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철학, 문지, 1983 (041129--1202)
--요약, 감상
(요즈음 나를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일단 명아 씨를 제외한다면) 부지런히 책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책읽기가 읽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읽은 것을 정리하고 비평하는 작업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도 중요하다. 탁구를 치느라고 책읽기를 게을리 한 것이 아쉽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또 탁구를 치면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시간일 것이다.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명제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명제는 그것을 소화해 내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보다, 나는 후자에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따지고 보면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요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실천력이고 습관들이기이고, 의지와 인내이다.)
요근래 갑작스럽게 미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서 강대석의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을 읽고, 또 연이어 박이문의 이 책을 읽었다. 강대석의 책이 중간중간에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내용을 건성건성 다루고 있는 듯해서, 짜증이 나기도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런대로 유용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공부의 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책을 비평한다는 것은 무모한 작업이다. 자신감의 부족도 한몫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단계에서 내가 읽은 느낌을 기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초라한 시도가 발판이 될 것이므로.)
박이문의 글은 강대석과는 반대로 논지가 명료하고, 또 자신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나름대로 소화한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이 좀 더 풍성해 질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미란 무엇인가? 또 거기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학과 예술 철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지금으로서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이 책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현대의 분석철학의 영향 아래, 예술에 대한 개념 정리를 새롭게 하고, 거기에서,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로 나아간다. 디키의 영향 아래 박이문이 주장한 바를 내 나름대로 요약하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온 것처럼, 그 본질을 표상이나, 표현, 혹은 형식주의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은 제도적 속성을 지니며, 그 예술 작품이라는 말의 제도적 속성은 ‘유일한 가능 세계의 창조’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의 몇 구절을 직접 인용해 본다.
디키에 의하면 예술 작품도 언뜻 보기와는 달리, 그리고 몇천 년을 두고 일반 사람들은 물론 철학자들까지도 잘못 생각해 왔던 바와는 달리, 물*꽃*산*소리*자동차 등과 같은 자연물 혹은 인공물과도 달리, 지각적 대상으로 실재의 세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물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사회 제도라는 개념적*관념적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제도적 존재라는 것이다. (71)
가치는 우리가 부여한 기능에 지나지 않으며, 가치의 평가는 어떤 사물 현상이 그러한 기능을 얼마만큼 충족시켜 주느냐에 따라서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아름다움 혹은 심미성은 일종의 객관적인 사물 현상이나 속성소를 지칭한다. 그런데, 예술적 가치도 이처럼 객관적인 사물 현상이나 속성소를 전제로 한다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름다움 즉 심미성과 예술적 가치를 동일하게 보고 그러한 객관적 속성에 의해서 개별적인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술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미적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204)
강대석이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 대신에 “예술이 어떤 종류의 개념인가?”를 물어야 한다.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 244)
라고 했을 때의 의미가, 박이문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듯하기도 하다.
논리상 박이문의 주장이 다소 일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그 수다한 예술 활동과 예술 작품의 특성이 그의 짧은 몇 마디에 다 수용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과 사고 훈련을 지속해나가야 할 것이다.
