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딤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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