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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반달곰에게

by 길철현 2024. 1. 30.

반달곰에게

                                         김광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창조도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에 원인이 있었고

뒤이어 결과가 따랐다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은 다시 결과를 낳았다

오래된 원인과 결과가

새로운 원인과 결과로 뒤바뀌며

마침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는 오늘의 원인이고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며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고

내일은 오늘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원인과 결과를 끊으려는 미련한 곰아

새로운 원인을 오래된 결과라 부르고

오래된 결과를 새로운 원인이라 부르며

원인 없는 결과를 만들려 하지 마라

때로는 죽음도 하나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문지. 1983(1986).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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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론을 시로 푼 듯해 보이는 이 작품은 모두 24번의 원인과 결과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제목에 사용된 반달곰은 딱 한 번 '미련한 곰'이라는 말로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말도 뜬금없이 등장하고 있다. 멸종으로 인한 죽음에 처한 반달곰에게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현실의 답답함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족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 애매하다.  

 

(김우창) '반달곰에게'는 가장 분명하게 혁신적 새출발을 부정하는 시이다. 여기에서 김광규씨는 모든 것은 필연적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 얽혀 잇으며, 어느 하나를 원인으로 잘라내어 말하는 것은 틀린 일이고 또 어느 하나를 새로운 원인으로 내세우는 일도 사물에 대한 부분적인, 따라서 틀린 접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김광규씨는 전도서의 말을 빌어 이렇게 결론을 낼니다. 그러니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있겠는가.

(왜 제목이 반달곰이며, 반달곰이 갖는 의미 '원인과 결과를 끊으려는,' 인과론을 부정하려는 존재로 왜 반달곰이 제시되었는가? 인과론을 되풀이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 시는 무슨 큰 울림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