<인용>
--제1부, 작품
*(적어도) 철학적 차원에서 사랑을 안다는 것이 <사랑>이란 개념을 파악하는 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을 안다는 것은 <예술 작품>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일이다. (20)
*쿤은 정상 과학과 비정상 과학을 구별했다. 전자는 한 사회내에서 과학자들간에 다 같이 수용된 과학적 이론이며 후자는 그런 이론들과는 대립된 새로운 이론으로서 아직도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은 과학적 이론을 말한다. (35)
*형식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표상론이나 표현론에서 나타난 기존의 옛작품에 대한 관점과는 달리 한 예술 작품을 그것이 담는다고 생각되는 내용에 따라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간의 관계에서 파악하자는 것이다. (48)
*예술 작품은 표상*표현*형식이라는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으며 각기 그 하나하나는 그 밖의 것들과의 유기적 연결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은 표상만으로, 표현만으로, 혹은 형식만으로는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며 예술 작품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표상론*표현론*형식론은 각각으로서는 예술의 어떤 한 측면만을 강조한 불충분한 이론이 되고 만다. (56)
*예술 작품 속에서 실재로 표상적이거나 표현적, 또는 형식적인 속성소가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라는 존재가 물과 같이 실재하는 속성소로서 정의될 수 있다는 전제는 잘못된 것이며 이 그릇된 전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시도한 정의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술 작품이란 것은 물과 같은 존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57)
*디키에 의하면 예술 작품도 언뜻 보기와는 달리, 그리고 몇천 년을 두고 일반 사람들은물론 철학자들까지도 잘못 생각해 왔던 바와는 달리, 물*꽃*산*소리*자동차 등과 같은 자연물 혹은 인공물과도 달리, 지각적 대상으로 실재의 세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물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사회 제도라는 개념적*관념적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제도적 존재라는 것이다. (71)
*학생이나 기혼자를 결정하는 제도가 법률 혹은 규칙이라는 문자화된 엄격성을 갖고 있는 데 반해서 예술 작품을 결정하는 규칙이나 제도는 허술한 관습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며, 전자를 규정하는 체제가 한 정부나 한 학교라는 뚜렷한 형체를 가진 공식적인 기관인 데 반해서 한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규정하는 체제는 허술하고 비공식적이며 형체가 불분명한 것이다. (72)
*예술 작품은 그냥 표상과 결정적으로 대조되어, 표상된 것이 완전히 분명해졌을 때에도 그것이 완전히 명료해지지 않도록 표상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의미론적 고려를 초월한 표상의 사용이다. [. . . ] 리히텐시타인 Lichtenstein의 작품이 결국 무엇인가를 표상 represent 한다고 해도 그 작품은 그 표상물의 내용에 대해 무엇인가 표현하는 것이다. (81) [단토]
*단토에 의하면 예술적 표상과 그렇지 않은 표상이 있을 때 전자의 표상은 표상적 기능과 동시에 표현적 기능을 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표현적 기능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표상은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혹은 보여 주는 의미를 가지며 표현은 어떤 대상에 대한 혹은 어떤 대상에 관한 서술의 느낌이나 태도를 뜻한다. (81)
--제II부 해석
*언어의 본질은 대치성에 있다. L이라는 시각적, 혹은 청각적 등등 모든 감각적 사물 현상이 그것과는 다른 무엇을 대치한다고 볼 때만 그것은 비로소 언어로 취급될 수 있다. (86)
*<언어>란 그냥 있는 사물을 지칭하지 않고 그냥 있는 사물을 대치하는 사물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의미>가 언어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면, 그것은 사물 현상에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사물 현상을 대신하거나 대치하는 것에만 해당된다. (86)
*문학과 같은 문자 예술과 회화*음악 또는 조각과 같은 비문자 예술은 그들이 다 같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언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전자의 경우, 약속이 보다 세밀하면서 투명하고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문자 예술의 경우 언어로서의 예술 작품의 의미가 비교적 확실하고 비문자 예술의 경우, 똑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88)
*비트겐시타인이 지적하여 준 것처럼 한 언어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할 줄 안다는 말이며 그것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그 언어를 형성하는 약속의 내용, 즉 규칙을 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91)
*모든 메타포가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그러한 비정상적인 표현에 의해서 정상적인 표현의 경우보다 더욱 많은 정보, 새로운 정보, 혹은 의미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93)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어떤 의미란 반드시 언어를 통해서 언어 속에서만 가능하고, 언어로 인해 전달되지만 그러면서도 언어는 논리적으로, 언제나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만일 언어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면 그것은 이미 언어임을 그치고 사물 자체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언어는 사물을 표상하고 사고를 표현하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원래의 목적에 실패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즉 언어로서의 기능을 지탱할 수 있게 된다. (93)
