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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학작품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정영목. 민음사. (George Orwell. Homage to Catalonia)1938.

by 길철현 2024. 9. 9.

- 후감

이 작품은 저자가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하여 겪은 일과 저자 자신의 당시 상황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담고 있다. 일종의 다큐멘터리임에도 오웰의 소설적 문체로 인해 흥미진진하다(안타깝게도 한글 번역으로 읽었는데, 영어 원문으로 읽을 기회를 노려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스페인 내전이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듯 파시스트와 공화파의 대결일 뿐만 아니라, 공화파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혹은 전국노동자연맹 간에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웰이 경험한 전쟁은 대규모의 살육이나 비극이 아니라 지지부진한 소모전과 그 속에서 생존하려는 몸부림으로 비친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목에 총을 맞았을 때이다. 

 

총알이 목을 관통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목 한가운데를 관통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나 짐승이 잇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처음 떠올린 것은, 다분히 관습적이게도, 아내였다. 두 번째 떠오른 것은 세상 -- 생각해 보면 결국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세상이었다 -- 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였다. 나는 그 감정을 매우 생생하게 느낄 만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 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나는 또 나를 쏜 사람 생각도 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스페인 병사일까, 외국인 병사일까. 나를 맞히었다는 사실을 알까 등등. 그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다면 나도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일 그 순간에 그가 포로가 되어 내 앞에 끌려왔다면 잘 쏜 것을 축하해 주기만 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정말로 죽어가고 있었다면 완전히 다른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240)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타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는 오웰의 적극성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발췌

13)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28) 1896년 독일에서 제작한 모제르 소총이었다. 40년도 넘은 것이었다. 

34) 어쨌든 나는 생애 최초로 인간을 겨냥하여 총을 쏘아보게 되었다. 

35) 참호전에서는 다섯 가지가 중요하다. 땔감, 식량, 담배, 초, 그리고 적이다.

40)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모든 의용군이 위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물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명령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지가 동지에게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 장교도 있고 하사관도 있었으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군사적 계급은 없었다. 계급 명칭도, 계급장도, 뒤꿈치를 소리나게 붙이며 경례를 하는 일도 없었다. 의용군 내에서 일시적이나마, 계급 없는 사회의 산 표본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없었다. 그러나 평등의 수준은 내가 그때까지 보아온 모든 것 이상이었고, 또 내가 전시에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71)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었다. 스페인 외부의 반파시스트 언론은 이 사실을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었다. 쟁점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로 좁혀졌다. 혁명적 측면은 최대한 은폐되었다. 다른 곳보다 언론의 집중이 심하고, 또 대중이 언론에 쉽사리 기만당하는 영국에서는 스페인 전쟁에 대해서 오직 두 가지 이야기만이 입에 오르내렸다. 하나는 기독교 애국자들과 피를 뚝뚝 흘리는 볼셰비키들의 대립이라는 우익의 이야기였다. 또 하나는 신사적인 공화주의자들이 군사 반란을 진압하고 있다는 좌익의 이야기였다.

94)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들 자신이 모든 나라의 전투적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란 자본주의의 고상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쳐왔다. 먼저 <민주주의는 사기다>라고 말한 다음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전술이 아니다. 

110) 우리는 6,70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내 기억은 뿌옇게 흐릿해졌다. 그저 일련의 단편 사진들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112)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둠 속에서 쥐가 내 몸을 타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먹으로 한 마리를 기분 좋게 날려 보낸 적도 있다. (1984에서 고문의 방법으로 쥐를 활용하는 것)

140)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 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140)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143) 전선을 떠나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바지 속에 기생하는 이는 아무리 죽여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양말도 없이 지냈다. 군화 바닥은 거의 닳았다. 맨발로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뜨거운 목욕을 하고 싶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싶었다. 하룻밤이라도 이불을 덮고 자고 싶었다. 이러한 욕구는 정상적인 문명 생활을 할 때 생겨나는 그 어떤 욕구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이었다. 

156) 혁명이 진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혁명이 더 진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결국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162) 대체로 치안대가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 계급을 <추적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181) 역겨움과 격분이 강렬하게 몰려왔다. 이런 사건에 참여하게 되면 미약하나마 스스로 역사를 만드는 셈이 되니 의당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잘한 물리적 일들이 늘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전투 내내 나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기자들이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내놓는 올바른 상황 <분석>이란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내가 주로 생각했던 것은 이 비참한 내분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밤낮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붕에 앉아 있는 일의 고생과 권태,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배고픔뿐이었다. 사실 우리는 월요일 이후로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이 일이 끝나자마자 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내내 자리잡고 잇었다.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백십오 일 동안 전선에 있었다. 그런 후에 약간의 휴식과 안락을 찾아 바르셀로나에 왔다. 

195) 마찰의 직접적인 원인은 모든 개인 무기를 반납하라는 정부 명령이었다. 이것은 중무장한 <비정치적> 경찰력을 만들겠다는 결정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경찰력에서 조합원들은 배제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그 다음에는 전국노동자연맹이 통제하는 주요 산업 가운데 몇 가지를 접수하겠다는 조치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203) 외국의 반파시스트 매체에서는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한쪽 측면만 부각되었을 뿐이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 시가전은 <등뒤에서 스페인 정부를 찌르는> 등의 행위를 하는 불충한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기주의자들이 일으킨 봉기로 표현되었다.

221)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은 결국 이런 뜻이 된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사람들, 외국에서 그들에게 공감하여 그들을 도우러 온 많은 사람들 -- 그 대부분은 파시스트 국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 그리고 수천 명의 의용군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된 엄청난 규모의 첩자 집단이다. 

232)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개인적 자유나 진실한 언론 보도는 군사적 효율성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4) 그러나 프랑코는 단순히 이탈리아와 독일의 꼭두각시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봉건적 대지주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케케묵은 교권주의적 * 군국주의적 반동을 표방하는 존재였다. 인민전선이 사기일지는 모르나, 프랑코는 시대 착오였다. 오직 백만장자나 낭만주의자들만이 그가 승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240) 총알이 목을 관통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목 한가운데를 관통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나 짐승이 잇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처음 떠올린 것은, 다분히 관습적이게도, 아내였다. 두 번째 떠오른 것은 세상 -- 생각해 보면 결국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세상이었다 -- 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였다. 나는 그 감정을 매우 생생하게 느낄 만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 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나는 또 나를 쏜 사람 생각도 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스페인 병사일까, 외국인 병사일까. 나를 맞히었다는 사실을 알까 등등. 그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다면 나도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일 그 순간에 그가 포로가 되어 내 앞에 끌려왔다면 잘 쏜 것을 축하해 주기만 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정말로 죽어가고 있었다면 완전히 다른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249) 목에 관통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선뜻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예 총에 맞지 않았더라면 더 큰 행운이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91) 결국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건넜다. 기차에는 일등칸도 있었고 식당칸도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카탈로니아에는 최근까지도 기차의 등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사 두 명이 기차를 돌아다니며 외국인들 이름을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식당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품위 있는 사람들이라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배하던 여섯 달 전만 해도 프롤레타리아처럼 보여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옮긴이의 말

305) 스페인 전쟁과 1936-1937년의 기타 사건들은 정세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았고 그 이후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1936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어졌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