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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박이문

박이문 - 시와 과학 (일조각)

by 길철현 2016. 9. 20.

#시와 과학, 일조각(75)

 

**1:시와 과학

*내가 말하는 시와 과학은 시공 속에 존재하는 현상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에 대한 해석 interpretation으로서, 대상의 의미화 semantization를 가리킨다. 의미화는 대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혹은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달리 말해서 객관적 대상이 주관이라고 불려지는 주체에 비쳐진 의식내용을 말한다. (6)

*그냥 그대로의 대상, 즉 존재차원을 의미차원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언어는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바꿔 말해서 언어의 근본적인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쟈아크 데리다가 그의 [문법학] De la Grammatologie에서 밝혀 준 것처럼 대치’substitution이다.

바꿔 말해서 언어란 언어가 의미하고자 하는 대상 혹은 존재의 대치에 지나지 않고 이러한 대치를 통해서만 존재는 의미로 바꿔진다. ‘대치란 예를 들어 구체적인 강아지가 ()’, ‘dog’혹은 ‘chien’등과 같은 기호로 대신되어 상징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10-11)

*언어에 의한 대상의 의미화가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는 한편으로 인간의 의식이 이성적인 차원과 감성적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의식의 내용, 즉 의미를 표현하는 언어가 순수한 개념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개념과 결합되어 언어의 논리성을 형성하고 감성은 언어의 물질성과 합쳐져서 언어의 역사성을 이룩한다. 이와 같이 하여 그것들은 각기 언어의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만들어 낸다. 바꿔 말해서 지시언어, 즉 어떤 대상을 서술하는 언어의 객관적 의미는 대상의 객관적 서술을 뜻하는 것이 되고, 주관적 의미는 같은 대상의 주관적 서술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16)

*한 대상을 서술하는 것으로서의 시와 과학은 그 대상을 추상화하는데 있어서 양극을 보여 준다. 시가 한 대상을 될 수록 적게 추상화함으로써 서술하려는 데 있다면 과학은 같은 대상을 가장 많이 추상화함으로써 그것을 서술하려는 데 있다. (16-7)

*귀납적으로 얻은 진리가 절대성을 결하고 있는 반면에 이 진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는 사실과 대조적으로 연역적으로 얻은 진리는 필연성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사실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전자의 진리를 종합적 진리 synthetic truth라고 부르고 후자의 진리를 분석적 진리 analytical truth라고 말한다. (21)

*과학적 설명과 신화적 혹은 종교적 설명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과학적 설명이 실험 verifiability or falsifiability될 수 있는데 반해서 신화적 혹은 종교적 설명을 비롯해서 형이상학적 설명 등 모든 종류의 비과학적 설명은 실험될 수 없는데 있다. 사람이 죽으면 맥박이 끊어진다는 것은 쉽사리 구체적으로, 즉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어느 동물일지라도 맥박을 끊어 보면 그것이 죽는다는 것은 쉽사리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는 이유가 하느님이 천당에서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실제로 당장 실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실험이 가능한가를 알 길조차 없다. 다시 말해서 그런 실험은 실제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23-4)

*과학적 지식의 구조를 좀더 요약해서 말하자면, 첫째 어떤 현상을 관찰하며, 둘째 그 관찰에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암시랄까 영감의 힘으로 하나의 가설이 성립된다. 셋째로, 이 가설이 가설로서 남아 있지 않고 하나의 지식으로 성립되려면 그 가설에서 연역적으로 추리되는 어떤 사실 또는 현상에 대한 결론을 내야 하며, 넷째 그 결론이 실제로 맞은가 맞지 않은가 하는 것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실증해 보여야 한다. 요약해서 과학적 지식, 즉 자연을 다스리는 법은 1)경험을 통한 사물의 관찰, 2)그것에 관한 일반적인 가설=*이론의 정립, 3)그 가설에서 순전히 연역적 논리로 추리되는 결론, 4)그 결론이 사실과 맞아들어가는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실증이란 네 개의 단계를 밟음으로써 성립된다. (25-6)

*최근의 미생화학*미생물리학 등은 차츰 순수한 물질과 생물과의 차원, 생물과 의식과의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믿을 만한 증거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물현상*심리현상, 나아가서는 사회현상도 궁극적으로 자연과학이 다루는 물리학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물현상*의식현상이 물론 다르지만, 그것은 오로지 표면상으로 그럴 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생물현상을 보다 복잡한 물리현상으로, 의식현상을 보다 복잡한 생물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장차 이러한 것이 확실해진다면 우리는 모든 현상을 단일한 자연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의 통일된 설명을 얻게 될 것이다. (30-1)

