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사상, 문지, 80(041210)
<단편>
(박이문의 글은 언제나 침착하고,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로 시작하기 때문에 다가가기가 쉽다. 그러한 침착함과 친근함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손쉬운 것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 반면에 그의 글이 그가 다루고 있는 내용의 해설서, 잘된 요약을 벗어나, 좀더 깊이 있고 독창적인 사고로 까지 뻗어나가지는 못하는 듯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제나 공부의 부족은 속히 풀어야할 화두이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나마 내 나름대로 느낀 점을 적는 작업을 게을리 할 수도 없다.
이 책은 전공자의 입장이 아니라, 서양 철학을 전공한 동양인이 그 철학이라는 틀에 비추어, 동양의 고전인 [노자]와 [장자]가 지닌 의미를 에세이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이문은 노장사상이 지닌 매력과 또 그것의 한계를 평이한 언어로 꾸밈없이 보여준다.
박이문의 노자와 장자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인지는, 따로 노장을 읽어보기 전에는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이문이 지적하는 바에서 몇 가지 노장 사상의 단초를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장 사상이 ‘일원론적 형이상학’이라는 점이며, 또 불교적 입장과의 유사성과 차이, 인생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사고방식 등이다. (사실 이 점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더 이상의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듯 하다.)
2. 도와 진리--철학으로서의 노장사상
*베르그송은 언어는 존재를 그대로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존재의 본질을 <흐름 la duree>인데 언어의 본질은 흐름과는 반대로 고정화하는데 있다. (26)
*언어와 존재와의 거리는 한 언어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다. 한 언어가 그것이 표현하는 대상과 같지 않다고 불평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바로 언어가 될 수 있는 필수 조건 없이 언어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근본적인 자가당착이다. (29)
*노장의 존재에 대한 주장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손쉽게 다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이 오로지 껍데기거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바로 존재라고 하는 데 있다. 존재하는 것은 현상과 별도로 구분되어 있거나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사물이라는 현상을 진짜 존재로써 포괄한다는 입장에서 노장의 존재론은 플라톤이나 칸트의 형이상학과 다르지만, 헤겔의 형이상학과 유사하다. 헤겔은 지각에 의해서 관찰될 수 있는 현상들은 <가이스트>라는, 원래의 실체와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의 그림자도 아니며, 그 실체 자체 속에 이미 내포되고 있는 잠재적인 과정의 표현이다. (32)
*도는 자연이다. 즉 도는 <스스로 그냥 있는 것>을 가리킴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있는 모든 것, 즉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총칭 명사가 바로 <도>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어떠어떠한 것, 즉 어떤 서술이 붙은 것 이전의 것을 가리킨다. (35)
*흔히 도를 무라 하고, 노장의 사상을 <무>의 사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가 언어에 의한 분별 이전의 존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로서의 존재를 이해한다는 뜻이 되고, <무>로서의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우리들의 지적 욕망, 지적 요구를 초월한다는 말이 될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개념 이전의,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존재를 알고, 개념 없이 그리고 언어 없이 존재와 직접 접촉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36)
*<도>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말은 <도>가 x, y, 혹은 A, B라는 개념으로 긍정적인 테두리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도>가 부득이 언어로써만 설명되어야 한다면, <도>는 x, y도 아니고, A, B도 아니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빌 수밖에 없다. <도>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언어로 표현됨으로써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언어로써 표현되지 못하는 존재 즉 <도>가 무엇인가를 다소라도 직관할 가능성이 있다. (37)
*<장주,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니 어디로 보나 나비였다. 나는 나비인 줄로만 알고 기뻐했고 내가 장주인 것은 생각 못 했다. 곧 나는 깨어났고 틀림없이 다시 내가 되었다. 지금 나는 사람으로서 나비이었음을 꿈꾸는지 내가 나비인데도 사람이라고 꿈을 꾸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과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 바뀌는 것을 물질의 변형이라고 한다.>(40) (장자에서 인용)
*<있다>라고 할 때의 <있다>라는 말은, <숲은 푸르다>라고 할 때의 <푸르다>라는 말과 논리적으로 전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있다>라고 할 때의 <있다>가 술어가 아닌 데 비해서 <산은 푸르다>라고 할 때의 <푸르다>는 술어의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말에 대해서는 진위를 따질 수 없고 오직 후자의 말에 대해서만 진위라는 개념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주어에 대해서 술어가 붙여졌을 때에만 그 말은 비로소 진술의 의미를 갖는 말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44)
