연출자도 아니다. 그는 기계기사, 마이크로-기계기사이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압박선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그 도주선I(탈주선 escape)들이다. 무의식이 의식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무의식에 압력을 가하여 제지하고, 무의식이 도주하는 것을 방해한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그 함정에 빠지게 함으로써 그 자신 함정에 빠지거니와, 이와 반대로 분열분석은 도주선들과 기계적 지표들을 추적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에게까지 이른다. 분열분석의 파괴적 임무의 본질이, <증례>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때마다 소위 억제의 오이디푸스적인 함정과 그 모든 속령(dependency)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 적극적인 첫째 임무는, 여기서도 가변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으로, 근원적 억압을 확실하게 기계적인 것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 소위 억제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폐쇄나 동조를 파괴하고, 외견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대립(기관들 없는 신체와 부분적 대상들인 기계들의 대립)을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에로 변형시키고, 이 작동을 끌어당김 및 강도들의 생산의 형태들로 확실하게 실현시키고, 따라서 생산된 강도들 속에 제로(0)의 단계를 포섭하는 동시에, 끌어당기는 작동 속에 고장들을 통합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욕망하는 기계들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다. (338)

 

5. 분열분석의 두 번째 적극적 임무

 

-양극 이론

근본적으로 두 극이 있다. 어떤 때에는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시니피앙의 구조화된 편집병적 통합선들과, 기계적이고 분산된 분열증적 도주선(탈주선)들로서, 또는 더 나아가 도착된 재토지화들의 흔적과 분열증적 탈토지화들의 운동으로서 대립시켰다. 어떤 때에는, 이와 반대로, 우리는 이 양자를, 하나는 반동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경향을 띤 정주적이고 일대일 대응적인 공급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인 경향을 띤 유목적이고 다의적인 공급인, 똑같이 사회적인 두 가지 큰 형의 공급으로서 대립시켰다. (340)

 

-첫째 명제: 모든 투여는 몰적이며 사회적이다.

모든 투여는 사회적인 것이요, 어떤 모로나 사회적, 역사적 터전을 대상으로 한다. 몰적 조직체 혹은 군집형태는 큰 수들의 법칙들(the laws of large numbers)을 따르는 통계학적 집적에 의하여, 분자적인 힘들을 통일하고 전체화한다. 이 통일체는 어떤 종의 생물학적 통일체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사회체의 구조적 통일체일 수도 있다. 사회적인 혹은 살아 있는 한 유기체가 하나의 전체로서, 즉 하나의 전체적 대상 혹은 완비된 대상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분자적 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하나의 결여로 나타나며, 동시에 전체 자체는 부분적 대상들에서는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말해지는 것은 이 새로운 질서와의 관련성 속에서이다. (342)

 

-둘째 명제: 사회적 투여의 구별

사회적 투여들은 집단 혹은 무의식적인 리비도 공급과 계급 혹은 이해관계의 전의식적 투여로 구별된다. 이 후자는 사회의 큰 목표들로 해서 행해지며, 또 유기체와 그 기관들 전체와 관계하는데, 이 기관들에는 배치된 결여의 공포(vacuole)들로 포함된다. 한 계급은 종합들의 체제, 즉 전체적 연결들, 배타택일적 이접들, 잔여적 연접들의 상태로써 정의된다. (343-44)

 

-사회 터전에서의 리비도 투여의 본성

리비도 경제학은 정치경제학 못지 않게 객관적이요, 정치경제학은 리비도 경제학 못지않게 객관적이요, 정치경제학은 리비도 경제학 못지않게 주관적이다. 이 두 가지는 다 사회적 현실로서의 동일한 현실의 서로 다른 두 투여양식에 대응하는 것이다. 욕망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여는 반드시 이익의 전의식적 투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 이 리비도 투여는 전의식적 투여가 이데올로기 전체의 지배를 받아 가장 음침한 조직속에서 혼란스럽게 되고 도착되어질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리비도 투여는 사회적 종합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 종합들이 의존하는 힘들이나 에너지들의 발전단계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 종합들에 의하여 조작되는 채취들, 이탈들 및 잔여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 종합들의 조건인 흐름들과 규준(code)들의 본성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사회의 목표들과 수단들에 관여하지 않고, 사회체로서의 충만한 신체에, 주권형성조직체나 자기 자신을 위한 권력형태에 관여한다. 이 형태는 의미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의미와 목표가 이 형태에서 생기는 것이지, 이것의 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345)