*의식은 자동차를 분해하듯이 실지로 쪼개 놓을 수 있는 조합물이 아니지만 지적 측면과 정의적 측면을 개념적으로 구분해 낼 수 있다. 지성은 의식의 합리적 사고능력을 가리키고 정의는 의식의 감성적 감수성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의식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그 대상은 논리적 사고의 각도에서 보여질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감성적 감수성에 의해서 보여질 수 있다. 말하자면 한 대상은 생각될 수 있으며 또한 느껴질 수도 있다. 하나는 의식의 이성적 활동이요 또 다른 하나는 의식의 피부적 활동이다. 전자가 냉철한 분석적 관점에 서 있다면 후자는 따뜻한 융화적 태도에 속한다. 하나의 대상, 꽃송이를 보고 우리들은 꽃이 무엇인가, 색깔이 어떤가, 모양이 어떤가, 어찌해서 꽃이 피나 등등을 생각해 보고 알아내려는 관점에 설 수 있는 동시에, 꽃송이가 아름답다, 여자 마음처럼 따뜻하다, 만지고 싶다, 따 가고 싶다 등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40)

*언어의 본질은 구체적인 대상을 관념으로 대치함에 있다. 다시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구체적인 대상이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의미로 대치된다. 서술이란 다름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의 언어를 통한 관념화이다.

따라서 언어 없이는 의미도 없고, 서술도 생각할 수 없다. 관념화, 즉 의미화로서의 서술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의 추상화를 거치게 마련이다. 구체적인 대상이 언어라는 매개로 대치, 추상화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그 대상을 의식하여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것은 서술될 수 있다. 이것은 철학적 혹은 과학적 서술에 있어서나 시적 서술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다. (46)

*역설적으로 말해서 시적 서술은 그의 목적이 실패할 때에만 성공한다. 시의 대상이 완전히 관념화, 즉 의미화되어 인식되는 데 실패할 때에만 그 시는 목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가 잘 됐나 못 됐나 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은 그 시가 얼마만큼의 서술대상을 의미화하는 데 실패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47)

*시의 근본적인 의도가 어떤 대상을 구체적으로, 즉 그 사물 자체로서 남긴 채 그것을 의미코자 하는 이상 시는 언어의 애매한 의미, 즉 내포적 의미를 최대한도로 이용하기 마련이다. 이 때 언어는 역설적이지만 추상적 구체성 혹은 구체적 추상성을 갖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는 사물도 아니요 그것의 의미도 아닌 애매한 공간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고자 항상 긴장하고 있게 된다. (48)

*시의 근본적인 의도는 언어를 갖고서 언어를 파괴하면서 언어가 되고자 하는 언어의 노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얻어진 시적 의미가 주관적인 성격, 즉 애매한 성격을 갖게 됨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라 하겠다. (49)

*진리는 어떤 대상에 있지 않고 그 대상을 서술하는 말의 의미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그 대상과 그 대상을 서술하는 말과의 관계 속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존재에도 속하지 않으며 의미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한 대상인 강아지가 있다고 하자. 나는 그 강아지가 어떤 것인가를 내가 보는대로 언어로 서술한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강아지를 강아지라는 말, 즉 의미로써 서술한다. 이 때 나의 서술은 그 대상과 일치하는 관계를 나타냄으로써 진리로 된다. 만약 내가 그 강아지를 보고 송아지라고 한다면 나의 서술이 그 대상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허위라고 말하게 된다. (51)

*과학철학자 쿤은 과학적 지식이 축적적이라는 것과, 과학이 계속적으로 진보하고 있음을 부정한다. 그는 과학이 계속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계속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과학적 지식이 축적적이 아니라 하나의 지식에서 또 별개의 지식으로 불연속적으로 대치된다고 주장한다. 흔히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원리는 뉴우튼의 역학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아인시타인의 이론은 뉴우튼의 이론에 보다 높이 쌓여진 벽돌집 같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쿤의 주장에 의하면 아인시타인의 이론은 뉴우튼의 이론과 전혀 다른 이론으로서 양자간에는 어떤 단절이 있다. 양자의 이론 속에서 다 같이 시간혹은 물질이라는 개념이 있다. 하지만 그 똑같은 낱말들은 두 경우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와 공산주의사회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53)

*과학적 진리가 객관적이란 말은 일단 그러한 서술을 낳게 한 패러다임에 설 때에는 누구나가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그러한 서술에 동의하게 된다는 것으로서 사고의 보편성을 의미하며, 과학적 진리가 궁극적으로는 주관적이라서 객관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할 때의 객관성이란 말은 어떤 관점과도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물 자체 그대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전자의 의미로서 어떤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해도 후자의 의미로서 그 서술은 객관성을 갖지 못하고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풍경이 있다 하자. 만약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다 같이 푸른 안경을 썼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AB는 그 풍경이 푸른 색깔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풍경이 푸르다라는 사실이 객관성을 갖게 된다. 그러면 만약 AB라는 사람이 그 다음번에 다 똑같이 노란 안경을 썼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풍경의 객관적인 진리는 노란 빛일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풍경이 노랗고 동시에 푸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AB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의 색깔, 색안경을 쓰지 않고 본 풍경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객관성의 주관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관성이 바로 쿤이 말하는 과학적 진리의 주관성을 의미한다.