*육체로서의 인간을 <존재차원>으로, 의식으로서의 인간을 <의미차원>으로 이름지으면 적절할 것 같다. 사르트르나 또 이전의 데카르트가 육체와 의식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본 까닭은 인간을 오로지 한 가지 차원, 즉 존재 차원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입장을 버리고 인간을 두 가지 차원에서 볼 때, 사르트르가 궁극적 진리로서 받아들인 즉자와 대자와의 모순 대립적 관계는 해소되고, 인간을 분해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의식 즉 대자와 그것의 대상인 나의 육체 즉 즉자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53)
*어떠한 앎에도 궁극적으로는 그 밑바닥에 직관을 전제로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직관이 다같이 정당한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흔히 두 사람은 서로 다같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해도 경우에 따라 두 사람의 직관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60)
*동양사상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노장사상은 서양사상에 비해 완연히 실천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 실천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그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다. (65)
3. <무위>와 실천--종교로서의 노장사상
*신학자 틸리히 Tillich는 신앙을 정의하면서, 그것은 <궁극적 관심 ultimate concern>이라고 말했다. 틸리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교리를 믿지 않아도, 한 인간이 자기의 삶과 우주 전체 혹은 존재 전체와의 궁극적 관계에 관여할 때, 그는 이미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68)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고, 니체는 노예적 인간들이 자기들의 정신적 고통을 복수하려는 수단으로 발명해냈다고 말했다. 종교는 전자에 의하면 지배자의 발명이며 후자에 의하면 피지배자의 발명이 된다. 두 가지 의견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종교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생기는 이해의 충돌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이와는 달리 프로이트는 인간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명해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위의 세 가지 이론이 다같이 종교적 교리를 진리로 보지 않고 하나의 <환상>으로 보고 있는 데는 일치하며 프로이트의 이론이 문자 그대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교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초월한 죽음이란 궁극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때, 프로이트의 이론이 진리에 가깝다고 믿는다. (68)
*도교를 넓은 의미에서 인간과 궁극적 존재와의 궁극적 관계를 밝히고 해결하는 견해로 생각할 때, 인격신을 믿는 종교는 궁극적 존재를 초월적인 것,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와 별도로 떨어져 있는 존재로 보며,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궁극적 존재는 별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일치한다. 따라서 해결되어야만 할 인간 조건은 인격신을 믿는 종교에 있어서는 신과 인간과의 종속 관계에서 해석되고, 인격신을 믿지 않는 종교에서는 존재 전체로서의 자연 그 자체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된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신과 인간과의 <공포>의 관계로 나타나며 후자의 경우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는 <우환>의 관계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가장 대표적인 인격신을 믿는 기독교는 인간의 공포의 해결을 문제로 삼게 되고, 인격신을 가장 분명하게 부정하는 노장의 종교는 인간의 우환의 해결을 문제로 삼게 된다. (70)
*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76)
*우리들의 문제, 즉 우환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 조건, 우리들의 인간 조건, 삶의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행복 또는 우환으로부터의 해탈도 우리들의 구체적인 생활 조건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고 싶었던 물건을 사는 데서, 가지 못한 곳을 구경하는 데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는 데서, 감동을 주는 책 한 권을 읽는 데서, 죽을 것 같았던 꽃 한송이가 살아가는 것을 보는 데서, 쓰리던 뱃속이 가시는 것을 체험하는 데서 우리들은 크나큰 기쁨을 느낀다. (87)
*문화란 별게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력으로 자연을 극복한 결과에 불과하다. 문화란 인간화된 자연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기독교가 이러한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과학도 그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무한한 혜택을 믿고 있다. 그러나 노장의 입장은 우리들의 상식적 입장, 기독교적 입장, 그리고 과학적 입장과 정반대이다. 노장에 의하면 과학 문화가, 즉 자연의 인간화가 주는 혜택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한 혜택은 마치 아편처럼 당장에는 행복을 가져올지 모르나 사실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행복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 (95)
*파스칼이 인간은 우주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먼지와 같은 작은 존재이지만, 사고하는 동물로서 우주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은 우주를 자기 속에 포괄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인간과 자연과의 역설적인 이중적 관계, 즉 인간의 근본적 존재구조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96)
