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 철학이란 무엇인가, 일조각
<감상>
그 동안 [철학 입문서]를 여러 권 읽었지만, 박이문의 이 책은 국내 철학자가 직접 쓴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책과는 다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부피가 얇은 책이라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저자 자신의 그 간의 공부를 바탕으로 철학의 기본적인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이 된다. 특히 사물의 존재와 그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정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다시 말해 유물론과 유심론의 오류와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 책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부분을 <존재와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볼까 하는데, 역시 나의 공부가 지독히도 부족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 철학은 과학언어<대상을 서술하는 언어--인용자>에 대한 언어라기보다는 과학언어와 그것이 서술대상으로 하는 사물이나 사건과의 관계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도식적으로 설명해서 어떤 사실에 대한 인식은 한편으로 인식의 대상과 또 다른 한편 그 대상이 인식화된 언어를 필요 조건으로 하는데, 철학적 사고는 어느 한쪽 것만을 그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다만 그 두 가지 사이에 맺고 있는 관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 한번 바꿔 말해서, 철학적 사고는 사물에 관한 사고도 아니고, 그 사물의 의미에 관한 사고도 아니고, 그 두 가지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라는 새로운 사실 아닌 사실을 대상으로 한다. . . .
과학은 반드시 어떤 존재, 즉 사물 혹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앎이지만 철학은 결코 그러한 것에 직접적인 앎일 수 없다. (18-19)
*20페이지 도표 (중요)
*철학적 사고는 한편으로 존재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존재의 서술인 언어를 동시에 사고의 대상으로 함으로써 그 두 개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분석한다. 달리 말해서, 과학이 존재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서술함으로써 그 기능을 완수하는 데 반해서 철학은 존재와 과학적 서술을 동시에 대상으로 하면서 그것 간의 관계를 사고한다. 철학은 존재와 언어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그 사이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27)
*기독교적 인간과의 붕괴는 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 등의 지동설에서 벌써 크게 흔들 리기 시작했지만, 특히 다아윈의 진화론에 의해서 결정적인 붕괴를 맛보았고 정신분석학*행태심리학 그리고 생물학*물리학*동물학에 의해서 차츰 더 확실해져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3)
*실증원칙에 의하면 모든 서술문장은 그 문장이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서 원칙적으로 가려낼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은 경우 그 문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40)
*버어클리의 주장을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의식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의식된 것은 필연적으로 비물질적, 즉 정신적인 것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즉 관념적인 것이라고 따져 나갔다. (50)
*언어가 있는 곳에서만 세계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말해서 어떤 존재가 무엇무엇으로서 인식될 때에는 반드시 언어를 거침으로써만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51)
*지각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이른바 소박현실주의와 표상주의에서 볼 수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경험할 때 의식 속에 갖게 되는 이데아와 대립해 그 이데아의 원인 혹은 근거가 되는 물질적인 대상이 존재한다고 전제한 데서부터 생겨났음을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버어클리는 물질적 존재를 부정하게 된 셈이고 그런 결과는 지각에 대한 이론에서의 난점이 풀린 셈이다. 왜냐하면 일단 이데아가 옳은가 그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적 대상이 제거되면 그와 같은 비교가 도대체 필요없게 된다. 따라서 지각의 진위의 문제도 동시에 없어진다. (67)
*버어클리는 “지각되지 않는 것은 지각되지 않았다”, 또 거꾸로 말해서 “지각된 모든 것은 반드시 지각된 것”이라는 아주 자명한 사실에서 “지각되지 않는 존재는 없다” 혹은 모든 존재는 지각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 달리 말해서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내게 지각되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된다“라는 자명한 사실에서 ”그러므로 내게 지각되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의미차원과 존재차원, 인식과 대상을 혼돈함으로써 생긴 논리이다. 내가 존재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전자를 하나의 전제로 할 때 그것으로부터 후자의 결론이 연역될 수 없는 것이다. (68)
*현상주의 Phenomenalism는 관념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대상에 대한 앎은 지각을 통한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관념주의와는 달리 모든 존재를 지각으로 환원시키려 하지 않고 지각 안 된 사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현재 당장은 아니라도 마땅한 조건하에서 마땅한 때에 지각될 수 있는 것이 사실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센스데이터 sense-data로 분석될 수 있다고 한다. (69)
*진리라는 개념은 어떤 사물을 하나의 인식대상으로 놓고서 그것에 대한 서술의 언어가 진술됐을 때, 그 대상과 그 언어와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관계가 옳을 때 우리는 그 관계를 진리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오류라고 부른다. (72)
*진리란 다름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 즉 인류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사고를 바탕으로 조직된 의미체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면서 그러한 체계에 의해서 어떤 사물이 해석된 경우를 가리킬 뿐이다. 바꿔 말해서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의미의 규율, 즉 언어를 올바른 규칙에 따라 지각된 사물에 적용했을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81-2)
*서술언어의 특징은 어떤 대상에 대한 앎을 보태 주는 데 있지만, 표현언어의 특징은 그 언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고 그 언어를 사용한 사람의 정신적 혹은 감정적 상태를 나타내 보이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두 가지 언어의 기능이 얼마만큼 다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이런 두 가지 언어기능을 확실히 구별하지 못할 때 예술을 잘못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93)
*그<하이데거-인용자>는 주장하기를 과학적인 진리보다는 철학적 진리가 더 충실히 실재하는 존재를 나타내 주며, 철학적 진리보다는 시적 진리가 더 궁극적인 진리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면서 유명한 시인 횔덜린을 예로 들고 나온다. (99)
*철학이 언어에 대한 언어인 데 대해서 예술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는 인간 경험 자체에 대한 언어이다. (104)
*예술작품이 사실적으로나 비사실적으로 서술코자 하는 대상은 산도 아니요, 책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즐겁다’거나 ‘슬프다’, ‘아프다’, ‘노란 꽃이 보인다’ 등과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경험을 대상으로 서술한 것도 아니고, 그런 여러 가지 경험을 거쳐 그것들로부터 결정된 새로운 경험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쁘다’, ‘슬프다’, ‘아프다’, ‘노란 꽃이 보인다’ 등과 같은 종류의 무수한 경험들이 종합되고 응결된 하나의 경험은 위에 든 바와 같은 개별적인 언어들로써 서술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한데 모은 언어로써도 서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서술하려고 하는 대상은 여러 경험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구조요소로는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결정이기 때문이다. (107)
