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크낙산의 마음

by 길철현 2024. 2. 4.

크낙산의 마음

                        김광규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삵괭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김광규. "크낙산의 마음". 문지. 1986. 34-35.

 

마루턱 마루터기 준말. 산마루나 용마루 따위의 두드러진 턱. 

(산마루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

용마루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

'크낙산'이라는 조어가 '크고 즐거운 산'을 의미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인간 사회에 지친 화자가 자연 속에 잠겨서 위안과 활력을 얻고 자신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는 내용이다. 평이한 문체지만 세부사항들이 독자에게도 위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