*문화를 자연의 언어에 의한 표상이라고 해석한다면 자연과 틀릴 수밖에 없는 표상된 세계는 자연을 왜곡한 세계, 자연에 비추어 <爲>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은 뒤집어 말해서 문화화되지 않을 때, 인위적으로 자연을 언어에 의해서 표상화하지 않을 때, 자연은 왜곡되지 않는다는 이론이 선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무위무위> 즉 인위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때 위가 없다라는 말의 의미가 이해된다. <무위무위>라는 짧은 말귀는 노장의 언어 철학과 진리에 대한 견해를 요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의 말은 존재와 그것이 언어에 의해서 의미 표상화된 상태와의 관계를 밝히며, 진리는 언어에 의한 표상화되기 이전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99)
*무위는 불행동의 원칙이 아니라 사실은 실천의 원칙이다. 그것은 행동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역설적인 행동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인간 우환의 근원으로 진단된, 인간과 자연, 문화와 자연과의 거리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흔히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돌아가서 원시적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듯이, 또는 사르트르가 인간은 인간 아닌 물질로 돌아가서 충족될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노장은 자연이라는 모든 존재의 자궁 속에 돌아감으로써 인간의 우환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노드롭 F. C. Northrop은 동양과 서양과의 사고 방식을 각각 심미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로 구별하였다. (104)
*노장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이 삶으로부터 딴 곳으로의 탈출에서 찾지도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의 정복에서도 찾지 않았다. 그들은 궁극적인 가치를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궁극적 가치는 구원도 아니며, 해방이나 해탈도 아니며 소요 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낙이다. (105)
4. <소요>와 가치--이념으로서의 노장사상
*이념 자체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검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념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전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나 사회의 옳고 그름은 그 자체로서는 판단될 수 없고 오로지 어떤 이념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념이 다를 때 똑 같은 행동이나 사실도 그것의 옳고 그름은 다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이념을 달리하는 두 사람 혹은 두 사회 사이에서는 상대편의 이념이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틀리는 이념 사이에는 오로지 선전과 힘에 의한 싸움만이 가능하다. (107)
*희랍의 모든 비극 작품들은 인생에 대한 희랍인의 비극적 관점을 역력히 반영하는 가장 구체적인 기록의 하나이다. 이러한 희랍의 인생관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무였었더라면 가장 좋았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빨리 죽는 것이다>라고 한, 주신 디오니소스의 동료인 실레누스 Silenus의 말이 웅변으로 증명해 준다. (118) (예이츠의 시는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인생은 결국 비극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고 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장은 엉뚱하게 인생을 하나의 희극으로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슬퍼할 것, 슬픈 것이 아니라, 즐거워할 것, 재미나는 것이다. (119)
*노장은 삶을 하나의 시로 보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언어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 따라서 언어 자체의 축제이듯이, 노장의 시적 인생관을 따르자면, 인생은 딴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준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와 같이하여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가 된다. (123)
*이 세상에서 삶은, 아니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이 삶에는 그것을 즐기는 이외에 아무 목적이 없다고 보는 노장의 인생관은 기독교를 비롯한 힌두교 또는 불교적 인생관을 맹렬히 공격하고 부정하는 니체의 인생관과 같다. 니체는 흔히 종교가 전제하고 있는 이 세상 아닌 딴 세상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삶을 영원회귀하는 자연 현상의 일부로 본다. (125)
5. 노장과 우리
*노장사상의 위대성은 그들의 역설의 논리라는 기발한 논리에만 있지도 않고, 그들이 인생에 대한 완전히 혁명적이고 유니크한 관점을 제공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들 사상의 위대성은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론들이 합쳐져 하나의 유기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 굳어진다. (136)
*노장의 삶에 대한 혁신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 할 때, 그들의 가르침은 결국 쓸모 없다.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즉 사실과 맞지 않는 인간관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장의 사상이 그 어느 사상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매혹하고 있으면서도, 가령 유교와 같이 딱딱하고 따분하고 멋 없는 사상과는 달리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한 번도 한 사외의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채택되지 않았던 사실도 그것이 너무나 이상적인 비현실적인 이념이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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