*현실주의는 의식을 마치 무기체인 거울처럼 생각한 데서 잘못된 결론을 내렸고, 관념주의는 존재적 차원과 의미적 차원을 혼돈해서 나온 결론이다. 의식은 거울처럼 완전히 수동적으로 그 속에 비치는 대상을 그냥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상을 해석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의식에 의해서 해석된 것이어서 현실주의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냥 그대로 의식 속에 반영될 수 없다. 한편 사물이 지각되었을 때 그 지각은 반드시 의식에 속함은 자명한 논리이지만 그렇게 지각된 의식과 바로 그 지각의 대상과는 다르다. 관념주의는 사실 자체와 지각된 사물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물과 의식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론은 일찍이 칸트 Kant철학에서, 게쉬탈트 gestalt심리학에서, 그리고 최근 푸코Foucault와 같은 구조주의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56-7)

*인간은 지성으로 사고하고, 감성으로 꿈꾸며 노래하고, 생물체로서 살며, 물체로서 그냥 존재한다. (66)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부정한 니이체에 의하면 인간이 정말 찾고 있는 것은 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간에 그 근본적인 동기는 힘에의 의지에 있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권력은 힘을 말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힘이나 정치적 힘, 혹은 물질적 힘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 힘이 있는 자는 반드시 독재자거나 거부거나 장군이거나 혹은 권투선수만이 아니다. 니이체는 오히려 위대한 예술가, 승려들 속에서 그러한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니이체의 견해가 의미하는 것은 이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임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74)

*즉자는 자의식을 갖지 않은 모든 존재를 가리키고 대자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은 물체적 요소와 생물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돌덩이나 원숭이와 다른 점이 없으니까 즉자로 생각될 수 있으나 그가 즉자와 대립해서 대자로서 취급되는 이유는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엄밀한 의미로서의 의식, 즉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더 추구해 나가자면 대자는 의식의 대명사가 된다. 의식은 어떤 대상의 존재를 의식하는 존재로서 그 자체는, 역설적으로나마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 존재한다. 이와 같이 하여 사르트르는 의식, 즉 대자를 그냥 존재하는 존재’, 즉 즉자와 대조적으로 라고 부른다. 여기서 는 논리적인 의미를 가진 부정이란 뜻이 아니라 존재하는 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는 불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와는 전혀 다르다. 불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무는 인간의 존재가 우주적 입장에서 볼 때 대단치 않은 존재, 작은 존재임을 의미하거나 또는 인간 자신이나 인간이 이룩하는 모든 업적이 영구하지 않고 무상함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사르트르에 있어서의 는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보는 의식의 존재구조를 가리키는 것뿐이다. 따라서 인생은 허무하다라고 하는 말이 불교나 도교의 라는 개념과 상통할 수 있지만, 사르트르의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르트르는 로서만 존재하는 의식을 결핍 manque된 존재라고 부른다. 따라서 로서만 존재하는 의식결핍이 채워진 충족된 존재, 즉 유로서의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런 구조를 가진 의식은, 마치 굶주려 허전한 위가 음식을 욕망하듯이 항상 무엇인가를 욕망하여 스스로의 를 채워서 가 되고자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의식이 항상 지향성을 갖고 있는 이유를 밝혀 준다. 의식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게 마련이어서 결코 완전히 안정된 상태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다.

또 한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대자, 즉 의식은 그냥 존재하는 즉자가 자연의 인과율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데 반해서 그런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여기서 의식이 자유라는 말과 일치됨을 이해할 수 있다. 각 의식으로서의 인간은 인과율을 벗어나서 자기 자신의 결단’, 혹은 선택에 의해서 자신을 결정해 나가야만 한다. 앞서 말한 의식의 불안정성은 의식이 자유이며 항상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의 선택의 자유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내가 믿는 것에 대해서 나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의 책임은 나로 하여금 불안을 갖게 함은 당연한 논리라 하겠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의식으로서의 나, 즉 대자인 나는 당연히 그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불안의 근본 요인이 나의 존재구조, 즉 대자로서 존재함에 있다면, 불안으로부터의 유일한 해방은 내가 대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즉자로서 존재하여야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는 언제나 스스로 즉자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의식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퍽 불안할 때 술에 취하고 싶거나 잠에 들고 싶어하는 심리상태에 빠지거나 혹은 푸른 나무가 부러워지는 심경에 빠지게 되는 사실은 위와 같은 의식의 존재구조에 의해서 설명된다.

그러나 의식의 의식 아닌 존재에 대한 동경, 대자의 즉자에 대한 꿈,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궁극적 욕망을 밝혀 주지 않는다. 문제는 의식이 의식으로 남아 있는 채 의식 아닌 것으로, 즉 대자가 대자로 남아있으면서 즉자로 되어야 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의식이 완전히 의식 아닌 것으로 된다면 의식은 의식 아닌 것이 가질 수 있는 충족성이나 안전성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함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은 의식인 동시에 의식 아닌 존재로, 대자인 동시에 즉자로존재코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주는 즉자 아니면 대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자도 아니요 대자도 아닌 제3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꿈은 모순된 것이며,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존재구조 때문에 그러한 모순되고 불가능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지니고 있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인간은 무용한 수난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비극과 동시에 인간의 위대성이 나타난다. “인간은 가장 빈약한 갈대에 불과하지만 생각하는 갈대이며, 인간은 우주의 극히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사고의 힘으로 우주를 소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파스칼의 말이 여기서 더욱 잘 이해된다. (77-9)

*개인의 입장에서 보나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의식은 발달되고 존중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된 의식은 오늘날 인류가 갖고 있는 고도의 지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의식은 반드시 그 대상과 어떤 거리를 둘 때에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의식이 발달되면 그럴수록 의식은 그가 파악하려는 대상과 더욱 더 거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의식과 대상과의 거리가 그것들만의 분리가 커지면 그럴수록 인간은 그의 대상, 즉 크게 말하여, 그가 살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이다. (81)

*인간은 순전히 과학적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려는 동시에 존재적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듭 말해서 이와 같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모순된 욕망이다.

