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으로/니체·푸코

김상환 외 - 니체가 뒤흔든 100년. 민음사. 2000

by 길철현 2017. 8. 13.


- 김상환 외 - 니체가 뒤흔든 100년. 민음사. 2000


[단상]

왜 철학을 해야 한다고 목을 매는가? 그것은 세상에 대해 할 말을 가지기 위해서인가? 왜 철학 앞에 번번이 무릎을 꿇는가? 나의 부족한 머리, 부족한 인내심으로는 철학의 고봉을 오르기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일단 논문을 앞에 두고 꼭 읽어야 할 사람은 쇼펜하우어이고, 여유가 된다면 니체도 좀 읽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를 읽기 위해서는 칸트도 좀 알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노릇이다.


니체 철학이 이전의 철학을 어떻게 전복시키고 새로운 길을 열었나에서부터, 니체와 프로이트,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 등의 연관성을 이야기함으로써, 니체가 이후의 사상가나 철학자에게 미친 영향력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니체를 읽어야 한다. 니체의 기본 개념들,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 회귀, 관점주의 등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정신분석과 니체의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 점에서는 예전에 읽은 이창재의 책 [정신분석과 철학]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인용]

- 책머리에

(6) 니체는 2000년 이상 유지되어 온 철학 개념을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변형시켰다. 인식론이나 학문 방법론으로 전락했던 근대 철학에 다시 문명사적 계획의 과제를 부과하였고, 실증주의와 분과적 단절의 늪에 빠져 있던 학문에게 이론*실천*예술이 재편되고 통합되는 지점을 보여주었다. 니체가 제기했던 근대 및 서양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철학의 형질 변화와 학문의 탈바꿈을 요구하고 있다. 20세기가 니체의 시대였다면, 이런 과제와 요구가 이 시대의 사상사적 모험의 방향을 결정했고 인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이미 지난 한 세기의 사상사를 뒤흔들며 새천년의 문턱에까지 왔다.

(7) 하이데거의 니체론. 들뢰즈의 니체론. 후기구조주의 - <기의 없는 기표>


<제1부. 니체의 생애와 사상>(백승영)


- 니체의 철학적 삶

(16) 니체의 다양한 모습을 띤 철학 내용과 철학하는 방식

(22) 1865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고서점에서 발견해 읽고 철학적 사유로 입문.

(26) 예술은 삶의 고통을 치료하는 치료제

(33) 루 살로메와 만남.

(44) 1889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의 기절 사건이 발생한 후 니체는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임.


- 니체 읽기의 방법과 역사

(50) 허무주의의 도래와 극복은 영원 회귀 사유 및 영원 회귀 사유를 긍정하는 위버멘쉬라는 존재에 의해서만 가능.

(51) 형이상학과 허무주의 이후의 철학. 생기 존재로. 몸 주체. 관점적 해석. 디오니소스적 긍정.

(59) 가톨릭 신학 - 그리스도교를 오해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적대자로 간주했었으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비판을 상대화하거나 그의 심연에 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성을 발견하려는 시도

개신교 - 바르트. 그리스도교를 잘 이해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실천이라는 면에서는 적대 관계를 맺는다고 니체의 후기철학을 평가한다. 니체의 승화된 인간 유형은 더불어 사는 인간적 삶을 제거해 버림.

(60) 프로이트 : 니체의 유산. (쾌락 원리 - 힘에의 의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도덕, 죄, 및 양심의 가책, 충동의 부정 및 승화)

융 - 니체를 자신의 작업에 가장 본질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인정.


-니체 철학, 무엇이 문제인가

(65) 인간에게 자기 자신과 세계를 생성하는 존재로서 인정하고 긍정하는 해석을 제공

(66) 몸으로서의 인간은 바로 위버멘쉬이며, 창조와 해석활동을 하면서 자기의 현 상태를 극복하는 인간이다.

(67) 인식, 해석. 인간의 부단한 힘과 삶의 의지로부터 행해지고, 인식 행위의 내적 조건인 관점성은 내재적 한계이며, 해석들은 역사성과 시간 제약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해석은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관점적 세계 경험.

(74)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만연해 있던 저주이다. 

(75) 이성이 자신과 자신의 인식 범주들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해 그것들을 실재에 대한 <규준>으로 믿어버리는 독단적 태도이다.

(75)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 존재와 사유. 2원론적.

(76) 이성 인식은 가치 각인적 해석이다. 따라서 해석작용은 인식 주체의 삶의 유지를 위한 것이며, 해석 작용의 결과는 오류일 뿐이다.

