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으로/박이문

박이문 - 자비의 윤리학 (철학과 현실사)

by 길철현 2016. 9. 20.

*자비의 윤리학, 철학과현실사, 90

 

*자비의 윤리학

*윤리(ethics)는 희랍어인 에토스(ethos)에서 유래되고, 도덕(morality)은 라틴어인 모레스(mores)에서 그 어원을 찾는다. 희랍어 에토스는 원래 한 사람, 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 혹은 욕구를 지칭한다. 이와 반대로 라틴어 모레스는 행동에 대한 규율을 가리킨다. 도덕으로서의 규율은 한 사람, 한 사회의 세계,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나 성격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지만 윤리로서의 태도나 성격은 한 사람, 한 사회의 도덕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윤리라는 개념이 도덕이라는 개념을 포괄하지만 도덕이라는 개념은 윤리라는 개념의 한 측면만을 뜻한다. (10-11)

 

*1, 윤리적 가치의 객관성

*윤리적 가치는. . . 인격으로서의 인간, 인격으로서의 그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 인격으로서의 한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의 한 행위가 우리의 이상적 인격에 비추어볼 때 그 이상에 가까운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평가될 때 비로소 윤리적 관점이 생기고 그에 따른 윤리적 가치 평가가 생긴다. 윤리성은 다름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격적 관점을 의미함에 지나지 않고, 윤리적 가치관은 인격으로서의 인간, 그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치를 뜻한다. (18)

*어떤 도덕적 행위는 그 자체가 옳고 그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윤리적으로 옳은 삶 혹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는 그 자체로서 옳은 것이며 아니면 그 자체로서 틀린 것이고, 옳고 그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같이 볼 때 옳은 삶을 산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옳은 삶에 맞추어 산다는 것이며, 옳은 행위는 객관적으로 옳은 행위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윤리적 가치나 도덕적 행위의 옳고 그름은 궁극적으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도 상대적일 수 없고 객관적인 것, 아니 절대적인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나에게 있어서 어떤 삶은 절대적으로 보람있는 삶이거나 아니면 절대적으로 보람없는 삶이며, 나의 한 행위는 절대적으로 옳은 행위거나 아니면 절대적으로 그릇된 행위이다. (35-6)

 

*2, 윤리적 선택

*그 근거가 절대적일 수 없는 이상 모든 인식 즉 앎은 불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리라든가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은 필연적으로 선택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떤 믿음은 딴 믿음보다 근거가 더 있고, 어떤 주장은 딴 주장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인식의 근거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서로 다른 믿음이나 주장의 근거가 똑같은 무게를 갖고 있지는 않으며, 인식이 일종의 선택이라고 해도 어떤 선택은 딴 선택보다 더 많은 타당성, 더 투명한 합리성을 갖게 될 수 있다. (58)

 

*3, 윤리적 삶의 당위성

*‘왜 나는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도덕적인 입장을 취하며 살 필연적인 이유에 대한 물음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나는 짐승처럼 살 수도 있다면, 내가 꼭 사람답게 살아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물음이다. 비록 내가 본능적으로, 또 성격상 윤리적 규범에 따라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행복을 가져온다고 해도 위와 같은 물음은 역시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내가 윤리적으로 살기를 원하고 그 결과로서 행복을 느낀다 해도 그러한 사실은 우연적인 결과에 불과할 뿐으로 아무런 필연성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윤리적 관점을 택하는 행위의 합리성에 있다. (84-5)

*만일 나는 왜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할 때의 라는 정의가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이 물음은 앞에서 든 예들과 똑같은 논리적 구조를 가진 것이며 따라서 분석적으로 내재적인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문법적으로 보아 의 개념 속에는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의 진술은 동물은 움직인다라는 진술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후자의 진술에서 동물이라는 개념 속에는 분명히 움직인다는 뜻이 포함됐지만 전자의 진술에서는 라는 개념 속에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지 않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비록 문법적으로는 분명히 라는 개념에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논리적으로도 그러한가? 다시 말해서 동물은 움직인다라는 진술과 나는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진술이 문법 구조상 엄연히 다르다고 해서 논리적 구조로 볼 때도 다르다고 할 것인가?

