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낙산의 마음
김광규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삵괭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김광규. "크낙산의 마음". 문지. 1986. 34-35.
마루턱 마루터기 준말. 산마루나 용마루 따위의 두드러진 턱.
(산마루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
용마루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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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낙산'이라는 조어가 '크고 즐거운 산'을 의미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인간 사회에 지친 화자가 자연 속에 잠겨서 위안과 활력을 얻고 자신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는 내용이다. 평이한 문체지만 세부사항들이 독자에게도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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