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날(20160122, 금)
책 정리가 제대로 끝나지 않아 아파트는 책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상태로 난장판과 다름없었고 차에도 책이 가득 실려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난다는 기대감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집 부근에서 6시 25분 공항버스를 타 8시가 안 되어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의 도로는 이른 시각임에도 차량 통행이 꽤 많았고, 길음, 경복궁, 신촌, 세브란스 병원, 지나는 곳곳에 기억들이 묻어났다. 영국에 도착하고 나면 정말 모든 것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TV, 인터넷, 소설 등으로 간접 경험한 것일 터였다.
공항에 도착해서 셀프 체크인을 한 번 시도해 보았으나 잘 안 되었다. 여권 유효 기간이 5개월 10일 정도로 6개월이 채 남지 않아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무사히 해결이 되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오후 1시인데 8시가 안 되어 도착했으니, 출국 수속을 마친 다음 공항 내 식당으로 가서 비싼 아침을 먹고,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공항 내에서는 따로 비밀번호 없이 와이파이가 터진다는 걸 알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이것저것 검색을 했다. 일찍 일어난 피로감이 갑자기 몰려왔다.
'3시간 반 정도 후면 한국을 떠난다. 이번 여행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확실치는 않으나 내 삶의 답답함을 뚫고 도약하는 한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혼자 떠나는 외국 여행. 12박 13일 정도가 될 것인데, 될 수 있는 대로 영국을 많이 느끼고 논문의 영감을 얻고 오도록 하자. Conrad Society와 접촉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 (당시 노트북에 적어둔 것)
좌석번호 30A. 일찍 와서 창가 좌석을 잡을 수 있었기에 바깥 풍경을 보는가 했으나, 날개 바로 옆이라 날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 비행기가 순항 고도에 오르자 보이는 건 하늘과 구름뿐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두 여성과 대화라도 좀 하면서 왔으면 덜 심심했을 텐데, 나도 말을 꺼내기가 어색했고 그녀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열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비행. 지금까지 살면서 단일 경로로는 제일 긴 시간이었다. 1988년이었던가? 고등학교 반창과 대구에서 강릉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는데 7시간 넘게 걸린 기억이 난다. 하긴 언젠가 명절 때 고속버스를 탔다가 차량 정체로 12시간 가까이 탄 적도 있었구나. 나중에는 정말 갑갑해서 미칠 것만 같았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잠이 들고 말았지. 그러고 보니 1991년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갔을 때도 10시간 가까이 걸렸구나.
가도가도 비행은 끝나지 않고 낮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과 영국의 시차가 9시간이나 되니, 졸지에 하루가 33시간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영화를 세 편이나 보았다. [메이즈 러너 - 스코치 트라이얼], [플래툰], 그리고 [러브 스토리].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 '사랑한다면 결코 미안하단 말 따윈 할 필요가 없어'(Love means having never to say I'm sorry).
런던으로 가는 항로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중국과 러시아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운행 거리는 9천 킬로미터(정확히는 8854킬로미터)에 육박했다. 내 좌석 앞 모니터에서는 항로, 전방, 하방의 모습까지도 모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가끔씩 확인해 보았다. 러시아를 지날 때에는 도로가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얼음과 눈이 덮힌 동토였다. 서비스로 칫솔, 치약은 물론 기내 슬리퍼까지 주었다. 하지만 점심으로 먹은 '소고기 덮밥'과 저녁의 '닭고기 파스타'는 한 끼를 건넌다는 것 외에 별 맛은 없었다.
하늘에서 본 영국의 첫 인상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다만 겨울인데도 푸른 풀밭이 여기저기 보이는 것이 특이했다. 그리고 템즈 강으로 추정되는 구비치는 강.
오후 4시(한국 시각 23일 오전 1시)에 드디어 히스로(Heathrow) 공항에 착륙했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빠른 12시간만의 도착이었다. 활주로만 비었다면 10분 정도 더 빨리 착륙할 수도 있었다.
- 이륙 (수첩에 적어둔 글)
비행기가 요이땅한 아이처럼
활주로를 전력 질주하다가
어느 순간, [백 투 더 퓨쳐]에서
브라운 박사가 88마일에 이른 순간
과거로 혹은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고 한 것처럼
땅을 버리고 허공을 향해 솟구칠 때의 그 묘한 느낌,
자신의 거대한 몸뚱이를 끝없이 끌어당기는 어머니 대지를 뿌리치고
비행기는 허공을 도로 삼아 상승한다
종찬이의 말처럼 허공을 날려는 비행기의 의지가 없다면
비행기는 허공을 잠시도 견디지 못하리라
* 인터넷에 보면 영국 여행의 경우 여권 잔여 유효기간이 6개월 이상이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당시에 이 부분을 알아보았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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