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기 폭포에서 나와 48번 현도를 따라 전날에 이어 다카치호 협곡을 향해 달려가는데 먼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사진에 담지는 못했으나, 어디를 가든 규슈는 화산의 섬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했다.
48번 현도에서 나와서 53번, 55번, 50번 현도, 223번 국도를 지나 다시 1번 현도로 목적지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데 차가 자꾸만 산길로 들어가고 있어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화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뭉글뭉글 계속 솟구쳐 올랐다.
소기폭포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10시 반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건만 이곳 역시 주차료는 500엔이나 했다. 차를 세우고 넓은 산길을 따라 좀 올라갔다. 이곳이 다카치호 협곡이 아니라는 건 점점 더 분명해졌건만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제부터 7시간 넘게 달려왔는데. 혹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불현듯 협곡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헛된 기대와는 달리 길은 계속 산으로 이어졌고, 신사가 있음을 알리는 도리이에 이르렀다. 내려오던 7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나를 보고 뭐라고 말했다. 내가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스"(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칸코쿠진?"이라고 되풀이하면서 화들짝 놀랐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분이 놀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나는 한국인이 이런 외진 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추측했다.
엉뚱한 곳으로 왔다는 허탈함을 뒤로하고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등산을 좀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전날 올랐던 아소산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도 없어서 신사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시간상 좀 무리가 있더라도 다카치호 협곡을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내가 도착한 이곳은 다카치호 협곡이 아니라 다카치호-가와라(高千穂-河原 고천수-하원)였다. 여행 안내책자에서 다카치호 협곡이 아소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무지와 부주의, 동명의 다른 장소라는 우연의 일치, 거기다 부족한 내비게이션 정보 시스템 등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돈 것은 아니지만 소원대로 운전은 정말 물릴 정도로 한 셈이었다. 거기다 하원이라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처럼 상징적이긴 하지만 강의 근원이 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따로 그런 곳이 있는 듯하지도 않았다. 글을 쓰면서 당시에 찍은 사진과 자료들을 참조해 보니, 이곳은 다카치호노미네(峰 봉, 1573m) 등 주변의 화산을 오르는 출발지로 유명했다.
그리고, 기리시마 신궁과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로워 다소 상세하게 적어본다. 기리시마 신궁(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신궁은 신사 중에서 일본 황실과 관련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다. 일본의 신화에 따르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지상으로 강림할 때 다카치호노미네 근처 산봉우리로 내려왔고, 현지의 공주와 결혼해 인간의 수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천황 가의 직계 시조가 되는 신이다. 이 기리시마 신궁은 그를 기리기 위해 6세기경에 건축되었다. 이 신궁은 다카치호노미네 기슭에 세워졌는데, 788년 다카치호노미네 옆에 있는 오하치 산의 분출로 파괴되었다(이 신궁을 기리시마 신궁 원궁이라고 한다). 두 번째 기리시마 신궁은 1235년 화산 분출로 파괴되었다. 이 신궁은 다카치호-가와라에 위치하고 있었다(이 신궁을 기리시마 신궁 고궁이라고 한다. 내가 발길을 돌린 곳이 이 신궁 유적지 앞이었다. 일본 노인이 깜짝 놀란 이유가 한국인이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었을까?) 현존하는 기리시마 신궁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산기슭에 1715년에 재건되었으며, 2022년 본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국보로 지정되었다(전반부는 인터넷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고, 뒷부분은 안내판과 인터넷에 나온 내용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단군 신화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신화에서도 왕은 신의 후손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지배를 합리화하고 집단을 결속시키는 효과를 동시에 노린 것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아니지만 그나마 일본의 역사, 특히 천황 가와 관련해서 중요한 곳을 들렀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내려와서 다시 보니 등산로 입구에 큰 도리이가 있었다.
허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방문객 안내소에 들러 다카치호노미네와 주변 산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영어 자막에 의지하며 잠시 보다가 나왔다.
뜻하지 않게 찾게된 이 타카치호-가와라는 좀 더 조사를 해보니 기리시마긴코완(霧島錦江湾 무도금강만) 국립공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1934년 운젠 국립공원과 함께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기미시마 국립공원은 기리시마 산군('가고시마 북쪽, 해발 1,500미터 전후의 높은 산봉우리가 23개나 연이어 있는 웅장한 화산' 유흥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 293)을 중심으로 한 지역인데, 이후 긴코완 지역도 국립공원에 편입하게 되어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기리시마 산군의 최고봉 이름은 흥미롭게도 가라쿠니다케(韓国岳 한국, 1700m)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은 산이 너무 높아서 정상에 올라가면 한국이 보인다는 설이 있어서라고 한다(유흥준은 한국악, 그러니까 가라쿠니다케의 유래를 일본 [고서기]에서 찾는다. '이곳이 한국을 향하고 있'[302]다라고 나오는데, 여기에서의 한국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나라명이 아니라 한반도를 일컫는다. 가라쿠니다케의 정상에 오른다고 한들 한반도가 보일 리가 없으므로 [고서기]에 나오는 말이 좀 더 근거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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