 

 

-분열분석의 일반적인 원리

분열분석의 일반적인 원리는 언제나 욕망이 사회 터전을 구성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욕망은 하부구조에 속해 있지, 이데올로기에 속해 있지 않다: 생산이 욕망하는 생산으로서 욕망 속에 있는 것처럼, 욕망은 사회적 생산으로서 생산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정식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욕망이 권력의 형태나 군집의 형태로 구성하는 구조화된 몰적 집합에 종속하는 데 따르는 방식이요, 다른 한 가지는 욕망이 그 자체 분자적 규모로 형성하는 기능적 다양성들에 큰 집합을 종속시키는 데 따르는 방식이다. (348)

 

-예속집단(subjugated group)과 주체집단(subject group)

예속집단의 무의식적 성격들은, 생산력을 차지하고, 이것들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흡수하는 고정된 토대로서의 사회체에의 종속; 더욱 불멸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또 더욱 불멸이고자 하는 체계 속에 반생산을 전파하고 치명적인 요소들을 전파하는 것; <초자아화>, 나르시시즘 및 집단의 위계의 현상들, 욕망의 억압의 메커니즘들이다. 이와 반대로 주체집단은 그 리비도 투여 자체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 터전 속에 침투시키고, 사회체나 권력형태를 욕망하는 생산에 종속시킨다; 욕망의 생산자요 생산하는 욕망인 이 집단은 언제나 가가적인 조직체들을 만들어내는데 이 조직체들은 이 집단 속에 죽음의 본능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다; 이 집단은, 예속의 상징적 규정들에 대해서, 위계질서도 집단의 초자아도 없이, 횡단성의 현실적 계수들을 대립시킨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사람이 갖가지로 다른 관계들 아래 두 종류의 집단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혹은 갖가지로 다른 그러나 공존하는 상황들 속에서 동일한 집단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혁명적 집단이 이미 예속집단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해도, 어떤 조건들 아래서는 아직 주체집단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되기도 한다. (348)

 

-섹슈얼리티, <성의 혁명>

섹슈얼리티가 어디까지나 <더러운 작은 비밀>의 틀 속에 갇혀 있는 한은, 도착들 그리고 심지어 성의 해방도 아무런 특권적 지표가 도지 못한다. 비밀을 공개하고, 공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해도 소용이 없다. 비밀을 소독할 수 있고, 과학적이고 정신분석적인 방식으로 비밀을 치료할 수 있다. 차라리 욕망을 죽이게 되거나, 욕망을 위하여 가장 억압적인 감옥보다도 더 음침한 해방의 형태를 발명하게 될지도 모른다--비밀이 공개되거나 소독되거나 간에, 비밀의 범주로부터, 즉 나르시스적-오이디푸스적 기원으로부터 섹슈얼리티를 떼어내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위험이 있다. 이 나르시스적-오이디푸스적 기원은 지어낸 이야기로서 성욕에 강요된 것이요, 이 이야기에서는 성욕이 추잡스럽고 부끄럽고 혹은 굴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350)

 

-셋째 명제: 사회 터전의 리비도 투여는 가족적 투여에 앞선다

 

-정신분석의 빈곤

오이디푸스가 도래하는 조건들을 실제로 생각해 보자: 욕망하는 사회적 생산의 모든 대상, 동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출발점의 집합이 도달점의 집합으로서 유한한 가족적 집합에 포개져 있다. (이 가족적 집합은 최소한 세 항으로 되어 있고, 이 항은 늘릴 수 있고, 또 늘려야 하는 것이지만, 무한히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포개짐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일치는 외삽되는 가동적인 넷째 항을 전제한다. 이 넷째 항은 상징적인 추상적 남근인바, 이 남근은 포개는 일이나 대응을 실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이 일치는 최소한의 가족적 집합을 구성하는 세 인물--아버지, 어머니, 아이--혹은 이들의 대리인들에 대하여 실제로 작용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거세의 무대에서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근친상간의 무대에서건, 어머니가 아들이나 아버지를 죽이는 무서운 어머니의 무대에서이건, 이 세 항은 두 항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두 항으로부터 나르시시즘에 있어서의 한 항에로의 이행이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나르시스-오이디푸스 기계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 기계가 종말에 이르면 자아는 그 자신의 죽음을 만난다. 이 죽음은 순수한 폐기의 제로 항인바, 이 항은 처음부터 오이디푸스화한 욕망 속을 드나들며, 이제는 최후로 타나토스(죽음)로 확인되는 것이다. 4,3,2,1,0, 오이디푸스는 죽음에의 행로이다. (358-59)