위의 진술에서 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며,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무슨 뜻을 갖고 있는가를 분석해보자. 우선 라는 개념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여기서 라는 낱말은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화자를 지칭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화자는 반드시 동일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 일반을 가리킨다. 즉 여기서 는 한 인간으로서의 하나의 예가 된다. 따라서 나는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진술은 인간은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말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개념은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언뜻 보아 그렇지 않다. 그러나 좀 깊이 검토해보자. 물론 인간이라는 개념은 동물로서의 한 종류를 지칭한다. 동물학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는 특수한 성질에 의해서 인간이라는 개념은 정의될 수 있다. ‘인간은 또한 사회학 또는 심리학적으로도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차원을 간과해서 인간은 사회학적으로 또는 심리학적으로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은 생물학에서, 동물학에서, 심리학에서 그리고 사회학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을 보는 관점, 각도, 측면에 따라 각기 다른 을 지칭한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할 때의 인간은 생물학적인 혹은 동물학적인 혹은 심리학적인 혹은 사회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칭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말이 위와 같이 해석될 때, ‘인간은 윤리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말에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진술이 의미가 있고 그 물음에 대해 가부를 생각하게 된다면 그 진술 속에서의 는 생물학적-동물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만 볼 수 없는 다른 의미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위의 어떤 관점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위의 모든 관점들이 총체적인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없는 차원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그 측면을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인격적이란 개념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이성과 자유와 내재적 가치를 가진 존재, 물리학적-화학적-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 차원을 반드시 갖고 있기는 하되, 그 아무것에도, 그것들의 총집합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엄연히 객관적인 존재를 지칭한다. 물론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지적되려면 물리학적이거나, 화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이거나 아니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하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정의상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시작에서 말했듯이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는 윤리도덕에 대한 논란에서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지적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볼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떠한 물질적 존재로도 환원될 수 없는 영혼, 정신을 갖춘 자율적 존재를 지칭함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인격적 존재는 다른 모든 현상이 인과 관계의 법칙에 의해 설명된다 해도 같은 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롭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을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주체이다.

