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치매환자 돌보기

by 길철현 2023. 9. 12.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한국시 및 감상 > 김광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규 - 춘추(春秋)  (0) 2023.09.12
김광규 - 안개의 나라  (0) 2023.09.12
김광규 - 책의 용도  (0) 2023.09.12
김광규 - 그 짧은 글  (0) 2023.08.29
김광규 - 시인이 살던 동네  (0) 2023.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