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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책의 용도

by 길철현 2023. 9. 12.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딤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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