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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최승자

최승자 - 무제 2

by 길철현 2023. 7. 9.

1

간밤 소리 없이 이슬 내린 뒤

현관 문이 가만히 울고

죽음은 우유 배달부의 길을 타고 온다.

누군가의 검은 눈빛,

늘어진 검은 손이

문고리를 부여잡고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타이탄 트럭처럼 나를 덮치고

들렸다,

캄캄하게 낙락장송 쓰러지는 소리,

캄캄하게 한 시대가 길게 뻗는 소리.

2

1983년, 운명의 맞물림이 풀어지는 소리,

무한 궤도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작은 객차 하나.

1983년, 하나님은 경솔했고

나는 부실했다.

오 이 모든 진땀나는 공포! 공포!

이 세계를, 이 세계의 맨살의 공포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밀려온다,

이 세계는,

내 눈알의 깊은 망막을 향해

수십억의 군화처럼 행군해 온다.

눈 감아요, 이제 곧 무서운 시간이 와요.

창자나 골수 같은 건 모두 쏟아 버려요.

토해 버려요, 한 시대의 썩은 음식물들을,

현실의 잠, 잠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 깊이깊이 가라앉아요.

(고요히 한 세월의 밑바닥을 기어가며

나는 다족류의 벌레로 변해 갔다.)

3

이 시대 죽음의 잔은

이미 채워졌으니

네 몫은 필요치 않다.

그러니 가라!

어서 되돌아가라!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

너희의 거울 속을 들여다보라.

거기, 이십 세기의 치욕인 내가

너희에게 은은한 치욕의 미소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만장하신 여러분 나를 죽이고 싶어 환장하신 여러분

오늘 내가 죽는 쇼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십년 후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염통을 달고

이 장소로 나와 주십시요.

4

가을이 첫 국화송이를 맺을 때

어머니 한평생 미뤄 오던

한숨 피워 올리시고

표표히, 표표히 흩어지는 달무리.

살아 있는 자들은 그래도 하루의 양식을 즐길 것이며

살아 행복한 자들은 두번째 아이를 만들리니

설명할 수 없어 이 세계는 눕고

설명할 수 없어 이 세계의 길은 허공에 뜨고

한 체험의 파도의 깊이를 타고

한 채의 집이 금이 가

달빛만 받아도 기우뚱거리고,

들리누나, 오밤중에 웬 거인이

온 세상의 교교하게 오줌 누는 소리.

(담 밖에서 나를 엿보는 자 있으니

필시 나의 다른 마음일지라*.)

*이것은 나의 일년 신수풀이 중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5

어머니가 걸어가신다, 내 머릿속에서.

세상 한 켠을 고즈넉이 울리며

어머니는 걸어가신다, 자꾸만 지구 반대편으로.

오래 걷고 오래 수고하며

해왕성을 지나 명왕성을 지나

쉬임 없이 내 꿈속을 걸어

마침내 어느 아침, 어머니는

내 문간에 당도하시리라.

그리고 이제 빛나지 않는 나날의 무덤 속에서

그러나 가능한 한 빛을 향해

한 아이가 태어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미명의 회색 창가에서.

문 밖에선 새벽 산길을 돌아온

그와 그의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멀리, 갇힌 수평선의 벽을 깨드리며

피 묻은 갈매기 한 마리가 탈출한다.

[출처] 최승자, 무제 2|작성자 Liv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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