이 인간 욕망의 모순은 시적 경험, 즉 시적 의식 속에서 다소간 잠정적인 타협 혹은 해결을 시도한다. . . . 시적 의식은 인간의 존재적 차원과 의미차원의 경계가 된다. 어떻게 보면 시적 의식은 거의 의미를 나타낼 수 없는 존재에 속하고,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거의 그냥 대상으로서는 볼 수 없는 의미를 갖는 의식에 속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시적 세계는 한편으로 존재차원에 속하지 않는 존재이며 또 한편으로는 의미차원에 속하지 않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시의 세계는 의식 대상도 아니고 의식도 아닌 극히 애매한 세계다.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시적 언어의 의도가 대상을 구체적인 그대로 남겨둔 채 의미화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은 시적 세계의 애매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시의 목적은 언어 없는 경험을 얻는 데 있으며, 언어로 표현불가능한 것을 언어로 표현코자 함에 있다. 이와 같은 모순된 시적 의도가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상태는 잠들 때의 꿈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사고할 때의 투명한 의식도 아닌 일정의 명상 reverie의 경지일 뿐이다. 이런 상태 속에서 바슐라아르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이미 자연이 날 생각하는지 내가 자연을 생각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이 바슐라아르의 묘사는 2천년 전에 장자가 이미 경험했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장자는 이미 자기가 나비 꿈을 꾸고 있는지 혹은 나비가 자기 꿈을 꾸는지 몰랐었다. 그것은 대상과 의식이, 인간과 자연이, 주체와 객체가, 즉자와 대자가, 너와 내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용해, 융화된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시적 세계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비극적 삶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비록 잠시나마 가장 근본적인, 바슐라아르의 말대로 휴식’ repos행복’ benheur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모순된 욕망을 시 속에서만 잠시나마 해결하려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적 경험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는 이유도 알게 된다. 시적 경험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잠시나마 우주 전체와 화해를 얻는다. (84)

 

*2 : 언어와 예술

1)문학적 언어와 철학적 언어

*근본적으로 철학은 과학과는 달리 직접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다루지 않고 그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기록, 보도를 목적으로 한 언어 자체를 분석 혹은 비판함으로써 서술언어의 명확성 혹은 논리성을 따지는 데 있다. 가령 어떤 이가 신은 착하다하고 할 때, 철학자는 신이란 무엇인가, 어떤 근거에서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으며 어떤 근거로 신은 착하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신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불행, 불평등한 현실과는 모순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철학으로서의 언어는 현실에 대한 지식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기록한 언어의 논리를 비평 분석하는 2차적 언어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언어, 즉 고차언어는 일반 언어와 그 차원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91)

*문학언어는 지식에 관한 것, 객관적인 현실을 기술하는 데 있지 않고 언어를 통해서 한 작가가 체험한 세계를 표현함으로써 독자와 더불어 어떤 체험을 다시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체험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언어는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체험자로서의 작가 자신의 현실과 인생에 대한 느낌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평가언어이다. (96)

 

*예술과 진리

*진실은 사실과 구별된다. 물질적 혹은 개념적 모든 인식의 대상을 가리켜 나는 사실이란 말을 쓴다. 산과 나무*토마토*동물*타인**만년필*우유병 등과 같은 구체적 물질은 물론 언어*장기의 법칙*수자*사랑*슬픔*부자*도적놈*아름다움 등과 같은 모든 개념이 내가 여기서 말하는 사실이란 개념의 예가 될 것이다. 인식은 필연적으로 의식에 의한 인식이므로 의식이 아닌 자연적 혹은 인공적 물질이 의식의 인식대상이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의식의 한 표현된 형태를 의미하는 개념이 의식의 인식대상이 된다는 생각에는 좀 의심이 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식은 의식 자체를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나는 슬퍼하는 나 자신을, 나 자신의 가지가지 생각들을 의식하고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내 눈 앞에 뛰어다니는 강아지가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함과 같이 하나에다 둘을 보태면 셋이 된다든가 욕심 많을 땐 마음이 어지럽다든가 하는 관념들도 하나의 사실로서 내 의식의 인식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규정된 물적 사실이나 관념적 사실을 막론하고 사실은 그 자체가 참()이라든가 혹은 거짓()이라든가 혹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사실은 참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요, 아름다운 것도 아니며 추한 것도 아니다. 사실은 문자 그대로 그냥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벌거벗은 순수한 존재일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신은 진리다”, 또는 도나 인이나 태극은 진리다“, 혹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진리다라고 말한다. 예수 자신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진리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로서의 신이나 지동(地動)이나 도*, 혹은 태극이나 예수는 사실에 불과하며 그 자체는 진리도 아니요 허위도 아니다.

