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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정신분석

최병건 - 설리번 강의에 대한 몇 가지 생각 [퍼온 글]

by 길철현 2016. 9. 14.

다들, 오늘 강의가 어떠셨나요?


개인적으로 저는 무척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Sullivan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통합할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기도 했구요.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저에게 정신분석을 처음 가르쳐 주신 분이 Sullivan을 공부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분석이라는 것에 대한 제 출발점이 Sullivan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정신분석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이론적으로는 Sullivan의 이론과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할수록 새삼 느끼게 되는 건,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는 겁니다.   (영양가 없는 공익 광고 문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그 태도에 관한 한 Sullivan과 여타의 분석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이 범용 선생님의 첫 질문, “많은 이론을 배워보니 뭔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이 드느냐?”는 질문도 그런 맥락이었을 겁니다.



혹시 Sullivan의 이론이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런 면도 조금 있구요.   제가 지난주에 Kohut에 대해 퍼부었던^^ 비판의 상당 부분이 Sullivan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석에 대한 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설익은 이론으로 아무렇게나 사람의 마음을 재단하거나 소위 ‘해석’을 날려버리지 않고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그런 것들이 정신분석의 핵심이죠.




이 범용 선생님이 오늘 저를 Freudian이라 하셨지만, 저는 제가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저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정체불명입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Freudian이라 한들, 정신분석이라는 걸 아무렇게나 배워서 아무렇게나 적용하는 Freudian들 보다는 진지한 Sullivanian들과 저는 훨씬 잘 통하고 많은 부분을 공유합니다.


정신분석의 기본 전제, 즉 무의식이라는 게 있다는 것과 정신 결정론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공유하는 한 정신분석 이론이라 부를 수 있고, 자유 연상과 통찰, 그리고 관계라는 임상적인 개념을 공유하는 한, 이론적으로 많이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치료자라도 얼마든지 서로 이해하고 소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태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런 치료자들과는 아무리 이론적 배경이 같아도 이해와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이론을 모르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죠.   그걸 모르고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   그게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신분석 공부를 하는 사람들 중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론에 관한 한, 용어나 개념의 사용에 있어 상당히 까탈스러운 편이죠.


그런데,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Sullivanian이신 제 스승님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이론을 멋대로 이해하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지 말라.   설익은 해석은 독이다.”라는 것이었죠.   정확히 이렇게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저희를 가르치시는 태도로 온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Sullivanian이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보다는, 이론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쨌든.......


오늘 답답함을 느끼셨을 분들을 위해 일종의 A/S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오늘 강의 내용을 그 동안 우리가 공부해온 개념들과 대비시켜 보겠습니다.




일단, 가장 큰 줄거리.   Sullivan의 인간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의 인간은 욕망의 인간이죠.   인간은 욕망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음이라는 게 생깁니다.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에 방어 기제라는 것이 만들어지죠.

그리고, 호시탐탐 욕망을 실현할 기회를 엿보기 때문에 스스로를 ‘나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생기죠.   Kohut에 대해 얘기할 때, 프로이트는 guilty man, Kohut은 tragic man이라 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Anxiety는 자신의 욕망을 들킬 때 처벌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한 마디로, 나쁜 짓 하려다가 들켰을 때 혼날 것을 겁내는 거죠.   Castration Anxiety로 대표되는, 그런 불안입니다.




이에 반해 Klein과 Sullivan의 인간관은 훨씬 절박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의 과제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죠.

따라서, 이 두 사람이 말하는 Anxiety는 프로이트의 불안과는 많이 다른 문제입니다.   나쁜 짓 하려다 들켰을 때 혼나는 걸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 아니면 죽어 없어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Klein과 Sullivan이 갈라지는 지점은 이 불안이 왜 생기느냐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Klein은 아이가 가지고 태어나는 공격적인 내용의 phantasy들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고 하죠.   내가 먼저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을 갖는다는 겁니다.