*쿤에 있어서의 정상 과학과 비정상 과학과의 관계를 혁명적이라고 한다면 언어에 있어서의 정상 언어와 비정상 언어와의 관계는 수정적이다. 전자에 있어서의 변화는 전체적이지만 후자에 있어서의 변화는 부분적이다. (98)
*문자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학 semantics이라 하고 비문자 언어의 의미를 밝히려는 학문을 기호학 semiotics과 구별한다. (99)
*한 예술 작품의 의미를 예술가의 의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어즐리에 의해서 널리 알려진 이른바 의도적 오류 intentional fallacy를 범하게 된다. 어떤 언어이든 언어적 의미는 개인의 의식 상태와 일치될 수 없다면, 그리고 의도가 개인의 의식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언어로서의 예술 작품의 의미는 결코 그 작가의 의도일 수 없다. (113)
*(언뜻 보아서 참신하고 재치 있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굿맨의 주장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한 언어가 무엇을 지칭한다고 하려면 그 언어와는 별도로, 다시 말해서 그 언어와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사물 현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물 현상이 존재하고 그런 사물 현상에 대해서 언어가 표상을 한다고 전제될 때에만 한 언어는 지칭적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굿맨이 지칭의 예로서 들고 있는 예시는 위와 같은 지칭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색이나 선만으로 이루어진 추상화, 혹은 음과 멜로디*박자로만 짜여진 음악은 예술 작품인 한 그 자체를 언어로 보아야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기존하는 색과 선 혹은 음*박자*멜로디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에 불과하다. 선과 색, 음과 멜로디로 짜여진 예술 작품이라는 언어 이전에는 그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116)
*예술 작품이라는 언어는 지칭 대상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지칭적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술 작품의 정의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어떤 것을 예술 작품으로서의 언어라 하여 다른 사물이나 혹은 언어들과 구별할 때, 예술 작품이라는 의미 속에는 언어로서의 예술 작품이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을 이미 제거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119)
*문학적 진리란 말의 특별한 의미는 아무리 기이하게 보일지라도 실재하는 세계를 어떤 일정한 관점에서 본 해석을 제시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 뜻에서 예술적 진리란 예술적 의미라는 뜻과 대동소이하다. 이렇게 제시된 해석이 도식화된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비젼을 뒤흔들어놓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독립된 사실적 자명성에 의해서 뒷받침된 진술적 진리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사실적 진리는 세계를 보는 관점이, 사실과 일관성 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한다. 그러나 예술적 진리는 도대체 세계를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는가를 우리들에게 보여 준다. (121) Blocker
*(잘 알려진 대로) 프레게 G. Freg는 <의미 Sinn>와 <지칭 대상 Bedeutung>을 구별하면서 의미가 지칭 대상과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똑같은 유성인 비너스는 <아침별 Morning Star>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저녁별 Evening Star>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이 두 가지 호칭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면서도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124)
*한 예술 작품의 해석이란 작업은 그 작품을 그냥 보거나 듣거나 읽거나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렇게 보여지고 들리고 읽혀져서 해독되는 언어의 의미, 즉 그러한 언어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가능한 세계를 가려내는 활동을 뜻한다. (126)
*한 예술 작품이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를 발휘하려면 어느 정도 보편성, 즉 개념화될 수 있는 차원도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하지만 그 언어가 예술 작품으로서 존재하려면 그것의 의미는 유일한 것, 특수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 작품의 의미는 사르트르가 키에르케고르의 주관적 진리를 가리켜 사용한 바 있는 보편특수성이라는 모순되고 갈등하는 성질을 갖게 마련이다. 예술 작품의 상위 의미는 그 특수성 때문에 처음부터 해석이나 번역이 허락되지 않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보편성 때문에 번역이나 해석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에 예술 작품의 내적 갈등, 내재적 패러독스가 있다. 한 예술 작품이 해석되면 그렇게 이해된 그 예술 작품의 의미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며, 만일 그 작품의 의미가 해석되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그것의 의미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또한 상실한다. (135)
*작품 해석에 있어서 가설과 검증을 거치는 작업은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그런 작업과는 달리 사물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주어진 의미들의 일관성을 찾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 해석에 있어서의 가설과 그것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작업은 그림짝맞추기의 작업에 비유될 수 있다. 수많은 단편적인 그림 조각들이 일관성 있게 조립되어 하나의 형상으로서의 질서를 갖게 되듯이 예술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된 의미로 질서 정연하게 조립하는 작업이 바로 예술 작품의 해석이다. (144)
