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은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의 한 명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하는데, 특히 전작인 '테넷'(Tenet) 같은 영화는 흥미롭게 볼 수 있긴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과학적 가정들을 담고 있었다(시간의 흐름을 뒤집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이번 영화에서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 그러니까 실존 인물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일본 여행기 중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 추모 공원인 '평화 공원'에 대해 쓰기 위해서 였다). 물론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를 다룬 그의 영화가 가능했던 것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훌륭하고 방대한 전기인 'American Prometheus'가 2005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는 오펜하이머를 평면적으로 다루지 않고 복합적인 구성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영화는 컬러와 흑백으로 전개되는데, 컬러 부분은 1954년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과 관련된 청문회를 주축으로 오펜하이머의 회상을, 흑백 부분은 오펜하이머를 파국으로 이끈 스트로스라는 인물의 1959년 상무장관 청문회를 주로 다루고 있다(이 구조를 정확히 알고 영화를 보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인데,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청문회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좀 더 주목한 것은 원자폭탄의 개발과 투하가 과연 불가피했던가 하는 측면이었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비약적 발전은 물리학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영화에 나오는대로 1938년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던 '핵분열' 현상을 관측하게 되었다. 이듬 해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서로 원자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에 앞섰음에도 후발주자인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을 한 것은 미국 정부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과 함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많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 앞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던 '맨하탄 프로젝트'는 개발이 끝나기 전인 1945년 5월에 독일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함으로써 독일에 투하할 기회는 사라졌다.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을 거둔 것은 두 달 뒤인 7월 16일이었고, 미국은 이 원자폭탄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9일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다시 한 번 투하했다. 패색이 짙던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했다.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입자로 생각되었던 원자 내부는 사실은 대부분이 빈 공간이며 핵과 전자라는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 소립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전의 물리학 법칙을 완전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준 양자역학은 이제 인류의 거대한 전쟁에 뛰어들어 인류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가공할 파괴력을 지난 원자폭탄을 세상에 내놓으며 전쟁을 종식시켰다.
만일 재래식 무기로 미국과 일본이 계속 싸웠다면 그 피해는,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려우나 대략 25만 명 내외가 사망한 원폭 피해자의 숫자를 훨씬 능가했을 것이라는 예측에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는 중요한 것은 이 폭탄 투하로 인한 사상자가 자국의 국민이 아니라 군인을 포함한 적국의 국민이라는 점일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 폭파시켜야 하는가를 고심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폭탄에 의해 희생될 사람들을 애통해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이 폭탄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조선인 징용인을 비롯하여 이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 중에서 3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군비 경쟁과 함께 여러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총체적 파국을 불러올 핵 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지금까지 발사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인류는 핵으로 인한 공멸의 위협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원자력은 위험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원자력 발전처럼 효과적인 에너지 원으로 이용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체르노빌이나 일본 후쿠오카의 경우처럼 사고가 나면 그 영향력은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기도 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여러 모순적인 모습을 통해 인간의 다중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핵무기의 위협 아래 사는 현재 인류의 위태로운 상태 또한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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