(77) 인간들이 논리학과 이성 범주에서, 세계를 유용성- 목적에 맞게 정돈하기 위한(따라서 원칙적으로 유용한 위조를 위한) 수단을 찾는 대신에, 그 안에서 진리의 규준과 실재성의 규준을 가진다고 믿었던 데에서 철학의 혼란이 비롯되었다. 순진함은 [수단을] 사물의 척도로, 실재와 비실재를 판단하는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중심적 병이다. 짧게 말해, 조건성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 인간은 영리한 방식으로 실재를 오해하기 위해, 실재에 대해 주인이 되기 위해 이성 형식을 갖지만, 그는 실재의 규준을 이성 형식에서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87) 쇼펜하우어 - <현존재가 도대체 의미를 갖는가>

(89) <무리 도덕> <노예 도덕> : 삶에 적대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약화되고 지쳐버린, 유죄 판결이 내려진 삶으로부터 유래하는 이 도덕에 개인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상실한 채 노예처럼 복종.

(91) 형이상학을 떠나면서 형이상학으로 돌아옴. [기존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이상학 제시. 몸. 생기 존재론.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95) 힘에의 의지. 자기 극복과 상승 추구.

(99)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너희들도 힘에의 의지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120) 언어의 발생이나 언어의 사용. 게르브의 영향. (이 부분 중요)

언어라는 것은 이미 그 발생 단계에서부터 그 언어가 관계 맺는 대상과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언어 사용자와 그의 대상에 대한 <관계>일 뿐이고, 바로 이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다. (이 부분 자세히 읽을 것)

(122) 우리는 언어를 통해 대상 세계와 타인을 파악하고 기술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대상 세계를 우리 자신에게 알리기 위해 피상화시키는 것에 불과.

(130) 니체 철학 요약

1) 우리는 세계와 불가피하게 관점적으로만 관계 맺는다.

2) 경험 가능한 해석의 세계가 인간 경험의 한계이고, 경험의 한계가 바로 인간 자체의 한계이다. <유리잔을 나올 수 없는 파리>

3) 해석 주체에게 상관하는 해석의 세계는 그에게는 <완전히 옳다>

4) 우리는 우리가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는 절대로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136) 운명애는 <한 사람 앞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의 운명을 사랑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이유는 운명애가 가장 큰 고통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우리 자신과 우리 운명에 대해 자유롭게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갖는 창조적 에너지를 거스르거나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면, 이렇게 결정된 우리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다.



< 제2부. 니체와 현대 사상의 흐름>

- 김상환 - 새로운 해석학의 탄생 1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이후]

(148) 근대적 인문학의 기초가 붕괴되고 - 새로운 인식론적 전제가 자리 잡음

(152)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역사적 의미 - 헤겔적 사유의 지반에 맞서는 새로운 융기 지각 형성.

(154) 프랑스 실존주의 - 헤겔, 후설, 하이데거를 대부로

라캉 - 프로이트. 알튀세 -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 니체.

(156) 데리다. 탈중심화 <중심은 현전적 존재자의 형식 안에서 생각될 수 없다는 것, 중심은 자연적 장소를 갖지 않으리라는 것, 중심은 어떤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어떤 기능이라는 것, 그 안에서 무한한 대체의 유희가 일어나는 일종의 비장소라는 것>

(159) 데카르트 - 사물에 대한 의심. 의식 자체에 대한 회의.

(161) 우리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에게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성이 문화의 탈주술화 혹은 세속화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이들은 그 탈주술화의 마지막 국면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역사를 신적 무한자(정신)의 역사로 서술하는 헤겔과 맞서 있음.

(162) 리쾨르는 니프마가 철학사 안에서 일으키는 단절을 인정하지만 헤겔적 사유에 대한 그 단절을 다시 헤겔적 반성의 형식 안에서 지양한다.

(165) 해석. 푸코 - <광기의 경험> 니프마에게서 기호는 이미 다른 기호에 대한 해석이다. 한 기호의 해석은 해석의 해석이다. 이것은 중립적인 기호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부분 잘 볼 것)

(170) 해석은 무의식의 중심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갈 수 없다.

(--) 충동 이론은 말하자면 우리의 신화이다. 충동은 신화적 존재이며, 그것의 무규정성이 화려한 인상을 주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 그것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사고와 문화가 비롯되는 기원으로 다가설수록 모순과 무의미, 역설과 불합리, 애매성과 신비에 봉착한다. 해석 자체가 신화화되는 상황에 빠지고, 따라서 해석은 그 난파의 상황 속에서 무한화된다.

