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실마리
새파란 하늘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숨은 마음 기혀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끝 같이
* * *
님두시고 가는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밤은 캄캄한 어느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힌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
* * *
문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 뿐이구려
희끗 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소색이느뇨
* * *
저녁때 저녁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어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어가오
* * *
풀우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섭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우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버린다
* * *
푸른향물 흘러버린 어덕우에
내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 보실 가을눈이 그나래를 치며
허공의 소색임을 들으라 한다
* * *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별이 되오리
뫼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김영랑. "영랑시집". 1935. (1930년 "시문학"에 위의 제목으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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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을 대하는 바늘끝같이 예리한 곤두선 정신의 강조.
2. '님두시고'라는 표현이 이상하다. 님을 두고 가는 주체는 나일 텐데, 왜 '두시고'라는 높임말을 썼을까? 이별의 정한이 '캄캄한 ... 시골'과 '이슬같이 고힌눈물' 등으로 애절하게 제시되고 있다.
3. 가을 성터에서의 정취를 노래.
4. 외로움, 눈물 등은 김영랑 시의 단골 소재. 이 편은 반복되는 '저녁때'와 '눈물을'이 시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5. 이슬을 풀의 눈물로 보았는가? 그걸 '정기가 꿈같이 오'른다고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가슴이 입을 벌린다는 표현 또한 재밌다.
6. 일곱 수 중 가장 시적이다. 서정주의 '동천'을 약간 연상하게 한다.
7. '뫼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인지? 무덤에 든 사람이라면, 그 무덤은 '좁은 길가'에 있어서 뭔가 잘 맞지 않다. 하지만 무덤에 든 사람이 아니라면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4행에 아쉬움이 남는 시편이다.
이 시편들로 볼 때 영랑은 애잔한 정서를 시어를 탁마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가 주는 울림과 그 한계 등을 생각해 보게 한다.
기혀: 기여이?
애끈한 : 창자가 끊어질 듯 슬픈
조매로운 : 조바심나는. 초조하고 안타까운. 애절하고 간절한. (조매롭다)
고힌 : 고인
문허진 : 무너진
소색이느뇨 : 속삭이느뇨
버린다 : 벌린다?
향물 : 향기나는 물?
어덕 :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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