인과 관계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다른 모든 사물 현상에는 결정 혹은 선택,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본질상 싫든 좋든 자기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며 그만큼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자유가 없고 오로지 인과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다른 모든 현상에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릇됨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오로지 자유롭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윤리도덕적 가치는 자유, 선택이라는 개념, 더 구체적으로 인격으로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윤리도덕의 문제가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문제라면 그러한 문제는 인과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이외의 모든 사물 현상에는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격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나타난다. 윤리도덕적 문제가 인간에게 부차적으로 덧붙여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윤리도덕을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해서 윤리도덕적인 측면에서 어떤 형태의 삶이나 행동을 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윤리도덕적 문제를 아주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윤리도덕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인격으로서의 인간 외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본질 자체에서 스스로 우러나온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판결받았다고 말했다. 인간의 본질이 자유인 이상 인간은 역설적으로 자유롭지 않을 수 없는 자유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싸르트르의 표현을 모방해서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그 본질이 자유인 이상, 그는 윤리도덕적 관점에서 모든 행위의 선악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밖에 없도록 판결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 따라서 무슨 행동이든지 선택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점은 싸르트르의 관점과 같다. 그러나 싸르트르가 생각하는 윤리적 가치와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적 가치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싸르트르의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윤리적 가치를 포함해서 모든 가치는 인간에게 상대적이어서 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고간에 그 자신에게는 가치가 된다. 내가 여러 가지 학과목 가운데서 과학 대신에 철학을 전공하기로 선택한다면 적어도 선택하는 나 자신에게는 철학은 과학보다 많은 가치가 있으며, 만일 내가 강도짓을 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될 수 있고 아니면 정직하게 살아서 가난할 수 있는 가능성 가운데서 강도가 된다면 나에게는 강도로서 부자가 됨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 옳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싸르트르에 의하면 어떠한 사물 현상도, 어떠한 행위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좋고 나쁨, 그것들의 옳고 그름은 언제나 행위자의 욕망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싸르트르적 입장에서 볼 때 가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물 현상이나 혹은 어떤 행위나 어떤 인간과의 관계를 지칭할 뿐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사물 현상이나 윤리도덕과 상관없는 행위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들과 그런 것들을 선택하는 행위자 간의 주관적 관계를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윤리적 가치에 관해서는 우리의 생각은 싸르트르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윤리도덕적으로 어떤 것, 어떤 행위가 옳으냐는 것은 우리의 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게 어떤 윤리적 행위를 선택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선택은 과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윤리도덕적 가치는 우리의 주관적 선택에 따라 상대적으로 좋고 나쁘든가 옳고 그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선택과는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자유롭게 나의 삶과 나의 행위를 윤리적 선의를 갖고 선택해야 한다지만, 나의 선택이 과오일 수 있어서 그런 경우 나의 삶은 윤리적으로 보아 객관적으로 나쁜 삶이 될 수 있고, 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보아 객관적으로 악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볼 때 나의 선택에는 나의 삶의 객관적 가치, 나의 행위의 객관적 가치, 따라서 나의 삶의 의미 혹은 보람이 걸려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윤리도덕적 선택은 객관적 가치의 올바른 인식이 전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이미 따져본 바로 절대적으로 확실한 윤리도덕적 가치의 인식이 불가능하므로 나의 윤리도덕적 선택은 언제나 각별한 위험과 긴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키에르케골이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적 앙그스트(Angst) 즉 불안은 바로 인간의 위와 같은 윤리적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06-12)

 

*4, 윤리적 평가

*내 자신이 윤리도덕적 선택을 해야 할 때 그 선택의 유일한 규준은 윤리도덕적 진리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경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도덕적 인식뿐이다. 어떤 식의 삶이 가장 나에게 보람있는 삶인가는 윤리적 문제이다. 나는 위대한 음악가로서 스스로를 완성하고 싶은 의욕에 차있고 그렇게 될 가능성을 스스로 알고 있다. 한편 나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삶도 나에게 극히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 중 한 가지 삶의 길을 택해야만 한다. 내가 윤리적인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데 어떤 길의 삶이 보다 윤리적으로 옳은지 알 수 없다. 이럴 경우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의 기준은 내가 생각하고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떤 삶이 보다 옳은 삶이라는 나의 인식일 수밖에 없다. 즉 내가 알 수 있는 한의 윤리적 진리에 비추어 서로 갈등하는 삶이 비교되고 측정된 후 그에 따라 나는 나의 삶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126)

*의도를 도덕적 평가의 규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칸트의 의무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며 결과를 도덕적 규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밀의 공리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윤리적 선택의 판단 규준으로서 위의 두 가지 이론은 다같이 풀 수 없는 문제들을 갖고 있다. . . .내가 남을 윤리적으로 평가할 때 전제되는 규준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인식, 즉 윤리적 진리만으로도 되지 않고, 그 사람의 행위의 의도만으로도 되지 않고, 그 사람의 행위의 결과만으로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그 세 가지를 동시에 평가의 규준으로 삼을 수도 없다. 의도와 결과 그리고 윤리적 진리는 자주 상호간에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29-30)

*어떤 것이 올바른 심판인지 확실히 모른다면 논리적으로 봐서 우리들은 마땅히 윤리적 심판을 보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상황과는 달리 인간의 실존적 상황은 나에게 남에 대한 윤리적 심판의 보류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직 모르니까 더 알아본 후에 심판하겠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당장의 심판을 회피할 수 없는 경우에 항상 부딪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확실한 근거도 없이 남을 심판해야 한다.