 

-반정신의학

 

-넷째 명제: 사회적인 리비도 투여의 양극

분열분석의 넷째 명제는 사회적인 리비도 공급의 두 극을 구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반동적이고 파시즘화하는 편집병적인 극이요, 다른 하나는 혁명적인 분열적인 극이다. 하나는 욕망하는 생산과 욕망하는 기계들이 어떤 권력 형태나 선별적 주권형태 아래 큰 규모로 구성하는 군집적 집합들에 스스로 예속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의 경우와는 종속관계가 거꾸로 되고 권력이 전복되는 것이다. , 하나는 단일체들을 짓부수고 선별하여 자기들의 규준들과 공리계들 속에 붙잡아두는 것들만을 정규의 것으로 인정하는, 몰적인 구조화된 집합들을 통해서요,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큰 집합들을 자기들이 정교하게 꾸미기에 알맞은 수만큼의 재료로 다루는 단일체들의 분자적 다양성들을 통해서이다. 요약하자면, 하나는 예속집단들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주체집단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366-67)

 

-예술과 과학

학자들과 기술자들, 심지어 예술가들, 과학과 예술 자체가 아주 강력하게 기성주권들에 봉사하고 있는 세계에서 왜 예술과 과학에 호소하는가? 그것은 예술이 그 자체의 위대성, 그 자체의 천재에 도달하자마자 탈규준화와 탈토지화의 연쇄들을 창조하고 이 연쇄들이 욕망하는 기계들을 설치하고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겠다: 인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본래의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공리계들 속에 묶여 있지만, 이 공리계들은 두 극 사이에서 동요하는 주저를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극의 하나는 사회적인 큰 공리계인데 이 공리계는 시장의 요소들과 기술혁신의 영역들에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하는 것을 과학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공리계이다. 그런데, 다른 극은 분열증 경향의 극이다. 이 극의 언저리에서는 인식의 흐름들이 분열증화하고, 사회적 공리계를 가로질러서만 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 자체의 공리계들을 가로질러 지나가며, 더욱더 탈토지화하는 기호들을 낳는다. 이 기호들은 더는 형상적이지도 않고 구조화되지도 않는, 그리고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는 현상들의 놀이를 재생산하거나 생산하는 분열들-형상들이다. 이 극이 실험으로서의 과학이다. (366-71)

 

-분열분석

어떤 사회체가 주어졌을 때, 분열분석은 그 사회체가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서 어떤 자리를 남겨두는가, 욕망은 거기서 어떤 동력의 역할을 맡고 있는가,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체제를 달리하되 생산인 점에서 모든 면에서 동일한 생산인 터에, 두 가 지 체제의 생산은 거기서 어떤 형태들로 화해하고 있는가--그러므로 충만한 신체로서의 이 사회체 위에서 한 국면으로부터 다른 국면으로 옮아가는 가능성, 즉 사회적 생산의 몰적 집합들이 조직되는 국면으로부터 욕망하는 생산의 분자적 다양성들이 형성되는 덜 집합적인 다른 국면으로 옮아가는 가능성은 있는가--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이 체제를 달리하는 동일한 생산인 터에, 그러한 사회체는 욕망하는 생산이 사회적 생산을 예속시키기는 하되 파괴하지는 않는 권력의 전복을 견딜 수 있는가, 또 어느 점까지 견딜 수 있는가--주체집단들의 형성이란 것이 도대체 있는가, 또 있다면 어떻게 있는가 등을 문제 삼는다. (380)

<개념들>

1. 접속적 종합(connective synthesis), 이접적 종합(disjunctive synthesis), 통접적 종합(conjunctive synthesis)

 

이접적 종합 : 서로 관련이 없는 속성들의 <배치>

<이접적 종합> 개념과 <분열증 개념>은 존재 동사를 속성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접속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험론적 입장과 관련을 맺고 있음 (서동욱 67)

(: <하늘은 푸르다>는 존재를 그 근저에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2. (Mole) a unit of measurement used in chemistry to express amounts of a chemical substance

3. 리비도(생산 에너지) 누멘(등록 에너지), 볼룹타스(소비 에너지)

4. 공리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