진리가 사실과 구별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진리는 언어표현이 있음으로써 생기게 되는 개념으로서, 언어의 한 기능인 명제 statement와 그 명제가 서술코자 하는 사실과의 관계를 말할 뿐이다.

언어는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명제로서의 기능을 대부분 갖고 있는데 이런 기능은 인식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순이의 얼굴은 둥글다와 같은 표현의 경우가 그렇다. 이와 반면에 언어는 단순히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한다든가 혹은 어떤 동작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는 비명제적 사용법이 있다. 이러한 경우를 행위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아이구 어머니야라든가 주둥이를 닥쳐라”, “한 잔 하면 어떨까?”라고 쓰이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행위언어가 진위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아이구 어머니야!”하고 말할 때 나는 그의 말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판단할 순 없다. 인식언어, 즉 언어가 어떤 사실을 의미하기 위해서 명제로 사용됐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들은 그 말이 옳다든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다. (105-6)

*주체 자신의 객관화는 언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체험의 기록으로서의 문학은 작가의 객관화에 불과하며 그것은 작가 자신의 거울과 같다. 예술로서의 문학작품이 허구적 fiction인 것은 우영한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구적인 양식을 통해서 작가는 그의 체험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으며, 이러한 거리는 객관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서 객관화된 작가의 체험은 작가의 의식에게 하나의 사실로서 인식의 대상이 된다. 작가의 역할을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인간 일반에 대한 어떤 사실을 인식의 대상으로서 제시하는 데 있다. 아무리 개인적인 체험을 나타낸 것이긴 하지만 그 체험이 일단 인식의 대상으로 객관화됐을 때, 그 대상은 작가 자신의 인식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독자의 존재가 이해될 것이다. (111-2)

*과학 혹은 철학적 진리를 객관적 또는 논리적 진리라고 한다면 문학적 진리는 주관적 또는 시적 진리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위는 진리의 대상인 사실과 그것을 기술하는 언어와의 관계의 차위에서 생긴다. 언어는 대략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의미적 기능 semantic이요 또 다른 하나는 수사적 기능 rhetoric이다. 한 언어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명확히 규정될 수 있어서 개념화되지만, 똑같은 언어의 수사적 기능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서 근본적으로 명확하게 개념화될 수 없다. 과학이나 철학에 있어서의 언어는 가능한 한도 내에서 순전히 의미적 기능을 가진 표현 수단으로만 국한하려고 하는 데 반해서 문학에 있어서의 언어는 의미적 기능을 포괄한 수사적 기능을 가진 표현수단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문학적 의미는 근본적으로 명료할 수 없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혹은 철학적 언어의 기능은 문학적 언어의 기능과 모순 혹은 알력이 흔히 생길 뿐만 아니라, 문학적 언어의 의미는 과학 혹은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생판 넌센스로밖엔 보이지 않는 수가 많다. (113-4)

 

*시적 언어

(이 부분은 [시의 이해](민음사)를 읽으면서 정리해 둔 것으로 대치)

하나의 언어가 외연적 의미로서 쓰일수록 그것은 과학적인 것, 미학적인 것에 가까와지고 그 언어가 내포적인 의미로서 쓰이면 쓰일수록 문학적인 것, 시적인 것에 가까와진다. 어떠한 언어도 실제적으로는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를 완전히 분리시켜서 쓰일 순 없지만, 한 언어가 문학적으로 쓰여졌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언어의 외연적 의미 혹은 내포적 의미가 어떻게 초점적으로 쓰여졌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46). 언어를 떠나서는 엄밀한 뜻에서 의식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언어는 존재의 거소>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이해된다. 언어 이전의 느낌*생각*경험*존재는 그냥 그대로 있지, 인식되지도 않고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위와 같은 사태나 사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기술되려면 우선 그러한 것들이 인식되어야 하는데, 인식은 인식하는 주체자인 의식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의식과 그 객체로서의 대상과의 논리적 거리는 인식이 핵심적 구조임을 나타낸다. 바로 거리가 인식과 따라서 의미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48). 참다운 앎은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즉 자의식이 섰을 때만 있을 수 있다. 자의식은 한편으로 의식과 그 대상, 또 한편으로는 그 의식 자체에 논리적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거리는 다름아닌 언어인 것이며, 이 언어를 매개로 해서 주체로서의 인식과 객체로서의 대상이 구별되고, 이런 구별이 이른바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49).