무엇이든 잘못 알고 잘못 판단한다면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확실히 모르고 판단해야 하는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 .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윤리적이라는 데서만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윤리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윤리적 동물이 아닌 다른 동물이 경험하지 못하는 심리적 불안과 정신적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는 윤리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그만큼 존엄한 존재이지만 또 윤리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꼭 그만큼 고통스러워야 한다. (134-5)

 

*5, 자비의 윤리학

*되풀이하거니와 윤리 생활에서, 윤리적으로 옳게 살려는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선한 의도, 동기, 태도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남을 돕게 되는 행동인지는 몰라도 우선 그리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남에게 도움이 되려는 태도, 내가 좀 희생이 되더라도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143)

*모든 사물의 본질과 질서는 객관적이다. 물질적 본질과 그것들의 현상적 원리는 인간에 의해 발견되거나 되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존재하며, 인간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 물론 언뜻 보기에는 자연의 본질과 질서가 인공적으로 바뀐다. 인공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고, 자연 속에 찾을 수 없었던 질서가 만들어진다. 모든 새로운 화학적 물질, 기계들은 그런 인공적 변화의 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변화는 피상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물질이나 근본적인 물질들 간의 인과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사물의 본질과 질서를 새롭게 배합했을 뿐이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변화나 인공적 제품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에 복종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인간에 의해서 마음대로 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질서는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객관적이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물 현상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사물 현상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객관적이라는 말이다.

사물 현상의 형이상학적 본질과 질서가 객관적인 것과 똑같이 윤리적 가치도 형이상학적으로는 객관적이다. 한 사람의 윤리적으로 옳은 삶은 그 사람이 그러한 삶을 인식하든 하지 않든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한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사람이 옳게 행위하든 하지 않든 객관적으로 옳거나 또는 그르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기 그가 살 수 있는 가장 옳은 삶이 있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에는 각기 그때그때 그가 취해야 할 가장 옳은 행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사물 현상의 형이상학적 질서가 있듯이 형이상학적 윤리적 질서도 객관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154-5)

*최근 버너드 윌리암스는 칸트나 밀이 의도한 바와 같이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윤리적 원칙은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어떤 보편적 윤리적 원칙을 발견하려는 철학적 노력에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칸트나 밀을 윤리적 원칙이 한 개인의 자율성이나 특히 권리에 대해 윤리적으로 어두움을 비난하고 있다. 그는 보편적 윤리 원칙을 강조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기존하는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맥언터이어도 각기 다른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도덕적 전통, 각 사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역사, 문화, 가치관의 맥락 속에서 참된 윤리적 진리가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 . 윌리암스나 맥언터이어와 비슷한 맥락에서 리차드 로티는 최근의 저서 [우연, 아이러니 그리고 연대성]을 통하여 한 인간이 자기 완성에 대해 가져야 할 사적 의무와 다른 사람과의 공동체 속에서 남들과 협동해야 할 공적 의무가 다같이 윤리적으로 존재하며, 그것들간에 일관적으로 통할 수 있는 관계를 찾을 수는 없으며, 따라서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갈등하는 사적 윤리와 공적 윤리를 조화시키는 일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로티의 위와 같은 주장은 언뜻 보아 윤리적 객관성을 포기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주관주의적 윤리학은 사실은 일종의 객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적 윤리와 공적 윤리를 조화한 윤리, 그리고 그런 조화의 원칙에서 살아가는 삶이 가장 옳은 삶이고 그런 조화의 원칙에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옳은 것임을 주장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57-8)

*윤리도덕의 원칙의 원칙은 다름이 아니라 나 이외의 모든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복지, 나 이외의 모든 다른 사람들의 인격적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한 사람의 품성에 지나지 않는다. 덕성 혹은 덕이라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람의 품성, 즉 어떤 태도를 의미함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윤리도덕적 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덕을 닦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이외의 모든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복지를 고려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격적 능력을 가려내는 일, 즉 나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데 가장 옳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인격적 품성을 키우고 굳게 하는 일이다. 위와 같은 근거에서 나는 여기서 행위와 관련되는 원칙의 도덕에 앞서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인격적 품성과 관련되는 덕의 윤리를 제안한다. (164-5)

