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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161109) 다시 언어 이야기

by 길철현 2016. 11. 9.

 

인간의 사회화 중 가장 큰 부분은 인간 언어의 습득일 것이다. 그런데 이 언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언어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일찌기 플라톤은 [크라튈로스]에서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살펴보았고, 헤르더만은 인간의 이성의 발달에서 언어의 기원을 찾았으며, 루소는 그와 반대로  감정의 토로를 인간 언어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했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봄으로써 인간 언어의 작위성에 주목했다. 근래에 들어 촘스키는 인간은 '돌연변이로 인해 언어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같은 언어 집단 속에서 언어는 대단히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숱한 오해와 기만과 불화의 큰 원인이기도 하다. 지금에 와서 인간에게서 언어를 빼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언어를 우리는 너무나 무반성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삶이 무엇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큰 화두라면, 언어가 무엇인지 또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지닌다.

 

[덧붙임 20241213] 언어로 언어를 생각한다는 것은 난제이다.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가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것처럼,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생각한다는 것에는, 주어진 언어가 가하는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언어에 대한 생각을 전개해 나갈 수는 있으리라. 거칠게 말해 플라톤은 언어와 그 언어의 대상이 되는 사물 사이의 필연성을 주장하지만, 나는 언어가 사회적 규약 이상의 것인가 하는데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루소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는 메를로-퐁티의 주장, 즉 '인간의 깊은 필요(정확한 인용은 아니다)'에 맞닿아 있다는 주장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언어의 확실성을 담보해 주지는 못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세상 혹은 외계라고 일컫는 것이 우리의 언어와 맞물려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하지 않은가? 바꿔 말해 세상이 우리의 언어와 관계 없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말조차도 언어의 개입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지만, 세상이란 언어의 그물에 포착될 때만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박이문은 이 문제를 존재와 인식의 차원으로 나눠서 설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잘 모르지만 세상이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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