(173)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유령이며, 계급간 갈등적 지배 구조를 문제삼는 적대적 해석에 대하여 감시의 역할을 맡는 수호 천사이다.

(175) 니체. <모든 사태의 해석적 성격. 사건 자체란 없다. 사태로서 성립하는 것은 어떤 해석자에 의하여 선별되고 조합된 일군의 현상이다.> 

(177) 알튀세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은 단순하고 단선적인 규정 운동에 불과하고, 따라서 헤겔적 총체성은 단일한 구심점을 가진 동심원에 지나지 않는다. <원환들의 원환으로서의 의식은 하나의 구심점만을 지니고, 오직 이 하나의 구심점이 의식을 규정한다. 의식이 그 중심에서 다른 원환들의 효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려면, 간단히 말해서 의식의 본질이 다른 원환들에 의하여 중층적으로 결정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중심을 지니는 원환들, 탈중심화된 원환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179) 마르크스 -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관념적 진리는 생산 수단을 지배하는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진리는 그런 지배 관계의 산물이다. 진리에 대한 해석이 <누구>에 대한 질문으로 소급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진리는 누구의 진리인가? 누가 그 진리를 원하는가? 누가 그 진리의 피해자인가?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포이어바하가 아직도 진정한 유물론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물음을 생략했다는 데 있다.

(182) 들뢰즈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추상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누가 진리를 원하는가', '언제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원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183) 프로이트는 심리적 사태에 고유한 시간성 및 인과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사후성(Nachträglichkeit)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말은 심리적 경험과 인상,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의 흔적은 이후의 심리적 사건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조직되고 재기록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즉 하나의 심리적 사태는 그 자체로 어떤 완결된 의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다른 사건과 짝을 맺는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나중에 오는 사건이 먼저 있던 사건에 사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 의미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특히 무의식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심리적 현상은 이런 사후적 인과성의 효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사후성 부분에 대한 이야기 상당히 중요]


이런 프로이트의 사후성 개념은 심리적 사태가 물리적 사태로 환원될 수 없는 나름의 고유한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킨다. 물리적 사태는 비가역적 시간, 비가역적 인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 반면 어떤 심리적 사태가 사후의 영향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은 심리적 과거가 미래에 나타나고 원인이 결과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것을 말한다.


(주) <기억-흔덕의 형태로 잔존하는 내용은 때때로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재조직'을 겪고, 말하자면 재기록을 거친다. 그러므로 나의 이론에서 본질적으로 새로운 점은 기억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S. Freud, Extracts from the Flies Papers(1892-1899), 영어 표준판 전집 1권, 편지 52, 233.


(185) 라캉의 사후성 설명. (잘 볼 것.)

(186) 상상계의 주체는 상징계의 주체에 의하여 사후적으로 해석됨으로써 탄생한다.

(188) 라캉의 자아가 시간을 앞질러 도착한 허상 속에서 비로소 자신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듯이, 영상 시대에 인간은 영상적 구성물 속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선취한다.

(--) 사후성의 논리는 라캉 이후 데리다에 의하여 존재 이해 차원의 원초적 사태로 승격된다. (...) 데리다의 주요 용어들, 가령 흔적*기록*차연*텍스트*결정 불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대리적 보충 등은 많은 부분 프로이트의 사후성 개념에 대한 주석에 그 의미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어지는 데리다의 글도 중요)

(190) 차연은 대리적 보충이 암시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후성을 집약한다. 현전성을 구성하되 현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지각의 사건, 그 환원 불가능한 지각의 사건이 차연의 운동이다. 흔적은 현전적 형식으로 파악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그 지각자의 차연적 효과, 그것의 소급적이고 회귀적인 영향을 표시한다. 현전성은 이 흔적에 의하여 구성되는 동시에 탈구된다.