*사랑하는 마음씨는 남의 입장에 서서 남의 복지만을 생각하는 마음씨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타산적이 아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서로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한 동기를 떠날 수 없다면 그 사랑은 아무래도 타산적이며 따라서 남녀 간의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되기는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순수한 사랑은 부모 특히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씨에서만 더러 그 예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174)

*인간의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선택적이고 배타적이며 따라서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 한 사람을 순수하게 사랑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을 더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사랑할 수 있는 더 정확히 말해서 사랑스럽게 되는 품성은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이 될 수 없다.

백 보를 양보하여 인간도 신과 같이 모든 사람을 동시에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 하자. 기독교의 도덕적 기본 명제대로 내가 나의 이웃을 나와 똑같이 아낄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러한 마음씨를 언제나 갖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구체적으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갈등을 과연 풀어줄 수 있겠는가? 어떤 덕이 보편적으로 귀중하다면 그것은 도덕적 갈등을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러한 덕은 윤리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도덕적 문제는 흔히 갈등에서 생긴다. 모든 사람을 다같이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구체적 상황은 한 사람 대신에 다른 또 한 사람을, 일부의 사람들 대신에 다른 부분의 사람들을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딸을 위해서 아들을 희생시켜야 하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다른 민족과 싸워야 하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의 경우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아껴라혹은 너의 적을 사랑하라라는 명제를 낳게 되는 사랑의 덕은 합리적인 해결의 방법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다. (175-6)

*인의 윤리학의 전제는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공자의 덕의 윤리학은 객관적 근거도 없이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전제하고 있다. 공자가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라 해도, 그리고 그의 윤리학이 아무리 중요하고 그의 의 덕이 아무리 고귀한 빛을 내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적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가장 기본적인 덕이 될 수 없다. (178)

*원래의 불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가르침도 아니고 윤리도덕적 가르침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비유해 말해서 의학적-치료적 가르침에 불과하다. 불교 속에는 어떤 행동이 한 개인의 직접적 이해 관계, 욕망 혹은 상황을 떠나서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사람됨이 그 사람됨 자체로서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의 문제도 있지 않다. 사성체는 인간 조건에 관한 네 가지 판단, 즉 네 가지 진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의학적으로 말해서 인간 조건에 대한 진단에 해당된다. 불교적 지난에 따르면 인간의 삶, 아니 삶 일반은 고통이다. 삶은 고통이라는 병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치료되어야 하는데 팔정도는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의 병, 산다는 것 자체의 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8가지 일종의 처방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삶이 고통이라는 진리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즉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의 하나인 해탈은 바로 삶이라는 고통의 병이 치료됐음을 뜻함에 지나지 않는다. (179-80)

*나 아닌 남들의 존재, 나의 고통이나 행복만이 아닌 남들의 고통이나 행복을 고려할 때 비로소 윤리도덕적 관점에 서는 것이라면 소승 불교는 그런 관점 밖에 서있기 때문에 윤리도덕적 관점을 떠나 있으며 오로지 대승 불교에서 윤리도덕적 의식이 처음으로 명확히 나타나고 윤리도덕적 입장을 확실히 갖게 된다.

윤리도덕적 의식은 나 아닌 남들의 소망과 고통, 특히 고통에 대한 의식에 바탕을 둔다. 고통에 대한 의식 특히 남들의 고통에 대한 의식은 불교, 더 정확히 말해서 대승 불교에서 더욱 뚜렷하다. 사실 불교의 세계관이 삶의 고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당연하다. 모든 윤리도덕이 남들의 고통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지만, 불교적 윤리도덕은 오로지 남들의 고통에 더 그 바탕을 둔다.

