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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책을 읽다

이희근.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책밭. 2013

by 길철현 202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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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도살업과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에 백정은 나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백정은 그러나 예전에는 도축을 하는 부류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그런 사람은 도한, 도자라 했다) 통칭이었다.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면 양인이었다.] 그런 관심과, 또 '재인' 이야기에 좀 더 역사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생각 등으로 이 책을 구입해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백정이 거슬러 올라가면 이민족, 북방 유목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 신분은 양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천민 취급을 당해 토착 정주민들로부터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는 것, 조정은 이들을 일반 백성과 융화하도록 하는 한편으로는 이들의 실제 생계를 박탈하는 이중성을 보였다는 것(그래서 많은 범죄자를 양산했다), 하지만 백정 사냥꾼들은 호랑이 사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외국 군대와의 전투에서도 뛰어난 전투력을 선보였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백정 중에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의 자취를 추적하여 그들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듯하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동학 혁명 당시 '월평 집강소'를 제공한 '동록개'라는 인물 또한 좋은 소재이다. 

 

신분 제도는 철폐되었지만, 돈과 학력, 권력 등으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나뉘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발췌]

- 우리는 과연 단일민족인가?

6) [성종실록] 백정이 차지하는 비율이 평민의 1/4~1/3을 차지했을 정도였다. 백정이 누구이던가. 그들은 북방 유목민의 후예다.

7) 양수척, 재인, 화척, 달단. 

15) W. F. 샌즈. 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집문당. 1999. 

20) 사냥꾼을 고용 : 그들의 신장은 모두 6피트가 넘었다. 그들 중에는 화려한 빨간 머리 외관에 빨간 턱 수염,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23) 호종 - 오랑캐

29) 백정 중 도자 혹은 도한으로 불린 도축꾼은 짐승을 잡고 고기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43) 실제 고려시대에는 백정이 재인 및 화척과 같은 부류를 가리키는 호칭도 아니었다. 백정은 고려시대만 해도 일반 백성 중 한 부류를 의미했다. 고려시대의 16~60세의 성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역이나 정역을 져야 했는데, 바로 이 군역*정역 부담자들을 정호라고 불렀으며 그렇지 않은 나머지 백성들을 백정이라 했다. 이들 백정 또한 완전히 면제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관청이나 군대 등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되는 자들이었다. 그려 때 '재인'은 연예인이이었다. 

 

고려사에 재인들이 군진 앞에서 북을 울리는 등 잡희,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서커스의 일종을 공연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51)재인과 화척, 즉 양수척의 후예가 백정으로 개칭된 것은 세종 5년 10월 8일의 일이다.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재인과 화척이 본래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천하고 호칭이 달라 백성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5년 10월에 그들이 따돌림당하지 않고 평민과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백정으로 고쳐 부르자는 병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61) 성대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는 백정이다. (60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는 백정이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도 백정이니, 그들이 가장 천하기 때문이다. 청성잡기)

63) 명주옷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의 평상복인 넓은 소매의 겉옷조차 입을 수 없었다. 물론 망건, 가죽신도 착용할 수 없었다. 또한 평민이 쓰는 검은 옻칠을 한 갓 역시 쓸 수 없었다. 심지어 백정은 어링아이에게조차도 늘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부를 정도로 굴욕적인 차별을 받았다. 

(동록개 - 동네개라 불린 데서. 동록개의 꿈/ 김제 원평 집강소) *****

66) 진짜 '서울 토박이'는 한반도 재래 거주민이 아니라, 깊은 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호랑이와 표범, 멧돼지와 조류를 사냥하며 살았던 거란족의 후예라고 보는 게 옳다. 

71) 정안국 -- 발해 유민들이 세운 나라.

85) 원나라이 장기간에 걸친 한반도 경략에 따라 몽골인들이 이 땅에 뿌리내린 경우. 

110) 조선시대에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비쌌다. 실학자인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거위는 한 마리에 4냥이고, 돼지고기는 한 근에 1전 2푼이고, 쇠고기는 한 근에 7~8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돼지는 사람과 식성이 비슷하여 비싼 곡물을 먹여야 했음. 

121)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인해 백정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잃어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가죽 값의 상승은 백정 도축행위를 불러왔고 밀도살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203) 백정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한편, 평민 및 천민과의 결혼을 허용하자는 이 의견은 1451년에 "그 법을 더욱 밝혀서 (백정을) 평민과 혼인하게 해야 합니다"는 하위지의 건의로 국왕의 승인까지 받았다. 

211) 행장제도 -- 이동의 자유 제한

214) 백정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즉 전래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게 위해 범법자가 되든지, 아니면 위정자들의 의도대로 농민이 되어 합법적인 생활을 유지하든지 양자 간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국가 권력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223) 눈 한 번 질끈 감고 불법 도축을 하면 한몫 챙길 수 있는 상황에, 백정을 사사로이 부리는 사대부들과 관료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그들 스스로는 양반이기에 국왕이 눈을 감아주는 처지였지만, 애꿎은 백정은 범죄자로 내몰리게 된 상황이다. 

225) 조선 왕조가 개창된 지 60년 만에 전국의 중죄인 가운데 백정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절반이나 됐다는 정보가 있다. 

228) 백정이 범죄의 온상이 된 것은 도축 금지령만 아니라, 그들의 오랜 생활방식인 유랑마저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처벌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57) 백정 - 유목, 유랑. -- 한반도 재래의 토착민들로부터의 차별. 왕조의 집권층의 견제

259) 백정 그룹 -- 한반도 정착민의 일부로 뿌리를 내려감. 천대와 멸시는 그대로 존재. 

261) 백정 출신 사냥꾼 -- 외국의 침략과 같은 긴급 상황에 동원. 

267) 백정을 비롯한 천인들은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으로 벼슬길에 오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벼슬자리 임용, 즉 출사한 백정들 가운데는 차관직인 참판과 같은 고위직에 진출한 자도 꽤 많았다. 임진왜란 때 삼도순변사 신립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했던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은 자신의 책 [상춘고]에 백정의 신분이면서 전공으로 무관이 되어 참판의 품계까지 오른 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293)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에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315) 광성보 전투에서만 조선군 350명이 희생당했다. 미군 전사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랑이 사냥꾼을 포함한 무명의 용사들이 치른 목숨의 대가로, 미군 역시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원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329) 백정은 본래 양인이다. 또한 왕조의 호적문서에도 '양인'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들의 처지는 다른 양인들에게서, 또 양반 사대부로부터도 멸시의 대상인 천민일 뿐이었다. '양인'이었지만 '양인' 대접조차 받지 못했던 것이다. 

331) 백정이 결혼식 때 의관, 곧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양산을 사용한 사건(1809년) --집을 파괴, 빌려준 사람까지 난타. 

339) 백정 박성춘  -- 사회운동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