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유럽 여러 국가나 미국,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현재 안정적인 추세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럭비공처럼 다시 확진자의 수가 증폭하지 않으라는 보장은 없다. 공교롭게도 나는 지난 삼십오 년 간 내 생활의 터전이었던 서울을 떠나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산의 중심지이자 고향인 대구에서 이 불안과 위기의 시기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내 최애 취미인 탁구를 한 동안 접어 두어야 했다.
사스든, 신종플루든, 메르스든 다른 감염병들도 우리 사회를 불안으로 몰아넣었지만 내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크게 미치진 않았다(주1). 2015년의 메르스 때에도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에게 굴복한다는 것이 싫어서, 혹은 허세 때문에 마스크를 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확실하진 않지만 메르스가 정점에 올랐을 당시 서울의 지하철에서는 반 정도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나 한다. 바꿔 말하자면 감염병의 공포는 나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지나가는 그런 것이라는 근자감이 나에겐 강했다. 그런데, 31번 확진자가 나온 다음 날(2월 19일) 친구의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는데, 객차에 탄 별로 많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피부로 느꼈다. 그럼에도 탁구를 못 치는 시간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구에서 확진자가 막 증폭하기 시작하던 2월 20일 나는 3박 4일 일정으로 그전부터 계획했던 남도 여행을 떠났다. 노환이 있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는데, 여동생이 며칠 집에 와있기로 했던 것이다. 이날 저녁 나는 여수의 한 탁구장에서 탁구를 쳤는데, 코로나19의 위협이 직접적으로 닥쳐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 사람들 또한 상당한 불안감을 드러내며 "대구에서 온 것은 아니지요?"하고 물었다. 이 때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앞에서 지하철을 타면서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아무런 증상도 없었고, 또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그 동안 가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서 못 갔던 홍도와 흑산도를 여행했다. 그리고 22일 토요일에는 광주에 가서 같은 동호회의 선배와 탁구를 몇 게임 치고 술도 마셨다. 이 약속 또한 며칠 전에 잡았던 것이고, 선배가 꺼려하면 취소할 생각이었으나 반갑게 맞아 주었기 때문에 밀고 나갔던 것이다(주2).
2월 23일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의 대구 상황은 모두가 알다시피 죽음의 공포가 공기 중에 부유하는 그런 것이었다. 안 그래도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는 어머니는 말 그대로 두문불출이었고, 외출 자제의 권고에도 갑갑함을 못 견디는 나는 점심을 먹고는 차를 몰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 산길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운동 부족을 다소나마 해소하고 탁구를 못 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다른 나라들처럼 지역 봉쇄나 이동 제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나에겐 정말 다행이었다). 이 밖에 내 전용 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파트의 탁구장에서 서브 연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확산되기 직전에 뜬금없이 마룻바닥을 까는 공사를 해서 나를 므흣하게 하더니만, 일 주일 정도 건조 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곧바로 폐쇄 조치를 취했다.
2월 29일 코로나 확진자가 909명(대구 741명)으로 정점을 찍었음에도 금단 현상이 점점 심해져 급기야는 며칠 뒤 타 지역에 있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후배는 차마 노라고는 말을 못하고 탁구장이 외부인은 받지 않는다는 말로 에둘렀다. 이 때 쯤 나는 내 출신지를 속이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도 탁구를 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타지역에 가서 탁구를 치지 않는 것이 법적으로는까지는 아닐 지라도 묵시적 의무 사항이라는 것 등을 확실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구 출신에 대한 왕따는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한 것이었다(주3). 부상이나 학업 등 개인적인 사정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탁구를 못 친 적은 있었어도,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탁구를 못 치게 된 것은 45년의 탁구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라,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얼마나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또 다른 측면에서 절감했다.
그렇게 탁구 없는 나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갔다(주4). 그리고,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강의하고 있는 [독학사 칼리지]도 개학이 2주 연기되었다. 코로나의 확산세는 정점을 지난 뒤에는 급격한 감소세로 돌아서더니 3월 10일에는 백 명 아래로 떨어졌다(주5). 이에 대구시는 '328 운동'을 벌여 3월 28일까지 확진자를 열 명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을 목표로 검사와 치료에 매진했다. 나 역시도 그 때쯤 되면 탁구를 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동호회의 3월 모임도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328 운동'이 끝나갈 무렵 이번엔 중앙 정부에서 4월 5일까지 15일 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발표했다. 탁구를 못 친 시간이 한 달을 훌쩍 넘기고 나니 '그래, 한 달 넘게 참았는데 한 주 더 못 참을까'하고 생각을 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2주 더 연장이 되었다. 온라인 개학도 한두 주 하고나면 대면 수업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는 달리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 코로나19는 이전의 감염병과는 질적으로 달랐고, 중세의 흑사병(페스트)이나 1918년 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두고 발생했던 독감처럼 정말 역대급이라는 것이 점점 더 실감이 났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 최대 발생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점점 더 방역 모범국으로 위상을 바꾸었는데, 유럽과 미국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주6). 서울에 있는 지인들은 대체로 코로나19 상황 가운데에도 외부인의 출입은 통제한 채로 기존 회원들끼리 탁구를 치고 있어서 실력 격차를 줄이려면 또 얼마나 땀을 더 흘려야 할지 그것도 미지수였다.