남의 고통을 의식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의 자세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다. 남들의 아픔과 기쁨에 대한 마음의 자세, 즉 심성을 윤리적인 자세라고 한다면 남들의 고통에 대한 의식을 강조한 불교의 윤리적 자세를 자비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자비는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가치, 가장 귀중한 심성 즉 덕이다.

자비는 우선 나 자신만도 아니고 내 중심적도 아니고 남들과 함께 느끼는 마음씨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 있어서의 자비의 덕은 기독교에 있어서의 박애의 덕이나 유교에 있어서의 인의 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덕은 한결같이 남들과 함께 느끼는 마음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애나 인의 덕이 남에게 좋다고 믿어지는 일은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마음씨라면 자비의 덕은 남들에게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우선 남들의 어려운 사정, 남들의 고통을 남들과 함께 느끼는 마음씨이다. 전자의 덕을 호의의 심성이라면 후자의 덕은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씨이다.

남들에 대한 호의는 남들의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한 내 자식, 내 이웃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려는 호의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자비는 남들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 이미 행복한 사람들, 불행하지도 않은 사람을 딱하고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남들이 어떤 고통에 빠져있다고 전제됐을 때 비로소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다. 부처, 석가모니는 해탈하기 이전의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 빠져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고 그들이 해탈하도록 도와주려 했던 것이다.

박애의 덕과 인의 덕과 자비의 덕을 비교 평가할 때 그것들의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른 이상 그들은 다같이 함께 가장 기본적인 덕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이 다같이 귀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중 어떤 것이 보다 근본적으로 귀중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렇기 위해서는 남을 사랑하는 심성, 남에게 좋은 일을 하겠다는 착한 심성, 그리고 남의 고통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심성은 도대체 박애,’ ‘자비의 심성 가운데 어떤 것이겠는가?

결론부터 말해서 자비의 심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박애의 윤리나 인의 윤리에 앞서 자비의 윤리를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대체로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자비의 윤리만이 도덕적 진리가 객관적이기는 하되 그 진리를 절대적으로 확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나의 전제와 일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 . . 둘째, 자비의 윤리는 도덕적 판단이나 결정의 독단성을 피할 수 있다.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 절대로 확신성을 갖고 있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독단적인 주장이 따른다. 박애나 인의 윤리가 다같이 절대적으로 옳은 도덕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러한 윤리는 독단적이고 고집스럽기 쉽다. . . . 셋째, 자비의 윤리는 도덕적 갈등을 가장 잘 해결해준다. 도덕적 갈등을 푸는 데 있어 자비의 원칙이 가장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도덕적 갈등을 해결할 때 자비심을 갖고 결정한다는 것은 남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는 원칙에 의해 도덕적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두 행동 중에 어느 쪽이 그러한 결과를 낳겠는가를 계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계산이 잘못될 수 있다. 그러한 결단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고 따라서 원래의 의도에 위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는 이상 다른 도리를 찾을 수 없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다. . . .

자비의 윤리학은 첫째, 도덕적 삶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도덕적 테두리를 벗어난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임을 전제한다. 인간적인 삶이 도덕적인 것은 인간의 자의적인 결정에 매여있지 않고 인간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질서에 기인한다.

둘째, 자비의 윤리학은 도덕적 행위의 옳고 그름의 객관성을 믿는다. 도덕적 행위의 옳고 그름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규범이나 원칙에 매여있지 않고 객관적인 형이상학적 질서를 의미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의 구체적인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객관적으로 옳거나 아니면 잘못된 판단이 가능하다. 구체적인 어떤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서 객관적으로 옳은 어떤 하나만의 행동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의 윤리학에 따르면 어떤 구체적인 도덕적 행위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정말 객관적으로 옳은 것인가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예외 없이 도덕적 진리를 절대적으로 확신있게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유일하고 고귀한 동물일지라도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넷째, 자비의 윤리학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을지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고, 그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삶을 살고 형이상학적 질서 속에서 영원히 끝을 맺게 될 확률이 크다. . . .

