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으로/니체·푸코

니체 - 안티크리스트 (Nietzsche - Der Antichrist)

by 길철현 2016. 9. 20.

1. 안티크리스트(반그리스도, Der Antichrist), [전집 15] 백승영 (110826)

 

<인용>

-좋은 것은 무엇인가?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힘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

나쁜 것은 무엇인가? --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216)

<18> 그리스도교 신 개념--졍자의 신으로서의 신, 거미로서의 신, 정신으로서의 신--이것은 지상에 실현되었던 것 중에서 가장 부패한 신 개념 중 하나이다. (234)

<25>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연적 가치가 완전히 탈자연화된 역사의 전형으로서 귀중한 가지치가 있다.

<27> 모든 자연과 모든 자연-가치와 모든 현실성이 지배 계급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에 역행하는 왜곡된 지반에서 그리스도교는 자라났다. (249)

<32> 표현을 자유롭게 해보자면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그에게는 고정된 것은 죄다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은 죽이는 것이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257)

<38>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학자와 사제와 교황이 하는 모든 말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짓이라는 사실이다--그들이 순진해서나, ‘무지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이가 알고 있듯이 사제 또한 ’, ‘죄인’, ‘구세주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유의지도덕적 세계질서가 거짓말들이라는 사실을. . . . (이 부분의 기독교 비판은 [앙띠 오이디푸스]의 정신분석 비판과 비슷한 내용이자, 형식이다.)

<41> 죄지은 자의 죄를 위해 죄 없는 자가 희생된다니!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이교주의인가!--진정 예수야말로 개념 자체를 없애버렸었다. (271)

<49> 죄라고 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자기 모독 형식은 지식과 문화와 인간의 고양과 고결함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죄를 고한해냈기에 사제가 지배한다.--

<57> 불평등한 권리가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다. ‘평등한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부당하다. . . . (307)

<61> 르네상스: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전도이자, 모든 수단과 본능과 천재들을 가지고 수행되었으며, 그 반대되는 가치인 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를. . . . (315)

<62> 나는 그리스도교에 유죄판결을 내리며, 그리스도교 교회를 가장 혹독하게 탄핵한다. 그 어떤 고발자가 입에 담았던 탄핵보다도 혹독하게.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 최고의 부패이며, 궁극적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한 부패에의 의지를 가졌다. (317)

나는 그리스도교를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부른다. . . . (318)

 

<감상>

서양 철학의 원류인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갈 때, 플라톤의 역할을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전설과,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설(정확한 용어를 찾아낼 것)로 대변되는 세계관의 두 가지 양식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변전하는 현상 세계보다 불변적인 이데아의 세계에 우위를 둠으로써, 현세적 삶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면을 가지게 되었다. 이 플라톤의 철학은 기독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현세보다 영원한 내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글은 상당한 오해의 소지를 지니고 있기 하지만(강대석의 니체에 대한 글은 그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이다),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읽을 때, 우리 사고가--혹은 서양 사고 전체가--그때까지 빠져있었던 미망을 한 번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 또한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전복적인 사고로 제시하고 있다.

이 텍스트가 니체의 후기 저작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글을 읽고 읽었더라면 좀 더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니체의 스타일이나 사고의 핵심을 엿볼 수는 있는 글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가 생각하기에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거부이고 반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역시 동물 종의 하나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따르는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 본능을 그는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생명체를 생산-기계’, 혹은 욕망하는 기계라고 부르는데, 이 생각은 니체의 그것과 연계된다.)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이토록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니체가 핵심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의 스타일이나 사유의 방식에 좀 더 익숙해지지 않으면 오해하기가 쉽다는 생각이 든다.

---

이번 방학에 읽은 들뢰즈(가따리)와 니체는 내 생각의 방향을 많이 헝클어 놓았다. 그 중심에는 언어의 한계와 또 그 언어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편협성과, 그럼에도 우리가 또 다시 언어로 돌아와 언어로 살아야 하는 불가피성 등이 놓여있다. 니체의 입장은 묘한데, 일단 그는 서구 사유의 전체틀을 전복시킨다(모든 가치의 가치전도). 그 다음, 그는 자신의 철학을 힘에의 의지’, ‘영원 회귀등을 통해 전개해 나가는데, 이 시점에서 그는 다른 철학자를 옭아매었던 덫에 자신도 동시에 걸리는 느낌을 준다. 해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지만, 해체만을 할 수도 없는 것 또한 우리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말을 하되--있는 힘껏 밀고 나가서--그 말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