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열쇠, 산처럼(041203)
*철학과 언어
*철학의 근본적 의도는 모든 것의 근본적이며 총체적 투명성 즉 가장 확실한 진리추구에 있다. 철학의 본질은 모든 것에 대한 경험, 신념, 주장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적 사유’이다. 철학에서 반성적 사유의 대상은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한다. 모든 활동이 다같이 일종의 반성적 사유를 동반하지만 자기 자신까지를 그 속에 포함하는 활동은 철학뿐이다. 가령 과학이나 예술이 “과학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순간 과학과 예술은 철학으로 변신한다. (18)
*지식과 신앙
*과학의 놀라운 발달은 신앙*믿음의 인식론에 전제된 초월적 존재와 그 속성에 대한 종교적 신념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쪽으로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지는 것 같고, 놀랍게 정밀해진 철학적 사유는 신앙에 근거한 믿음이 ‘앎’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차츰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49)
*신과 신들
*중동에 살던 유대민족이 유일신, 하느님만의 개념을 생각하기 전에 인류는 한결같이 다신교도였다. 유대인의 이같은 ‘유일신’ 개념의 발명은 위대한 이론적 도약이었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요, 케플러 등의 근대 물리학 이론들을 통일하여 물리학을 창안한 뉴턴의 물리학적 이론의 도약에 비교할 수 있다. (59)
*실재론, 개념론, 유명론
*유명론에 의하면, 보통명사 가령 ‘인간’이라는 낱말은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인 이데아를 지칭하지 않음은 물론, 개념론과도 달리 인간의 정신이 구성한 지적 도구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낱말은 서로 동일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유사성이 있는 서로 다른 개별적 존재들을 대충 한데 묶어놓기 위해 어떤 특정한 언어적 유통의 편의상 붙여놓은 꼬리표에 지나지 않다. (83)
*존재차원과 의미차원
*형이상학적 일원론이 틀린 것으로 보이는 것은 우주전체를 오로지 의미론적 관점에서 인식론적 양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오류라는 주장은 동일한 우주전체를 오직 존재론적 차원에서 생각한 데 근거한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몸과 마음, 자연과 인간, 우주와 인식의 단계는 단절적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인식론적으로 볼 때 그것들의 관계는 연속적이 아니라 단절적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일원론적 형이상학이 맞고 이원론적 형이상학은 틀렸으며, 인식론적*의미론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정반대이다. (89)
*애니미즘과 유물론
*과학은 애니미즘을 일종의 원시적 인식 즉 미신으로 생각한다. 3세기 전 데카르트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 즉 동물까지를 포함한 자연은 물질의 기계적 작동으로 보았고,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은 모든 물질, 모든 생물체, 모든 동물만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 확신해왔던 인간의 모든 속성과 행위도 궁극적으로는 물리적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쪽으로 이론을 몰아가고 있다. 즉 모든 것은 물질이라는 단 한 가지로 환원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은 아무 목적도 없이 작동하며 아무런 초월적 즉 형이상학적 의미도 없이 그냥 그렇게 생겨나있다는 것이다. (99)
*도통
*구원이 서구문화권의 중심 개념이고, 해탈이 인도문화권의 중심 개념이라면, 도통은 중국문화권의 중심 개념이며, 그것들은 각기 문화권의 최고 이상을 표상한다. 구원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틀에서만, 해탈이 힌두교*불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도통은 도교*유교적 세계관의 틀에서만 그 뜻이 분명해진다. (117)
*진리
*진리는 (그러한) 존재 혹은 사실들을 서술하는 문장 즉 명제에 붙여진 언어평가적 말이다. 그래서 ‘진리’라는 말은 언어에만 적용되는 메타-언어이다. (124)
*객관성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상대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그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는 풀린다. 진리와 객관성은 현재까지의 제한된 경험과 사유의 닫힌 틀 안에서 본 잠정적 신념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무한히 확대된 경험과 사유의 열린 틀에 비추어 보다 합리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수정하여 개선될 수 있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129)
*경험주의, 합리주의, 선험주의
*버클리, 로크, 흄이 경험주의를 주장한 데 반해서, 유럽대륙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가 합리주의를 주장했고, 18세기 독일의 칸트가 선험주의를 주장함으로써 그들 간의 갈등을 풀고자 했다. (135)
*중동적 세계관--유대*기독 및 이슬람교
*중동 지역의 종교적 세계관의 특징은 유일신을 전제하고, 그러한 신에 의한 세계의 창조와 관리 및 초월적 세계에서의 영혼의 생존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극히 의인적이고 애니미즘적 세계관이며, 이런 측면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원자생화학자 자크 모노의 말대로라면 세계의 어느 세계관보다도 가장 원시적이라고 볼 수 있다. (170)
*목적론과 기계론
*어떤 대상의 행동이나 운동은 기계론적 인과법칙에 비추어서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대상의 행동이나 운동은 목적론적 원칙에 비추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생명공학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시켜 목적론적이 아니라 기계론적으로 통일해서 단 하나의 우주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강하게 시하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받아들인다면 목적론적 설명은 물활론적 즉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193)
