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 (I)
김광규
염료상 붉은 벽돌집
봄비에 젖어
색상표에도 없는 낯설은 색깔을 낸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은 이 색깔
지붕에 벽에 잠시 머물다
슬며시 그 집을 떠난다
보일 듯 잡힐 듯 그 색깔 따라
눈이 좋은 비둘기는
종악이 울리는
아지랭이 속으로 날아간다
날다 지쳐 마침내 되돌아온 비둘기
옆집 TV안테나 위에 앉아
염료가 지저분한 벽돌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 1979(198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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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는 짚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색상표에도 없는 낯설은 색깔'이라는 표현이 시선을 끌면서 동시에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잘 포착되지 않는,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는, 그래서 '눈이 좋은 비둘기'는 그 '색깔 따라' '날아간' 것이다. 하지만 '지저분'한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리라. 일단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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