반면에, Sullivan의 아기는 innocent하고 helpless한 아기입니다.   세상이 뭔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기는 전혀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기가 갖고 태어나는 거라고는, 오늘 이 범용 선생님이 말씀하신, ‘엄마의 마음을 알아채는 능력’, 즉 공감할 수 있는 능력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기쁘고 기꺼운 마음으로 아이의 need for satisfaction을 채워주지 못 하면 아이는 need for security를 갖게 되고, 그것이 극심한 불안, 사느냐 죽느냐의 불안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Sullivan의 이론은, 세상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무서운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Klein의 이론과 일정한 부분을 공유하지만,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caretaker의 보살핌이라는 관점에서는 Kohut의 이론과 더불어 deficit theory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Deficit Theory라는 건, 프로이트나 클라인의 이론을 Drive Theory라고 부를 때 대조가 되는 관점이죠.)

 

이렇게, 많은 정신분석 이론들은 어떤 지점에서 어떤 이론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지점에서는 또 다른 이론과 만났다가 헤어지고를 반복합니다.

 

 


어쨌든, 그런 불안을 처리(극복이 아니라)하기 위해 아이의 마음에는 security operation이라는 게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건, ‘우리 용어’로 얘기하자면 defense mechanism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security operation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self system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우리 용어로 얘기하자면, character 또는 personality, Kohut의 용어로 얘기하자면 self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security operation과 self system의 결과, 아이는 세상을 제 멋 대로 해석하기 시작한다고 했고,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parataxic distortion이라 했습니다.   이건, 우리 용어로 바꾸자면, 당연히 psychic reality에 해당되는 개념이겠죠.



이렇게 만들어진 parataxic distortion, 즉 현실의 왜곡으로부터 아이를 끄집어내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고, 어른이 된 다음에는 치료자의 역할입니다.


어떻게?   Sullivan의 개념으로는 consensual validation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아이가 맞게 인식하는 것은 인정해주고 왜곡해서 인식하는 것은 수정해준다는 거죠.


이 과정을 서로 emotion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Klein의 Projective Identification이나 Bion의 Containment와 그리 다르지 않은 관점이고, Kohut의 Narcissism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mirroring과 비슷한 얘기가 될 겁니다.




하나만 더.


오늘 이 범용 선생님께서 Interpersonal Theory에서는 해석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고 하셨지만, 그 말에는 저는 살짝^^ 반대합니다.


이 범용 선생님과 저의 견해 차이는, 해석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이라는 걸 꼭 무의식 속의 대단한 걸 분석가가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Interpersonal Theory에서는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환자의 통찰을 돕기 위한 하나하나의 과정, 즉 clarification이나 confrontation과 딱히 구분될 수 없는 그런 넓은 의미의 해석(그리고, 이게 해석이라는 것의 훨씬 중요한 개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을 의미한다면, Sullivanian도 어느 이론 못지 않게 해석이 중요하다고 할 겁니다.




결국, 오늘 무척 다른 얘기를 들으셨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임상적으로는 여태껏 우리가 해왔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분석 이론과 interpersonal theory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오늘 이 범용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분석을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구조(structure) 내지는 대상(object)이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있다면 그게 얼마만큼 중요하냐에 대한 견해차에 있습니다.


Interpersonal Theory의 주장은,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이 inter---personal, 즉 사람 사이間의 분석인 것입니다.   Intra---personal 즉, 사람 안內의 분석이 아니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interpersonal theory 쪽에서는 사람 마음 안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아닐 겁니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security operation도 있고 self system도 있으니까요.


차이는,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있습니다.   있다, 없다 보다는요.   Sullivan이라고, 식욕이나 성욕이라는 본능을 부정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이상, 오늘 강의에 대한 제 주석이었습니다.

제 주석이 더 어렵죠? ^^


궁금한 게 있으시면 다음 주 수업 시간에 질문해 주세요.


사실, 이 글을 다 이해하신다면, 하산하셔도 됩니다.   (옆 산에 하나 차리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