*현상학
*후설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경우에만 앎이 있고, 그러한 앎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여 구체적 의식대상으로서의 ‘현상(phenomenon)’에 밀착해 본질 직관의 인식주체로서 노에시즈(noesis)에 의존하여 대상의 본질로서의 노에마(noema)를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을 면밀하게 전개했다. 후설의 구호는 “사물 자체로 돌아가자!”였다. 그것은 곧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경험의 대상으로 눈앞에 있는 대상 즉 현상을 냉철히 관찰, 서술,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230)
*해석학과 구조주의
*현상학과 해석학의 공통점은 모든 인식이 궁극적으로는 ‘의미’의 파악에 있고, 의미의 파악이 궁극적으로는 인식주체와 독립된 인식대상의 양적으로 계량화하고 측정될 수 있는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주체의 주관성 즉 관념성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있다. (235)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오늘날의 문화적*정신적*철학적 시대의식을 알려주는 개념이며, 그것은 또한 예로부터 모든 종류의 서구사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대상의 지각, 사유의 투명성은 단 하나도 없고,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를 극한까지 몰고 갈 때 모든 해석의 의미, 모든 주장은 필연적으로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미결정적이고,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차이뿐이며, 진리는 복수적이고 상대적이라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만난다. (240)
*패러다임
*그[쿤]에 의하면 과학의 발달은 주어진 어떤 현상을 보는 종래의 시각, 관점, 틀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각, 관점, 틀을 부단히 마련한 과정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쿤의 위와 같은 과학발달의 본질 즉 패러다임의 전화, 더 근본적으로는 가장 객관적인 지식형태인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핵을 구성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자연과학이라는 특수한 학문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의 지식,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문제를 보고 해결하는 방법에도 한결같이 해당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이제는 언어학이나 자연과학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모든 분야, 모든 맥락에서 ‘관점의 틀’, ‘인식의 틀’, ‘사고의 모델’, ‘행위의 범례’ 등의 의미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250)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이라는 뜻으로서의 인생의 의미는 존재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이의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죽는 날까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신나고 행복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모든 고민과 기쁨 그리고 모든 물음과 대답에 관해서 초연하게 해준다. (275)
*열반
*불교의 열반은 힌두교의 해탈과 상통한다. 해탈과 열반은 동전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삶에 수반되는 고통의 궁극적 해결을 절대적 인격신의 기적적 구원에 의존하여 타율적으로 밖에서 찾는 데 반해서 힌두교와 불교는 똑같은 문제의 해결방법을 해탈과 열반이라는 지적 개명에 의해서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내부 즉 마음속에서 찾는다. (300)
*인, 자비, 사랑
*유교의 ‘인’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남에 대해 갖는 따뜻한 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불교의 ‘자비’는 인간만이 아니라 어떠한 중생도 피할 수 없는 생존의 고통과 딱한 사정에 대한 감정유입을 통한 공감대에 바탕을 두고 나와 다른 모든 생명체를 배려할 수 있는 따뜻한 심성에 뿌리를 박은 도덕적 가치관이다.
또한 기독교의 ‘사랑’은 나의 상대방 즉 타자로 존재하는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종교적*형이상학적 존엄성의 인식을 전제로 그 타자를 내가 나를 존중하듯이 존중하여 그를 최대한 배려하고 아끼는 태도와 행위를 뜻한다. (305)
*자유, 평등, 박애
*자유를 영어로 freedom 혹은 liberty라고 한다. 전자의 경우 자유라는 개념은 결정론이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자유의지의 뜻을 갖고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사용되지만, 후자의 경우 그것은 정치적*사회적 즉 문화적인 억압과 대립해서 그러한 것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여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306)
*우리가 해야 할 환경운동은 인간을 우선적으로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다른 동식물 즉 생태계 전체의 환경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함은 이성이 인간에게 지시하는 도덕적 의무이다. 환경 문제는 인간에게만 닥친 당장의 생존과 번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존속과 뗄 수 없는 문제이다.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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