(193) 데리다는 이 아포리아를 <순수한 수행성>이 경험되는 지점으로 서술. 텔로스(목적지)아르케 에포케(판단 중지)

(198) 아포리아는 지식, 이론의 지평이 말소되는 장소


- 이창재. 계보학과 정신분석학 -니체와 프로이트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기본 개념들이 이미 니체의 사상 속에 표현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니체가 프로이트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니체와 프로이트가 갈라서는 지점은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문이 과학이 되기를 바랐으며, 그가 규명한 우리의 정신의 구조는 니체를 많이 읽지 않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니체의 그것보다는 훨씬 정치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거기다 이창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무의식(혹은 이드, 원본능)이 우리 정신의 구조 가운데 자리를 잡게 되면 변경이 쉽지 않은 그런 것이다. 이 부분을 니체는 잘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창재의 글은 대부분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을 구체화해주는 그런 역할을 해준다. 다만 좀 더 깊이 있는 차원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사실 이 글은 니체와 프로이트를 비교한 그의 저서 [정신분석과 철학] 그 중에서도 10장 "니체와 프로이트"와 많이 겹친다.]




(201) 철학자와 정신 의학자 사이의 거리감.

(202) 주 1. (라캉 정신분석 철학) 인간 정신은 주체와 자아,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의식은 자아의 일부.

자아 - 상상적인 자기애를 추구. (이 주 부분 자세히 읽어볼 것.) Robert Samuals의 책도 구입할 필요.

(203) 니체의 사유가 나치즘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활용.

(204) 프로이트가 당대의 독일어권 지성인들에게 열정적으로 숭배되던 니체의 사유에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정신분석학을 확립한 것처럼 서양의 저서들은 이야기. 정신분석학의 내용이 니체의 사유에 이미 대부분 표현.

(205)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여러 입장들을 차분히 숙지해 가면서,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부합되는 입장을 취하는 것. (나의 평소 생각과 일치.)

(206-207) 정신분석의 의미 아홉 가지 나열.

(207) 신경증 - 강박증. 히스테리(전환 장애)

(207) 정신분석학의 독창성은 바로 의식이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그 것>에 접근하는 고유한 탐구 방법론들을 발견해 냈다는 점과, 무의식에 대한 접근은 <관념적 인식>이 아니라 <정서적 인식>이어야 함을 발견한 점에 있다.

(208) 주 6. 정신분석학 기법 - 성찰/ 공감.

(209) 프로이트의 연구 성과 다섯 가지.

(220) 정신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의식은 무의식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지식은, <의식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식 능력이다>라고 믿어온 소크라테스 이후의 전통 정신론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다.

(222) 정신의 핵심 구조와 내용은 운명적으로 타자(외부 세계; 부모, 사회적 권위자들, 규범적 의미 체계)로부터 유래한다는 자각을 유도한다. 정신의 발생과 발달이 타자 관계에 의해 상당 부분 좌우된다는 자각은 정신 능력의 본유성과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해 온 전통 합리주의 철학 관점을 전복.

(---) 주 23. 라캉은 주체란 단지 상징적 기표들로 엮여진 대타자가 노니는 공간일 뿐이며, 자아란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이미지들인 소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발달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인간 정신(자아/주체)이 구조적으로 타자성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성>이라는 관념은 일종의 자기애적인 상상 기호로 해석된다.

(223) 자아 - 방어적, 현실 검증적

(224) 칸트의 정언 명령이 갖는 의미 - 초자아.

(226) 어떤 개인이 특정한 관념과 관점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 그 자체이기보다, 의식의 이면에서 역동하는 무의식적 욕구들로부터 자아를 방어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관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 철학자에게 지식 활동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일반을 사유 속에서 안전하게 정리하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들은 원본능(보충:Id)들과 거세 불안을 억압하고서, 의식과 개념과 논리를 통해 대상 세계에 대한 관념적인 정리를 시도함으로써 자아의 전능 감정을 만끽한다.

(228) 니체의 계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연관성 나열. 

(---) 쇼펜하우어 - 의지(Will), 니체 - 힘에의 의지, 프로이트 - 무의식

(230) 이 글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니체의 위버멘쉬(극복인)와 바이런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232) (18) 프로이트의 핵심 개념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리스 고전을 연구한 학자이기도 했던 니체의 [비극의 탄생] 9절에 이미 어느 정도 예시.

(235) 니체의 정신 발달 과정

1) 원초적 혼란 상태로부터 형이상학적 질서 단계로의 이행(낙타)

2) 형이상학적 관점과 관념들에 대한 계보학적 해체 단계(사자)

3) 계보학의 자가 당착성에 대한 자기 인식과 허무주의 단계

4) <환상>과 <실재> 모두에 대한 운명애적 긍정과 유희 단계(어린이)

(239) 니체 : 지혜로운 자는 적들을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친구를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240) 니체와 정신분석의 차이점 - 니체는 인간의 사유 관점, 근본 정서, 갈등과 환상들이 정신의 급속한 형성, 발달 시기인 유년기에 대부분 결정되며, 정신의 구조는 일단 형성되면 보다 강력한 체험이 있지 않는 한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니체는 삶의 근원성인 <힘에의 의지>가 본래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정신 역시 매 순간마다 변화에로 개방되어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이러한 낙관론은 인간의 주체적인 창조 활동을 통해 삶이 끊임없이 발달할 수 있다고 보는 당대의 낭만주의적 역사관과 모더니즘적 가치 신념을 반영한다.