인간이 사물의 관계를 고찰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원칙이나 법칙을 찾아내서 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상징화, 즉 의미화함으로써 그것을 공간이나 시간을 초월한 논리의 세계 속에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언어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직 끊임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잡혀 있어서 과거나 미래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경험의 축적이나 앞날의 계획도 불가능했었음이 분명하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문명이나 자아에 대한 엄청난 힘을 행사하지 못했었을 것임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딴 동물이나 자연의 재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미 아득한 옛날에 소멸되었을 것이다(49). 그러나 언어는 인간동물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요, 인간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도구요 힘이며, 인간동물의 가장 찬란한 승리의 훈장과 같으면서 동시에 바로 이러한 언어는 정반대로 동물로서의 인간의 가장 치명적이며 근본적인 조항이기도 하게 되었다(50).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에서 소외된, 즉 자연과 거리를 갖게 되어 구체적 존재인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추상적 세계인 의미의 세계에 살게 된 사실이 인간의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동경하고 모색하는 열반의 극락세계란 다름아닌 언어로부터의 해방된, 즉 의미의 세계에서 실체의 세계로 귀의한 상태를 의미함에 지나지 않는다(51).

시는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서 끝난다. 바꿔 말하자면 시도 일종의 언어표현*양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이다. 왜냐하면 시는 다름아니라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비정상적인 <비틀린 언어>로 되게 마련이다(51). 철학적 사고가 가장 추상적 사고인 것에 비해서 시적 경험은 가장 구체적인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시의 이상은 가능한한 구체적인 상태로 경험의 대상을 표현코자 한다. 그는 될 수만 있다면 언어로서 그 대상을 상징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구체적인 그냥 그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그는 그 경험의 대상, 또는 경험 자체가 언어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언어는 반드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경험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로부터 해방되어 언어 없이 경험이나 경험의 대상을 표현코자 하는 인간인 것이다(55). 시인의 시도는 다름아니라 하나로서의 모든 존재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다시금 그 존재 속에 통합되어 그것과 하나가 되어 조화를 찾고자 하는 인간존재학적인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어머니의 품 안에 다시 포근히 안기고 싶은 정신분석학적인 욕망, 혹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버릴 수 없는 깊고 따뜻하면서도 애절한 향수와 비교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시는 추상화 이전의 한 유기체로서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 본연의 향수다(56).

똑같은 존재가 (위와 같이) 서로 병립할 수 없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면 그와 같은 인식은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시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필연적으로 기벽성, 즉 반보편성이 되게 마련이다. 물론 모든 기벽성이 시의 매력일 순 없다. 한 기벽성이 시적인 것으로 되려면 그것이 새로운 기벽성, 즉 새로운 감각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별성*특수성이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 어느 정도 처음이긴 하지만 납득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소, 즉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58).

언어를 가지고 언어로부터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표현이 아닌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코자 하는 내용을 갖지 않은 언어는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되었건간에 시가 될 수 없다. 거꾸로 말해서 위와 같은 것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하는 언어 표현은 그것이 어떤 형식을 갖추건 간에 시적인 언어가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허다한 이른바 시로써 쓰이고 발표된 많은 언어들이 왜 시가 아닌가 확실히 밝혀지게 되며, 어째서 많은 형식상으로는 산문과 똑같은 언어 표현들이 시로서만 독자에게 울려오는가 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자유시가 보여준 것처럼 시적인 요소는 모든 형식을 벗어나고 초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파괴하고 존재와 일치하려는 언어 표현이기 때문이다(59).

--정현종, 김주연, 유평근 편, [시의 이해], 민음사, 46--59 발췌.

 

*3 : 예술 비평

*비문자예술에 있어서의 의미

*예술 작품은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인과관계의 법칙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생긴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한 인간이 그의 자유로운 의도에 따라서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 낸 넓은 의미로서의 기호-언어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서 우리에 제시됐을 때 반드시 무엇인가를 의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36)

*의미를 갖는 기호는 필연적으로 한편으로 의미부여자 signifiant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수여물 signifie을 동시에 전제로 한다. 바꿔 말해서 의미부여자와 의미수여물을 전재하지 않고 기호만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란 언어 기호는 그런 기호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려는 사람과 동시에 그 이란 기호가 지시, 즉 대치해 주는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산을 전제로 함으로써 비로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란 언어 기호가 실질적으로 기호로써 쓰여져서 구체적인 산을 의미할 수 있는 까닭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구성원들이 다같이 이란 기호는 실제로 있는 산을 가리킨다는 루울에 동의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41-2)

*현상학자 후서얼은 모든 기호를 셋으로 나누어 표현’, ‘시그날’, ‘인덱스로 구별하고 있다. 표현은 언어기호를, 시그날은 약속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만든 물체 기호를, 그리고 인덱스는 약속 이전에 사용된 물체 기호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상 인덱스의 경우를 살펴볼 때 인덱스와 그것이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현상과의 관계, 즉 예를 들어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소낙비와의 관계는 실상 두 개의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표현이나 시그날의 경우는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의 사이는 두 개의 자연 현상 간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어떤 현상과 그것의 의미, 즉 존재적 차원과 의미적 차원과의 관계로 끝나고 만다. 바꿔 말해서 이 경우에 있어서 기호와 의미는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표현시그날만이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호라고 보아야 한다. (142)

