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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