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노트에 쓴 것을 옮겨 적음]
우연한 일치겠지만 최근에 본 두 편의 영화, "뽀네뜨"와 "편지," 그리고 신경숙의 이 작품, 모두가 죽음과 살아남은 자가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을 다룬 것이다. 물론 '죽음'은 문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의 가장 큰 테마이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읽어보고 싶은 작품 중의 하나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이고 보면, '죽음'이란 테마가 현재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때문에 이런 우연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겠다.
(요 근래에 들어서는 우리 문학에도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제 문학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의 중심에 서 있지 않다. 영상 매체가 훨씬 더 폭넓고, 풍부하고, 또 짧은 시간에 전달해줄 수 있는 것을, 누가 굳이 기를 쓰고 문학 작품을 읽겠는가? 물론 문학은 죽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일반 독자와의 괴리, 작가의 소외가 아무리 심해진다 해도. 그러나, 문학은 새로운 시도를 원한다. 북치고 장구치는, 그 정해진 놀음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이제는 식상해져 버린 때가 된 것 같다. 북을 부수고, 장구도 파괴하는 실험 정신만이 문학에 그나마 활력을 부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신경숙은 첫 작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강렬해서 눈여겨 보았다. 6*25의 비극을 전후세대가 반추해보는(?) 형식을 취한 "성년 성월 성시"는 뭔가 뭉클하는 게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풍금이 있던 자리](문지)에 실린 작품들에서는, 그 당시 나의 기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그 독백체의 문체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느낌도 심드렁해졌다. (이후엔 문학 전반, 삶 전체가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죽음'을 다룬 작품으로는 릴케의 [말테의 수기]가 기억에 남는다. 내용은 유령이 나오는 장면밖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 분위기(릴케는 무어라고 말했던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문을 열어보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랑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했던가?)가 아직도 나를 쫓는다. 동생의 죽음과 (아니 자살과), 그 죽음 뒤에 숨은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을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잘 짜넣은 이 소설은 그래도 송기원의 "아름다운 얼굴"을 읽었을 때의 실망감에서는 나를 건져내어 준다. 그럼에도 뭔가 새로움, 새로움이 우리 문학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꾸만 강요한다. (아 내 삶이 초라하듯, 내 글도 너무나 헝클어져 있다. 산다는 것은 내 삶의 초라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의문스러운 동생의 자살이 삼 년이나 지난 다음에야 그 베일이 벗겨진다는 착상은 어딘지 좀 무리가 있긴 하지만 신경숙은 그래도 그 무리스러움을 그녀의 침착하고 차분한 어저 속에 설득력있게 해명한다. 삶은 견디어 나가야 할 그 무엇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하기 때문에 때로는 차갑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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