*문자 예술을 어떤 대상에서 얻은 경험의 서술이라 한다면 비문자 예술은 어떤 경험을 얻게 할 수 있는 대상 자체를 만들어 내는 예술이다. 바꿔 말해서 화폭*교향곡*무용은 이미 있었던 어떤 경험을 의미화하여 서술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험을 자극할 수 있는 대상 자체로 봐야 한다. 비문자예술작품은 다름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경험의 대상이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대상에서 예술감상자는 그들대로의 경험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감상자들에 의해서 언어로 서술됐을 때, 즉 해석되고 설명됐을 때 비로소 그 예술 작품은 의미를 갖게 된다. 물론 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땐 그냥 맹목적으로 아무렇게나 장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이미 자기가 얻은 어떤 특정한 경험을 정리 혹은 나타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경험을 그냥 그대로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감상자나 자기 자신에게 그와 같은 경험이 재현될 수 있는 조건, 즉 경험의 대상을 만드는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예술 작품에 의미가 있다 해도 그 의미는 예술가가 막연해 생각했던 의미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오직 감상자에 의해서 해석됨으로써만 결정된다. (144-5)

*똑같은 선, 똑같은 음, 똑같은 동작, 똑같은 뱀, 똑같은 이미지, 똑같은 화폭, 똑같은 조각, 똑같은 무용은 이라는 말이나 ‘5’란 숫자, 적신호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다 같이 , 다섯 개, 통행정지를 의미하는 경우와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비문자예술작품은 감상자에 따라서 일정한 의미를 나타내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한 감상자에게도 그 의미가 확실하고 정확할 수 없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문자예술작품의 의미는 문자예술작품의 의미보다도 훨씬 더 막연하고 애매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를 의미 이전의 의미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146)

*대상은 문자 그대로 시공 속에서만 존재하는 구체적인 물체인데, 그 대상의 표현은 다름아니라 구체적인 그것을 추상화해서 개념, 즉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념의 차원에서 의미로 파악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정확하게 표현되면 될 수록 그와 정비례해서 그와 같이 표현을 통해 파악된 대상은 표현 이전의 구체적인 대상 자체와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표현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표현의 근본적인 의도는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려는 데 있지만, 그것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면 할수록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표현하지 않게 되고 그 대상에서 추출될 수 있는 어떤 요소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식거 표현인 과학이 정확하고 객관성을 갖게 된 것은 그러한 표현이 처음부터 그가 표현코자 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생각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표현은 대상의 왜곡된 서술이다. 구체적 대상을 왜곡한 과학이 인간의 실용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했고 크게 발달되긴 하였지만, 한편 그러면 그럴수록 대상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크게 된다. 예술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근본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기능을 맡고 있다. (147)

*어떤 대상에 대한 경험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하면 그럴수록 우리들은 예술적인 태도보다는 과학적인 태도를 갖게 되며, 화가나 음악가가 되기보다는 작가가 되며, 시인이 되기보다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거꾸로 만약 어떤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표현코자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들은 위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경향을 나타내게 마련이다. 의미의 명석성이 지성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학자는 예술가보다 더 지적인 요구에 끌린 사람이요, 작가는 화가나 음악가보다 더 지적인 이해를 찾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와 정비례해서 지식은 예술보다 인간의 예술적 욕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은 물론 작가는 화가나 음악가보다 덜 예술적인 욕망에 불 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49)

 

*예술적 체험

*의식과 그 대상과의 관계는 개 눈에는 똥밖에 보이지 않는다하는 속담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 (153)

 

*문학비평의 기능과 한계

*문학 작품은 과학, 혹은 철학 논문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가장 근본적인 차는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느냐에 있다고 본다. 과학자나 철학자에 있어서 언어는 하나의 도구 혹은 방편으로서 취급된다. 언어는 그들이 발견한 객관적 사실이나 논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서 언어 자체가 사실이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 한편 작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언어 자체의 재구성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한다. 언어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냐에 따라서 한 문학 작품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165-6)

*의식의 한 대상으로서의 문학 작품은 모든 의식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감성의 반응을 받을 수 있는 동시에 이해와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첫째의 경우는 문학감상의 작업이요, 둘쨋번의 경우는 이른바 문학비평의 과제이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경우가 실제적으로 완전히 독립될 수 없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혼돈되어서는 안 될 카테고리(범주)에 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인 데 대해서 또 하나는 작품의 논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언제나 좋고 나쁨이란 카테고리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논리는 옳고() 틀림()이란 카테고리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다. (167)

*문학비평에 있어서의 외재적 설명을 대체로 실존주의적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문학 작품의 자율적 비평은 형식주의비평이라고 호칭될 수 있다. 실존주의비평이 작품을 역사적 혹은 시간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라면 형식주의 비평은 논리적 혹은 기하학적 차원에서 관찰한다. (172)

*언어의 조직체인 작품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시멘틱, 즉 의미론이 가능할 것이다. 작품이라고 하는 언어의 복합물을 관념이란 뜻으로서의 사상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재조직해 낼 수가 있다. 내가 알기에는 뉴우 크리티시즘의 큰 경향이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둘째의 방법을 나는 수사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방법은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를 지적이고 추상적으로만 명확해질 수 있는 외연적 의미의 조직체가 아니라 감성적이고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내포적 의미의 조직체로 봄으로써 가능하다. . . .