*‘정신은 유물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유물론과 그 반대로 ‘물질은 정신이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유심론은 근본적으로 모순된 진술이다. 왜냐하면 정신과 물질은 완전히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그 어느 하나도 딴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물론이나 유심론에는 다 같이 어디가 잘못이 있음을 즉시 알 수 있다. . . . 유물론은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를 갖고 있음에 착안함으로써 모든 현상은 그러한 인과관계로 환원된다는 주장을 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과관계를 볼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유물론은 처음부터 물질적 관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유심론은 모든 현상이 의식된 상태, 즉 의미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을 택함으로써 처음부터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다 같이 그것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기 보다는 각기 자기대로의 입장에 처음부터 참여, 즉 코미트하고 있을 뿐이다. (119-20)
*이원론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가장 명석하게 주장되었다. 그는 모든 존재는 이른바 사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로 마치 흑백과 같이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모든 물리적 현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생물이나 동물도 사고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물질적 실체로서만 존재하고, 오직 인간만이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사고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생물이나 동물도 돌이나 물처럼 완전히 인과관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물이나 동물이 딴 무생물과 다른 것은 오직 그것들이 복잡한 조직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생물과 동물도 일종의 기계라고 보았다. (122)
*의식을 갖고 생각하는 능력, 즉 정신을 가진 인간은 이질적인 두 실체의 복합물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실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단 하나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할 때, 즉 언어로 서술되는 순간 그것은 물질만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신만이라고도 할 수 없고,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존재로서만 보아야 한다는 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 두 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물질만의 존재라고 할 때 그런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거꾸로 정신만의 존재라고 할 때도 역시 자가당착에 빠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물질만이 있다”라고 하는 주장은 이미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의식을 전제로 하며, 또 한편으로는 “정신만이 있다”라는 주장이 옳다면 정신이 의식하는 정신 아닌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133-4)
*물질과 정신과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는 내가 주장하는 바의 존재적 차원과 의미적 차원과의 구별과 그것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도 고찰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존재적 차원에서 볼 때 맞는 말이요, 정신이 있다는 주장은 의미적 차원에서 볼 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존재적 차원은 의미적 차원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것이고, 거꾸로 의미적 차원은 존재적 차원을 이미 전제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물질의 존재는 의미로 번역되기 전에는 그런 사실이 옳다고 주장될 수 없으며, 정신의 의미는 그것이 언어로 번역하는 물질적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34)
*윤리는 한 행위의 원인이 되는 의도의 문제, 그 행위의 결과의 문제인 동시에 반드시 규범의 문제가 된다. 바꿔 말해서 한 행위의 윤리적 선악은 그 행위의 의도나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는 없고 어떤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그 규범에 비추어 결정되게 마련이다.
규범은 원칙을 의미하는 것인데, 원칙은 예를 들면 바둑의 규칙과 비교된다. 바둑을 두는 이유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데 있다고 해서 제멋대로 규칙을 어기며 자기가 즐거운 대로 돌을 놓는다 해서 바둑을 잘 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바둑두기는 바둑두기의 규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바둑두기의 규칙에 의해서만 바둑의 잘 두고 못 둠은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147-8)
*언뜻 생각하기에 모든 인간의 욕망은 각자가 자유롭게 결정한 주관적인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복돌이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하고 복순이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복돌이나 복순이의 욕망이 서로 다른 것은 오로지 피상적으로 그런 것이지 근본적으로 그들이 인간으로서 원하는 것은 같을지도 모른다. 같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서로 다른 한국어나 프랑스어를 써야 하는 것 같을 지도 모른다. 실상 니이체의 철학, 프로이트의 분석학, 사르트르의 존재학 등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 보편성으로 결정지어져 있지 각 개인이 자기의 주관에 따라 결정하지 못함을 주장하고 있다. (162)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사고는 인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보든간에 그것은 자연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자연 밖에 또는 인간의 사고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초월적인 세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초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트겐시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할 때 우리들의 언어는 한낱 백치의 중얼거림처럼 전혀 그 언어의 뜻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우리들은 우리가 자연과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종의 감옥에 살 수밖에 없음과, 따라서 우리들의 사고와 인식, 이성과 언어의 한계,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하면서도 엄숙한 태도로 괴로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단 철학자나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존재와 인간에 대한 엄숙하고 삼엄한 신비성을 느끼게 된다. (176)
*라일 Ryle을 따라 우리는 철학을 지도에 비유할 수 있다. 지도는 지면에 그린 일종의 도식이지만 그러한 도식은 건축설계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집을 상상하면서 그리는 여러 가지 모양의 설계도와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다. 철학의 목적은 지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는 구체적인 현실이란 대상을 갖고 있고 그 대상을 나타내려고 한다. 따라서 아무리 묘하고 깔끔한 지도라 해도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지도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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