*예술 작품의 단일*유일한 객관적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해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목적이 실제로 실현되었다는 것은 아니며 실질적으로 언젠가는 꼭, 틀림없이 가능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설사 실제로는 그런 것이 실현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이상적으로 모든 예술 작품의 단일한 의미, 즉 유일한 세계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해석이란 바로 그러한 이상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150)
--제3부 평가
*예술 비평가들이 어떤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단지 작품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항상 직접 간접적으로 뒷받침하여 말한다. 과연 그런 뒷받침이 객관적으로 설득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남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판단의 근거를 조금이라도 들지 않은 비평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런 비평가는 이미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중단한다. (161)
*예술적 가치를 기능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비어즐리가 옳았지만 그 기능을 통일성*강렬성 그리고 복잡성이라는 어떤 속성소, 즉 객관적인 속성소에 결부시켰다는 점에서 그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기능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사물 현상에 부여하는 역할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기능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 비어즐리는 가치를 기능으로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는 가치를 다시 사물 현상으로 환원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168)
*사회적으로, 실생활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가령 폭력에의 충동, 성적 욕망 등이 예술 작품이라는 상상적 세계를 통해서 상상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을 카타르시스라고 한다면 예술 작품은 이러한 뜻에서의 심리적 기능말고도 다른 의미에서도 심리적 만족감을 준다. (180)
*아무리 예술적 가치가 귀중하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삶이라는 가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삶을 떠난 가치, 삶이 바라는 것을 외면한 가치란 개념은 자가 당착적이다. 가치는 삶으로부터 솟아난다. 만약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들을 완전히 소멸시켜 제물로 바칠 때 인류가 가난과 질병, 그리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평화와 행복을 누리 수만 있다면 예술을 희생시켜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내가 아무리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중이라고 해도 만약 그런 창작을 중지하고 일선에서 군인들을 지휘하면서 싸움터에 나감으로써 조국이 멸망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예술 작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186)
*칸트의 무관심성은 실천적인 의미에서, 다시 말해 구체적인 어떤 목적과의 관계를 떠난 태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대상을 대할 때 우리들이 원하는 어떤 목적, 즉 욕망 충족과의 관계에 비추어 그 대상을 언제나 하나의 수단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우리가 대하는 대상을 단순히 수단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실천적인 목적 달성과는 관계 없이 그 대상 자체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다. (195)
*가치는 우리가 부여한 기능에 지나지 않으며, 가치의 평가는 어떤 사물 현상이 그러한 기능을 얼마만큼 충족시켜 주느냐에 따라서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아름다움 혹은 심미성은 일종의 객관적인 사물 현상이나 속성소를 지칭한다. 그런데, 예술적 가치도 이처럼 객관적인 사물 현상이나 속성소를 전제로 한다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름다움 즉 심미성과 예술적 가치를 동일하게 보고 그러한 객관적 속성에 의해서 개별적인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술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미적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204)
*한 사물 현상의 가치가 그것에 부여된 기능과 함수적 관계를 갖고 있다면 예술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예술 작품에 부여된 예술적 기능, 즉 유일한 가능 세계를 얼마만큼 실천했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여러 차원의,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생각 혹은 관념의 체계를 뜻한다. (206)
--맺는 말
*종래 생각되어 왔던 바와는 달리, 예술 작품이란 지각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사물 현상의 어떤 속성소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약정적인 보이지 않는 속성소에 의해서 다른 사물 현상과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그 밖의 속성소들, 예들 들어 아름다운 성질, 형식이나 내용의 성질 등은 부차적인, 비본질적인 속성소로 해석된다. 또한 이렇게 분류된 예술 작품은 언어라는 제도적, 즉 약정적 산물이 된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반드시 의미를 갖게 마련이며 반드시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16)