3월 10일에 백 명 아래로 처음 떨어진 대구의 확진자 수는 이후 백 명 아래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3월 25일에는 14명이라는 현저하게 낮은 수치를, 그리고 드디어 4월 10일에는 믿을 수 없는 수치인 0명을 기록했다. 4월 6일에 탁구장 영업을 재개한다는 문자를 받았지만, 함께 있는 어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곧바로 탁구장으로 직행하지 못했는데, 4월 10일의 수치가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이후 대구의 확진자는 2,3명 수준에 머물렀고, 중앙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2주간 연장한다고 했지만, 이러다가는 영원히 코로나19에 끌려갈 것 같은 생각도 있고 해서, 4월 13일을 디데이로 잡았다.
대구 집 부근에 있는 [GFS 탁구장]은 지난 2월 초에야 그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이 탁구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코로나19 사태로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라서 4월 13일에 다시 찾았을 때에는 마음 한 편의 두려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영업을 재개하고 한 주가 지나서인지 내가 찾은 저녁 시간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연습 상대는 앞면이 숏핌플인 셰이크 전형이었는데 그래서 포핸드를 치는 데에도 범실이 많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탁구를 칠 수 있다는 것이 어디냐, 하는 생각에 이 분과 연습을 꽤 오래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분은 4부로 초등학교 때 2년 정도 선수 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첫 날을 보내고 이틀, 삼일 정도는 탁구를 다시 칠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었다. 리시브도 잘 안 되고 공격도 범실이 많았지만. 그리고 나서 오늘까지 11일 연속으로 탁구를 쳤다. 다시 만난 연인은 여전히 약간의 즐거로움과 함께, 많은 까다로움과 전신 통증을 선사하고 있다. 이 빌어먹을 놈의 탁구는 쳐도 죽으라고 늘지는 않지만, 안 치면 준다(나이가 들 수록 이 경향은 더욱 심해져서 실력이 주는 것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관건이다). 거기다 이 탁구장엔 숏핌플과 롱핌플로 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핌플 러버에 약한 나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탁구를 떠나자니 마약 중독보다도 더 강한 인이 배겨서 어디로 갈 수도 없다. 탁구의 노예가 된 내 운명을 저주해도 소용이 없다.
주1) 우리나라의 경우 사스 2003년 감염 3 사망자 없음 / 신종플루 2009년 감염자 75만명, 사망자 270여명/ 메르스 2015년 감염자 186명 사망자 38명
주2) 지금의 시점(4월 23일)에서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나의 여행은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31번 확진자가 발생하기 전날 친구가 대전에서 모처럼 대구로 와서 거나하게 한 잔 했는데, 그 친구는 대구를 방문했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고, 4일 동안 나 대신에 어머니를 돌봤던 동생 또한 대구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수원으로 돌아간 뒤 2주일이나 재택 근무를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기 전인 초창기에는 사회 활동 등이 너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었다.
주3)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구분, 감염 지역과 비감염지역의 구분은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이 다소 과장된 측면은 있을 지라도 충분히 상징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구체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주4) 예전부터 내 로망 중의 하나였던 앞산에서 비슬산까지의 종주(10-11시간 정도 소요)를 몇 차례로 나눠서 하기도 했다. 체력적인 부담과 무엇보다도 작년 말에 대만 여행을 갔을 때 아스팔트 길을 너무 오래 걸어서 그런지, 두 시간 정도 걷고 나면 발바닥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해서 3시간이 지나면서도부터는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고통과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5) 확산세가 진정이 안 되던 시기에는 타 지역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의료체계는 붕괴의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몇몇 안타까운 사례들도 있었다.
주6) 4월 23일 현재 거의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 확진자가 발발했으며 확진자 수는 2,543,588명, 사망자는 176,596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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