셋째의 방법은 구조주의라고 불릴 수 있다. 구조주의는 모든 기호학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지만 문학 작품이 역시 하나의 기호체인 이상 문학 비평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문학 비평론의 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는 문학 작품의 타율적 설명방법 전반에 대한 불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율적 비평 내에서의 의미론적 비평이나 수사학적 비평의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된다. 작품의 의미나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대상물체에 대한 감수성은 작품의 내용을 구성하는 부분이 된다. (173-4)

*나는 참여문학론이 예술로서의 문학을 이념에 직접*간접으로 종속시키는 한도 내에서 착각에서 생긴 그릇된 문학관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참여문학론은 문학의 문학성, 문학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 어떤 정치이념을 실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면 어찌해서 선전문이나 광고와 문학이 다를 수 있겠는가? 무엇 때문에 간단하고 명료하게 문학양식 아닌 방법으로 표시되고 전달될 수 있는 이념을 문학이란 복잡하고 긴 소설이나 혹은 뜻이 항상 선명치 않은 시로써 표현해야 하는가?

한 이념은 철학적인 표현에 의해서 가장 정밀간료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참여문학론자들은 문학의 목적이 이념의 전달에 있지 않고 그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독자들을 움직이는 데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으로는 예술적 표현이 더 효과적이다, 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또다시 질문이 생긴다. 만약 참여문학론자들의 답변이 옳다면 히틀러의 선동적 연설문과 괴테의 [파우스트]의 문학적 가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그들이 하는 주장의 앞뒤가 정연하려면 그들은 마땅히 히틀러의 연설문이 더 문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극단적인 참여문학론도 이와 같은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180)

*문학 평론을 하는 비평가는 그가 하는 일이 과학으로서의 비평인지 사상가나 취미인으로서의 비평인지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어야 하며 소위 문학 평론을 읽는 독자들은 그가 읽는 논문이 정말 학문으로서의 논문인지 혹은 예술에 관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정치나 철학에 관한 평론가의 의견으로써 대하는 것인지, 혹은 그 평론가의 한 예술품에 대한 기호에 대한 서술을 읽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182)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

*구조언어학적 입장에서 볼 때 개별적인 독립된 낱말(단어)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지 못하고 반드시 어떤 구조 안에서만 그 뜻이 결정된다. 따라서 문학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언어로 된 이상 그 작품의 의미는 그것의 언어구조를 밝힘으로써, 즉 어떻게 언어가 조직되었는가를 앎으로써 밝혀질 것임은 당연하다. 한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수없는 언어들은 그 작품 전체의 구조를 밝힘으로써만 그 뜻들이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작품의 언어들의 개별적 의미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187)

*또 한편 문학, 특히 시에 있어서의 언어가 비정상적인 언어로 되려는 경향이 잇고, 그것이 그리는 세계가 허구적인 양상을 띠는 까닭도,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개념화된 언어로부터 해방되어 언어로써 개념화되기 이전의 직감으로 체험된 대상을 나타내려는 요구에 의한 때문이다. 문학은 언어를 통하면서도 언어 이전의 언어 아닌 대상을 언어 없이 표현하려는 언어의 모순된 노력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문학은, 어떠한 이론적 선입감이나 실천적 효과에 의해서 구애되기 이전에 가장 원초적으로 체험된 대상,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러한 대상이나 세계를 반드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개념을 갖고서 제시하는 대신에 의미하게 마련이므로 문학적 의도는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일 수밖에 없다. (190)

*예술적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시금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신, 자연의 일부로서 그 속에 생명이란 뿌리를 박고 자연에의 새로운 귀의를 체험할 수 있다. 예술적 경험에서 느끼는 유달리 이상한 아름답고 즐거운 경험은 다름아니라 지성에 의해서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자연에, 아니 우주 전체에 귀의함으로써 느끼는, 생명의 소리 없고 이름 없는 환희에 지나지 않는다. (194-5)

 

*예술의 비평과 평가

*실상 1930년대에 큰 철학적 영향을 미친 이른바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비단 예술 평가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가치판단은 사실인즉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런 대상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감정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평가적 언어, 예를 들어 그 행위는 옳은 것이었다” “그 음악은 아름답다” “이 음식은 맛이 좋다등은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나 아이구 엄마야!”하고 놀라서 내는 고함소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202-3)

*감성이 구체적인 역사나 사회 여건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감성의 변화성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며 그런 감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예술 평가가 역사나 사회적 여건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평가가 흔히 처음부터 예술적 평가이기를 포기하고 사회적*정치적*역사적 혹은 철학적, 즉 모든 비예술적인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경향이 있음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예술작품의 예술적 평가도 엄격히 말해서 역사와 사회의 구체적 여건에 의해서 크게 결정된다는 사실은 마치 객관적인 영원한 사실처럼 지금까지 세워지고 있는 모든 분양에 걸친 예술사나 시대나 사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도 보여 준다.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