[참고]
*강대석,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 서광사, 84(041118-1202)
<인용>
--제1부 미학의 개념
*인간의 예술 창작적인 활동의 전 영역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법칙을 연구하는 일이 결국 미학의 과제이며,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 때문에 미학이 철학적인 성격을 띠고 예술학과 구분된다. (19)
*원시 사회의 미술에는 풍경화가 없다. (37)
*예술의 발생에 있어서 노동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예술 창작은 결코 신이나 자연이 부여해 준 선물이나 재능이 아니며 노동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식이 발생함으로써 세계를 예술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났으며 노동이 이러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45)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면서 예술적인 창작에만 관심이 있는 예술가들의 경향은 (그러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 환경과의 마찰이 해결될 수 없다는 근거 위에서 발생한다. 예술의 효용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이화 반대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그들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때에만 나타난다. (52)
*제2부 미학 이론의 변천
*헤겔은 형식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이었던 칸트의 미학을 벗어남과 동시에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양분하는 미학 이론이나 형식을 내용보다 우위에 두는 미학 이론을 극복한다. 그의 변증법은 형식과 내용을 응고된 두 영역으로 파악하지 않고 상호 발전하는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이것은 칸트에 비해서 커다란 진보이지만 그의 관념론은 아직도 내용의 우위를 철저하게 관철할 수 없었다. 물론 논리학에서보다도 미학에서 훨씬 더 진보적이다. 모든 미학 현상에서 구체적인 예술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헤겔이 말한 내용은 역사적으로 파악된 구체적인 내용이며 일정한 발전 단계를 갖는다. (152)
*헤겔 미학의 가장 큰 공적 가운데 하나가 미학의 근본 범주들을 역사화시킨 점이다. 헤겔은 모든 양식(Stil)이 그 본질상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역사적인 내용으로부터 발생한 형식이 이러한 양식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희랍, 로마, 고대 동방, 중세 등의 양식에 대한 구조적이고 내용적인 문제들을 정확하고 심오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155)
*모든 예술 작품은 삶과 사물의 참된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노력 즉 삶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이다. (161)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소크라테스는 제자 플라톤을 망치고 플라톤에서 이상주의 철학이 절정을 이루며 이러한 이상주의가 기독교 사상 및 인간의 평등을 기초로 하는 ‘노예 도덕과’ 결부되어 서양 정신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것은 당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허무주의(데까당스)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170)
*플레하노프는 미적인 표상에서 선험성을 주장하는 칸트의 의견에 반대하고 후천성을 주장하는 다윈의 명제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는 많은 종족이나 인종에서 각각 다른 미적 표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연구한다. 다윈은 인간의 미적 지각에 복합적인 이념이 후천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거니와 플레하노프도 이러한 명제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킨다. 관념론적인 인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이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198)
*현대가 전통과 어떻게 어긋나는가를 연구하면서 현대를 이해한다는 생각은 물론 혁명적인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이전과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명확히 파악되지 않을지라도 바로 현대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것이 그[아도르노]의 의도이다. 그렇다고 하여 단순히 이전의 것을 제쳐버리고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과 대비되는 다른 것을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 (214)
*전통적인 미학 이론들은 동어반복적(tautologisch)이고 불완전하며 검증할 수 없고 사이비 경험적인데 그것은 원래 불가능한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해답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 대신에 “예술이 어떤 종류의 개념인가?”를 물어야 한다. 동시에 미학은 개념간의 관계나 올바른 적용 방식을 다루어야 한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예술의 어긋난 해석으로 나아간다. 미학이 “어떤 예술이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가?” 대신 “그것이 언어 속에서 어떤 기능을 갖는다?”를 물어야 한다. (244)
*형이상학적인 방향이 구체적인 미의 문제를 존재 문제로 확대시킴으로써 그 구체적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분석 미학은 반대로 미의 문제를 사실성 자체로 너무 축소시킴으로써 그 보편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개념을 논리적*실증주의적으로 정화해야 된다는 요구는 보편적인 미학 이론의 거부를 의미한다. 이들은 개념의 상대주의를 내세웠지만 형식 논리와 같은 과학적 인식의 일정한 단면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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