다섯째, 자비의 윤리학은 위와 같이 도덕적 진리와 인간의 조건에 비추어볼 때 나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또 어떤 특수한 경우에뿐만 아니라 언제나 모든 사람들 상호간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취할 가장 근본적인 태도는 자비로운 태도여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영원히 도덕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있거나 놓여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도덕적 행위가 결단의 문제이긴 하지만 그 결단이 어떤 것이든간에 자비로운 마음씨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그 결단이 객관적으로 잘못되어 고통을 받아야 할 때 그 잘못된 행위와 그 고통은 또 다시 자비로운 마음에 의해서 용서되고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1-9)

 

*6, 윤리 공동체

*윤리적 주체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릇됨의 범주에 따라 생각하고 인격적으로 좋고 나쁘다는 범주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윤리적 객체는 윤리적 주체가 행동할 때 옳고 그릇됨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대상, 그리고 윤리적 주체를 대할 때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좋고 나쁜 관점을 떠나서는 안 될 대상을 말한다.

종래의 윤리학은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객체의 구별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래의 윤리학은 거의 예외 없이 윤리 공동체원의 자격이 자명하다고 믿어왔고, 그러한 자격을 가진 존재는 인간만이라고 믿고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객체가 동일함을 또 다시 전제하고 있다. 모든 인간,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윤리적으로 옳고 그릇됨을 생각하고 윤리적으로 좋고 나쁨의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195)

*비록 이성을 갖지 않았더라도 유아와 정박아와 정신력을 상실한 노인들도 마땅히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윤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해야 한다면, 이성의 기능은 윤리적 객체로서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되거나 윤리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충분 조건이 될 수 없고 필요 충분 조건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아와 정박자와 정신력을 상실해가는 노인들이 윤리 공동체에 마땅히 속해야 한다는 우리들의 확신, 흔들릴 수 없는 우리들의 윤리적 직관은 어디서 생기는가? 위와 같은 부류의 존재들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뜸 반문할 수 있다. 인간만이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어찌하여 인간만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까 말했듯이 전통적 대답은 인간이라는 종만이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 . .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는 모든 동물이 이성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성이 결여된 유아나 정박자나 일부 정신이 흐린 노인들에게도 의심할 수 없는 윤리적 의무를 거의 본능적으로 느낀다. (197-8)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 간의 형이상학적 구별은 물론 생물 일반과 그냥 물질과의 형이상학적 구별, 정신과 육체의 존재론적 구별도 결국은 궁극적인 근거가 없는 인위적이고 인간에 의한 독단적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힌두교, 유교, 노장 사상, 그리고 과학에 깔려있는 일원론적 세계관, 모든 사물이 근본적으로는 단 하나전체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인간 아니면 동물, 아니면 식물까지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고 따라서 존중되어야 한다면 돌, , 모래 등까지도 역시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고 따라서 존중되어야 한다. 만일 인간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윤리적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고 그럼으로써 윤리적 공동체에 속한다면 똑같은 근거에서 동물, 식물, 그리고 돌과 물, 모래 등도 윤리적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윤리 공동체에 포함되어야 한다. 윤리적 전체, 따라서 윤리 공동체는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그 밖의 모든 사물들, 즉 이른바 자연전체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 서있는 윤리학은 인류 중심 윤리학은 물론 동물 중심 윤리학이나 생물 중심 윤리학과도 구별해서 생태 중심 윤리학’(ecocentrism 혹은, 라틴어로 eco ethica)이라는 말로 적절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207-8)

*모든 것들이 똑같은 윤리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서로 다른 윤리적 객체에 대한 배려가 차별되어야 윤리적으로 옳은 이유는 내 자신의 가족, 내 자신의 민족, 인류, 동물, 식물, 바위 또는 강과 나와의 관계는 그 성질이 각기 다르고 특수한 데에 있다.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