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 일방적 시각에서 쌍방적 시각으로
5) 한일 간의 불편한 관계는 그릇된 역사인식과 역사왜곡에서 비롯된다. 정말로 한일 양국의 역사서들은 곳곳에서 편협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7)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왕까지 죽이면서 싸웠던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반면에 백제와 왜는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 왜는 가야의 철기문화를 받아 비약적인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야와 함께 신라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백제는 왜에 문명을 전해주었고, 그 대신 수시로 군사적 지원을 받은 맹방이었다.
일본을 답사하면서 백제 무령왕이 규슈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663년 백촌강 전투 때 일본이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무려 2만 7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는 사실, 나당연합군에 패한 일본과 백제 망명인들이 다자이후 에 수성과 대야성을 백제식으로 쌓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사실을 보면 그때 그런 일이 다 있었던가 스스로 놀라게 된다.
8) 임나일본부설
12) 왕인?
14) 일본의 역사학자 중에는 일본에 천황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7세기 후반 덴지 천황 때부터이므로 그 이전은 왕 또는 여왕으로 이후는 천환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 제1부 : 북부 규슈
25) 나라*교토 지방에서는 일본 고대국가 탄생에 기여한 도래인(덧붙임- 패망한 후의 백제인)들의 유적과 사찰, 도쿄 지방에서는 개화기에 얽힌 이야기, 쓰시마에서는 왜구와 조선통신사 이야기, 규슈 지방에서는 벼농사를 일본에 전해준 초기 도래인과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 남긴 자취를 찾아가는 것이 핵심주제가 된다.
27) 요시노가리 유적지 -- 청동기시대
28) 그네들의 생활문화를 보면 처음에는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에 감탄하다가 나중에는 그 천편일률적인 것에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정원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손길로 매만진 것에 감동하다가 나중에는 우리 정원의 자연스러운 멋과 친숙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런 상대적 비교를 통해 한편으로는 배우고 한편으로는 우리 문화의 특성을 확인하게 도니다.
31) 조몬 토기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1만 2700년 전)
39) 요시노가리 유적이 놀라운 점은 마을과 무덤만이 아니다. 여기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모두 한반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공인된 학설이다.
132) 여행은 퐁광을 보는 것이 기본이고 목적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가는 과정인데 차 안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166) 불의 여신 정이 - 문근영
169) 혜산: 조선 도공의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도 수용하고 일본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하면서 일본 도자기로 정착시켰죠. 그리고 나베시마야키라는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해냈어요.
192) 일본에는 3,893개소의 온천지역이 있다고 함.
205) 이근혁 ; 일본의 신사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입니다. 신도는 일본인들의 민족싱앙으로 정신생활의 기반입니다. 그러나 신도에는 교조도 경전도 없습니다. 체계적인 종교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일종의 전통문화일 따름입니다. 다른 종교가 경전을 바탕으로 한 교리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면 일본의 신도에는 그러한 교리가 없습니다. 신앙적 믿음이 아니라 마음의 안식을 찾는 정도의 기능만 하죠. 그래서 일본의 신도를 '종교 이전의 원초적 종교'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206) 신사보다 격이 높은 곳을 신궁이라 합니다.
216) 백촌강 전투: 663년 8월 27일과 28일에는 백제*왜의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이 백촌강(금강 하구)에서 혈전을 벌였다. 결국은 백제와 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선의 반을 잃고 병사 1만명이 전사했다. . . .
이 전투는 동아시아 4개국이 뒤엉킨 일대 혈전이었다. 백촌강 전투에서 회생할 수 없는 참패를 당한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은 대거 일본으로 망명했다.
222)시- 2시간 각 - 30분
225) 다자이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의 하나는 몽골의 침입이다. 1274년 1차 침입 때는 몽골군은 하카타항으로 들어와 후쿠오카 일대를 초토화하면서 일본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일본군은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몽골군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 행운이 따라주었다. 그때 몽골군은 육지에 진을 치지 않고 모두 배로 돌아가 숙박했는데 그날 밤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몽골 전함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침몰해버린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폭풍을 가미카제(신풍)라 부른다.
일본인들은 몽골의 침입을 '원구의 침략'이라고 부르고 한편으로는 여몽연합군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일본을 침략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만들면서는 심지어 고려가 몽골의 힘을 업고 일본을 침략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여몽연합군의 대다수가 고려 병사였고, 배도 고려가 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나라의 강업으로 징집된 것이지 고려의 선택은 아니었다.
--) 이노우에 야스시 : 역사소설가
262) 구로다 세이키 - 외광파라는 일본화된 서양화풍으로 신선한 충격을 일으키고 도쿄미술학교에 서양학과를 설치한 화가로 우리나라 초기 서양화가들은 거의 다 그의 영향을 받았다.
266) 심당길 - 후손 심수관 / 박평의의 후손 - 일본인으로 완전히 귀화하여 일본 외교가의 명문으로 변신(박무덕 -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301) 한국악. 기리시마 연봉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700m.
*일본의 풍토와 고대사 이야기
323) 7천 개의 작은 섬
면적 - 38만 평방킬로미터(한반도의 1.7배). 인구 1억 3천
산 - 2000미터 이상 500개(후지산 3,776미터)
324) 습합 - 일본문화는 전통의 지속성이 아주 강하다. 그리고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도 급속히 밀려오지 않고 이질적인 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주 서서히 녹아들었다.
325) 일본 열도가 대륙에서 분리된 것은 1만 4천년 전.
326) 조몬시대 1만 4천년 -- 기원전 300년
야요이 시대 --기원후 300년
고분시대 --600년
아스카시대 550년 --710년
나라 시대 710-794년
헤이안 1185
가마쿠라 1333
무로마치1573
이즈치 모모야마 1603
에도 1867
메이지 1912
다이쇼 1926
쇼와 1989
헤이세이 현재
337)16세기 말, 일본 열도의 천하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대륙 진출의 야망을 품고 한반도를 발판으로 중구, 나아가서는 인도까지 전령하겠다는 원정을 감행했다.
342) 중국은 제 민족을 통어하면서 중심부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외교적 방책에서 나온 것임에 비해 일본은 일본 열도 안에서 천황임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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