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적지는 다카치호 협곡이었다. 이곳 또한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안내 책자에 소개되어 있었는데, 강물이 흐르는 협곡으로 중간에 강으로 떨어지는 폭포도 있어서 비경이라고 할 만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규슈 여행도 대충 마무리를 짓게 되는 듯했다. 구글을 참조하여 'Takachiho Gorge'라고 내비에 치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Gorge' 대신에 'Valley'라고 치니 한 곳이 떴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일반도로를 이용하면 목적지까지 7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안내 책자에서 얼핏 보았을 때 이곳 아소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듯했는데 7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머리는 곧바로 가지 못하고 돌아서 가야 하니까 그런가, 하고 합리화를 해버렸다. 아니면 마음껏 운전을 해보고 싶었던가?
아소산 공원 유료도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끝부분에서 올라갈 때와는 다른 곳으로 내려와야 했다(일방통행구간이었다). 그다음 직진을 좀 하니 길이 없었다. 다시 돌아 나와 길을 찾는데 내 앞의 차 한 대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이때 내 차 앞에 여우로 보이는 동물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차장 옆의 도로를 따라가 보았더니 도로가 나왔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는 싫어서 반대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시간이 10분 정도 더 늘어나긴 했으나 그 정도는 일곱 시간의 장도를 생각할 때 아무 상관이 없었다(운전을 하면서 도착 시간이 좀 줄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날은 벌써 많이 어두워지고 오가는 차 한 대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계속 내려갔다.
전망대 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남쪽으로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고라니인지 노루인지가 도로를 달려 숲으로 사라졌다. 규슈에서 운전을 한 지 3일 째인데 너무 한적해 무서울 정도였다.
325번, 57번 국도를 따라 달려 6시 50분경에 구마모토(熊本 웅본) 현의 현청 소재인 구마모토 시로 들어섰는데 퇴근 시간이라 교통 정체가 좀 있었다.
위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3번 국도로 들어서자 차량 통행이 좀 줄어서 여유를 가지고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구마모토 시는 상당히 큰 도시인 데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도시를 벗어나는데 40분 이상 걸렸던 듯하다(구마모토 시의 인구는 72만 명 정도로 규슈 섬에서 후쿠오카 시, 기타큐슈 시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시간이 여덟 시를 넘어가고 있어서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식사를 하고 싶었으나 차를 타고 지나면서 식당을 고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을 파는지도 잘 알 수 없는데 무턱대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변두리 지역에서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나오고 말았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목적지까지는 아직 먼데 시간은 9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중간에 호텔이 있을 만한 큰 마을도 눈에 띄지 않아서 268번 국도를 따라 계속 달려온 것인데, 무엇보다 배가 많이 고파 뭐라도 좀 먹어야 했다. 이때쯤 나는 이사( 伊佐 이좌) 시를 지나고 있었다. '불빛이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니까 숙소가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국도에서 벗어나 시내로 들어섰다. 하지만 작은 도시여서 그런지 호텔은 눈에 띄지 않고 시간이 늦어 대부분의 가게들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대로변에 호텔이 하나 보였으나 그곳은 피하고 싶었다. 좀 더 달려가니 편의점이 나와 일단 이곳에서 빵과 음료수로 허기를 달랜 뒤 아고다로 검색을 해보니 가까운 곳에 호텔이 하나 있었다(Hotel R 9 The Yard). 평점도 높게 나와 있어서 일단 결제를 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원래 제시한 가격에서 몇천 원 더 붙어 8만 5천 원 정도가 나왔다.
차를 몰고 호텔로 갔더니 뜻밖에도 컨테이너로 된 호텔이었다.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이미 결제를 했으니 바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좁은 도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음은 별로 없을 듯했다. 리셉션 건물 또한 컨테이너였는데 안에 아무도 없어서 잠시 있자니 여자분이 왔다. '지금 막 예약을 했다'라고 영어로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는 일어로 뭐라고 말했다. 번역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서 그녀와 나의 의사소통을 중계해 주었다. 문제는 내가 방금 전에 예약을 해서인지 아직 제대로 처리가 안 된 모양이었다. 여자분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일단 나에게 방을 주기로 했다. 나는 이 남자가 처음에는 호텔의 직원인가 했으나, 그는 자신도 손님이라고 했다. 도쿄에서 이곳으로 출장을 왔다고. 그와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는 그때야 내가 있는 곳이 가고시마(鹿児島 녹아도) 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안내판에서 본 '소기 폭포가 여기서 얼마쯤 되는가'도 물어보았는데, 그는 그 폭포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벽 한쪽에 관광명소들을 찍어놓은 사진들 중에서 '소기 폭포'를 찾아내어 나에게 가리켰다. 여기서 멀지 않다면 아침에 한 번 들렀다가 가도 될 듯했다.
그는 영어를 꽤 유창하게 했고 나도 그와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배가 너무 고팠고 긴 여정으로 피로가 몰려왔다. 그에게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 호텔로 오는 길에 본 스키야로 향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한 사람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고, 나는 좌석 앞에 놓인 주문기로 고기덮밥을 주문했다. 한국어 서비스가 되어서 편리했다. 반찬을 주문하는 것이 어색했는데 국도 없이 먹자니 너무 퍽퍽해서 국도 하나 주문을 했다.
길었던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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