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불을 켜고 몇 번의 깜박임으로 눈이 초점을 잡는다. 청회색 죄수복을 입은, 백호 머리의, 비쩍 마른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가 있는 공간은 정육면체이다. 은회빛의 여섯 면은 각각 가로 세로 1.5미터가량의 아홉 개의 정육각형으로 되어 있고, 정육각형 안에는 또다시 각각 네 개의 정육각형, 이 작은 정육각형에는 컴퓨터 기판을 연상시키는 선과 도형이 그려져 있다. 각 면에 있는 아홉 개의 정육각형 중 중앙에 있는 것만은 강철로 된 해치이다. 이 해치에도 네 개의 작은 정사각형이 있는데, 선과 도형은 없다. 사내가 자신의 정면에 있는 손잡이를 왼쪽으로 한 바퀴 돌리자 해치가 덜컥하고 열린다. 해치는 옆방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사내는 해치 옆의 사다리 같은 막대들을 딛고 올라서서 옆방을 들여다본다. 그 방은 사내가 있는 방과 똑같은 정육면체인데 푸른빛이라는 점만 다르다. 사내가 다시 내려서자 해치는 자동으로 닫힌다. 바닥에 있는 해치를 열자 그 방도 똑같은 정육면체인데 이번에는 붉은빛이다. 세 번째로 사내가 해치를 연 방은 금빛이다. 연결 통로를 지나 사내는 그 방으로 들어선다. 사내의 눈이 금빛의 방을 둘러본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크게 움찔한다. 사내의 놀란 얼굴, 왼쪽 가슴께에 검은 글씨로 ALDERSON이라고 적힌 청회빛 죄수복에 피가 비치고, 금 그어진 사내의 얼굴에서도 피가 흐른다. 흘러내려 금빛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다음 오른쪽 머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뇌가 보이고, 토막토막 난 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온몸이 세로로 정확하게 이등분된 가운데 머리부터 떨어져 내린다. 토막 난 몸통이며 다리도 무너져 내리는데, 채 떨어져 내리지 않은 내장과 뼈가 보인다. 떨어져 내릴 만큼 떨어져 내리자 틈새가 넓은 그물망 같은 칼날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칼날이 소리도 경쾌하게 착착 접혀 올라간다.
(200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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