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예전에 본 것은 분명한 데, 한두 장면(민재가 녹음을 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의 살인 장면) 외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민재가 녹음하는 장면에 이를 때까지, 나는 이 영화를 봤다는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망각은 비켜가기 힘든 것이다.
홍상수의 데뷔작으로 1996년에 나온 이 영화는 그의 영화로는 특이하게도 구효서의 [낯선 여름]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이 소설을 읽어 보지는 않았는데, 소설과 영화는 상당한 간극을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홍상수는 소설의 줄거리를 빌렸을 뿐 원작자의 세계관보다는, 자신이 영화를 통해 제시하고 싶었던 자기만의 색깔에 집중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홍상수의 이후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성적 욕망과 불륜 등 남녀간의 관계의 문제가 중심에 있다(앞서 한 이야기를 바꿔 말하자면 원작을 영화화하게 된 것은 자신의 관심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인 효섭(김의성)과 두 여인, 그가 사랑하는 유부녀인 보경(이응경),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민재(조은숙), 그리고 보경의 남편인 결벽증이 있는 동우(박진성)와 민재를 좋아하는 민수(손민석)가 이 영화의 중심인물인데, 민수를 제외한 네 인물의 모습이 다소 느슨한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중점적으로 부각된다. 민재에게 배신감을 느낀 민수가 효섭과 민재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마는데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해야 할 이 부분 또한 특이하게도 사건이 끝난 뒤에 한 장면으로만 제시된다.
홍상수 영화의 큰 특징은 어떻게 보면 지금껏 영화에 잘 등장하지 않았던 "찌질한" 일상적 장면들, 미세한 부분들이 우리가 흔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과 같은 비중으로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이런 생각은 강소원의 "의미 없이, 경이로운, 홍상수의 세계가 열리다"를 읽으면서 구체화되었다). 또 좀 더 나아가 본다면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도덕과 관습과 규약의 틀 때문에 언제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한 부분(혹은 표리부동하게 사회의 요구들을 교묘하게 위반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한 마디로 줄여본다면 좀 더 솔직하게 부딪힌다, 고 할까? 그럼에도 홍상수의 영화는 지리멸렬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무심한 듯이 보이지만 홍상수가 몸에 지니고 있는 '구조적 미학'의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가 언제인가는 모르겠으나 홍상수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가 되고 있었고 두 번째 작품인 [강원도의 힘](1998)은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으므로, 2000년 이전이 아닌가 한데, 그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살인의 장면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장률은 홍상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색깔은 좀 다르다. 장률은 개인이 져야할 '도덕적 책무'에 대해서 보다 엄격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창동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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