(242) 니체는 의식의 자기애적 해석성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되도록 다양한 해석 관점들을 통해 삶을 다각도로 직면하고 유희하는 <극복인>의 삶을 시도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진실들을 방어적 환상과 편견 없이 직면하고 유희하려면 그 개체는 무의식적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강인한 정신적 힘을 이미 지녔어야만 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바로 이 대목에서 기존의 경직된 방어 기제를 수정*해체하고 자아를 강화시키는 구체적인 이론적*실천적 기술과 방법들을 보유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 박찬국. 니체와 하이데거: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과 존재의 철학

(245) 하이데거는, 니체가 근대와 근대를 가능케 한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나 사실은 근대와 전통 형이상학을 완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 . .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면 니체의 철학은 존재 망각의 극단이다.

(248)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육체와 감정 그리고 이성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항상 상황 내의 인간이다. 인간은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세계를 벗어나 무전제의 입장에 설 수는 없다. 아울러 인간은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이 처한 상황 역시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

(250) 신의 죽음--신의 권위의 상실. 고향 상실, 의미 상실.

(253) 진정으로 강한 자들이란 생성 소멸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들이다. 이렇게 강한 인간들에게 생성 소멸하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저주스러운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서 긍정해야 할 세계이다.

(254) 영원 회귀의 세계란 어떠한 의미도 방향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모래성을 쌓다가 부수는 어린애의 놀이처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이며 그것에는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 영원 회귀의 세계란 모든 종류의 목적론적인 의미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영원 회귀의 사상,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모든 질병과 고통 그리고 갈등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무한히 반복한다는 사상은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상이다.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상의 무게에 의해서 압살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상을 짊어지면서 가장 강한 인간으로 탄생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에 직면케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이 영원 회귀의 세계는 더 이상 무의미한 세계가 아니라 순간순간이 의미에 충만한 것이 될 것이다.

(255)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 문명의 본질을 권력에의 의지 내지 지배에의 의지로 보고 있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도록 몰아댐.

(257)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도 단순히 지배를 위한 지배를 목표하는 기술 시대 인간들의 존재 양상을 그리는 것.

(257) 인간이 권력에의 의지의 주체로서 등장하는 것은 근대에 와서야 가능(고대 - 존재자들의 본질. 중세 - 신의 계시)

(258)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존재자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에의 의지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권력에의 의지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

(260) 서구의 역사란 인간이 진실로 안주할 수 있는 시원적인 고향으로서의 퓌지스(Physis)를 점차 망각해 가고 그러한 퓌지스로서의 세계가 계산 가능하고 기술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들의 연관 체계로 전락.

(264) 하이데거가 볼 때, 현대 기술 문명의 위기는 인간이 세계와 존재자를 지배하려고 함으로써 세계와 존재자가 인간의 권력에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것들에서 성스러운 차원이 사라졌다는 데에 있다.

(265) 세계를 산에 비유할 때 하이데거와 니체의 차이.

(267) 하이데거는 고향 상실의 원인을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 이래 대두되어 온 존재 망각, 즉 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의 성스러움에 대한 망각에서 찾음.

(270) 융거: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이 . . .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생의 충일감과 고양감을 위해서 전쟁과 노동에 헌신하는 존재 방식.


-서동욱. 니체와 들뢰즈. 들뢰즈 존재론과 앙띠 오이디푸스 그리고 니체.

(274) <존재론> 차이와 반복, 그리고 일의성(오직 하나로 결정되는 성질)의 이론

       <오이디푸스 비판> 자본주의 및 식민주의를 포괄적으로 사냥.

(276) 플라톤 형이상학의 세 가지 항. 이데아, 모사물, 시뮬라크르

(279) 힘에의 의지 설명한 부분 중요. <힘의 의지는 마치 의지가 어떤 동기로 인해서 권력을 원하기나 하는 것처럼 심리학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280) <힘의 생성의 내적 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