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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박경리 -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1962)(2013, 2017)

by 길철현 2023. 4. 2.

[책을 읽고]

대하 소설 [토지]로 우리 현대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박경리의 작품을 나는 거의 읽지 않았다(오래 전이라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일인칭 단편 사소설 한 편이 유일하게 떠오른다). [토지]의 그 장대한 분량 앞에서 망설였거나, 나이가 좀 들어서는 우리 소설이 방법론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고 깊이 없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초 정신적으로 우울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유튜브만 시청하다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흥미롭게 읽고 나서, 서점에 다시 들렀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와 집어 들었다(사라마구의 책과 박경리의 이 책도 서울 집 어딘가에 뒹굴고 있지만 대구에 머물고 있어서 부득이 다시 구입했다). 
 
이 책의 제목만을 보고 오랜 시간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집 안 간 쳐녀들의 로맨스를 떠올리곤 했으나 막상 책을 펼치고 보니 현대적인 약국과는 상관도 없고 내용 또한 잔혹극 혹은 참혹극에 가까웠다. 바꿔 말해 이 작품이 1962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내면 심리 묘사보다는 고소설, 신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살인이나 죽음, 사고 등의 극단적인 사건들이 더욱 부각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섯 딸을 가진 한 집안의 이야기라는 소재 측면의 유사성이 저절로 그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두 작품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희극과 비극(잔혹극)이라는 대척점에 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쉽지 않으나(그럼에도 이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듯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보다 150년 전에 발표된 [오만과 편견](1813)이 나의 감수성에 더 잘 와닿는다. 이 점은 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인데, 우리 사회가 현대로 들면서 얼마나 급격하게 서구화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이 부분은 내가 어릴 적부터 서양 문학의 세례를 많이 받았고,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작품은 그 내용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살인과 자살, 죽음 등이 우선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김약국(성수)의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온 어머니의 옛애인을 살해하고, 어머니 또한 비상을 먹고 자살하는 것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작품 전체가 사랑이 없는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되는 딸들의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시대 말기와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시기, 그러니까 우리 민족이 외세와 내부적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저자의 고향이자 당시 남해안의 시골 지역인 통영이라는 지방색을 잘 살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태어난 박경리의 간략한 전기를 보니 그녀의 부모 또한 당시의 풍습에 따라 정략 결혼을 했고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 아버지는 새장가를 들고 그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녀의 불우한 유년 시절의 체험이 그녀의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큰 딸 용숙, 얼굴은 예쁘지만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고 성적으로도 문란하여(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머슴과 관계를 맺다가 급기야는 아편쟁이이자 성적 불구자에게로 시집을 가게 되고, 종국에는 미쳐버리는 셋째 용란, 역시나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가 사고로 죽게되는 넷째 용옥. 이들은 격세유전으로 조부모의 불행한 운명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기 하지만 이 작품이 완전한 참혹극이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집안의 몰락과 실연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둘째 용빈 때문이다(이 용빈은 여러모로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비교된다). 신교육을 받았고 교사로서 경제적인 독립도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참혹한 현실 속의 한 줄기 희망이다. 그녀와 마찬가지의 비극을 겪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청년 강극과의 관계는 그 앞날이 순탄하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사랑을 기반으로 한 남녀 관계를 기대해 보게 한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더 나아가 막내인 용혜의 앞날에도 더 이상의 비극은 없기를 기대해 보게 된다.
 
서양 문학에서 노블(Novel, 근대장편소설)이라고 할 때 중요한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내면 심리묘사가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과 자살과 광기, 사고로 인한 죽음 등으로 점철된 이 작품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시대적 불행과 지방색을 잘 살려낸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박경리의 정신 세계와 그녀의 작품 전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질적이겠지만 제인 오스틴과 박경리를 비교해보는 작업도 흥미로울 듯하다. 
 
 

[발췌]
- 비상 먹은 자손은 지리지 않는다.  (지리다 - 번성하다) 
(71) 성수가 서른둘 되는 해, 그러니까 1910년 8월 29일에 치욕적인 한일합방 조약이 발표되었다. 
(85) 큰딸 용숙은 열일곱 때 출가를 시켰으나 과부가 되었고 지금 나이가 스물네 살이다. 둘째가 용빈이 셋째가 용란이다. 그는 열아홉이며, 그 다음은 용옥이, 막내가 열두 살짜리 용혜다. 
(86) 한실댁은 그 많은 딸들을 하늘만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딸을 기를 때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갓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 자식과 바꿀까 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짝 달아 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같이 어여쁘니 으례 남들이 다 시중 들 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 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는 것이다. 
(항아 - 달나라 선녀)
(208) 정윤(태윤의 형) - 언제나 강한 놈은 약한 놈을 먹었다. 그것은 생물의 질서인 동시에 사회적 질서다. 실상 애국심이란 것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 하나의 로맨티시즘이지. 의식지 못하는 위선이지.
(298) 한실댁 - 니(용란)가 얼마나 복이 많으믄 그런 신랑을 만났겄노. 내가 얼마나 복이 많으믄 니 같은 딸을 두었겄노. 죽으나 사나 매인 대로 살아야제. 
(357) "중국에는 우리 정부도 있고******." (용빈이 윤씨(큰아버지 큰어머니에게))
"그라믄 그 자식 중국으로 갔단 말가?" (큰아버지가 용빈에게) [태윤의 이야기]
(410) 강극이 용빈에게 - 저의 아버지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우국지사도 아니었어요. 다만 부자였지요. 그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타살된 것예요. 머슴이 시체를 말에 태워가지고 왔더군요. . . .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게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 누이가 지금 왜놈하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용빈 씨 혼자만이 비극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니죠. 
 
[김치수 - 비극의 미학과 개인의 한]
422) 박경리의 소설에서 . . . 그 길이가 길어짐에 따라 나타나고 있는 가장 단적인 변화는 그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개인의 불행으로부터 출발하여 한 가족의 불행으로 확대되고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불행에 이른다는 것이다. 
424) 개인의 운명의 비극성이라든가 새로운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갈등이라든가 사회변동에 따른 경제적 지배의 새로운 양상 등 [토지]에서 중심 테마가 된 문제들이 상당 부분 그 이전의 장편소설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28) 주로 여자들의 운명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박경리의 소설은 한결같은 사랑의 실패로 끝나는 감상적인 실연담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박경리 소설의 특색이면서 힘이 되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들이 헛된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삶의 현장을 제공하면서 사회의 제도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