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인식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 것이 주관이다. 따라서 주관은 세계의 담당자이며, 현상하는 모든 것과 모든 객관을 관통하며 항시 그 전제가 되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항상 현존하는 것은 오직 주관에 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이 주관으로서 발견한다. 하지만 누구나 인식하는 한에서만 그러하고, 그가 인식의 대상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의 신체는 이미 객관이므로 우리는 이 입장에서 신체 자체를 표상이라 부른다. 신체는 비록 직접적인 객관이라 하더라도 객관들 중의 객관이고 객관들의 법칙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신체는 직관의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다수성을 가능케 하는 모든 인식의 형식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 그러나 인식하면서도 인식되지 않는 주관은 이들 형식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주관에는 다수성도 그 반대인 단일성도 없다. 우리는 결코 주관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식이 행해질 경우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 주관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을유. 개정증보판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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