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국문학작품

매슈 아놀드 - [교양과 무질서] (Matthew Arnold. Culture and Anarchy )(150825)

by 길철현 2016. 11. 29.

*Matthew Arnold. Culture and Anarchy (0825)


[핵심어] culture perfection disinterestedness right reason and will of God


[종합 시험 현대 비평을 준비하는 과정에 문화론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면서 엘리엇의 Notes Toward the Definition of Culture를 읽고 난 다음, 예전에 부분적으로 읽었던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아놀드도 엘리트주의 내지는 보수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느낌이라(거기다 아놀드는 엘리엇보다도 이론적으로 더 성긴 면도 있는 듯해서)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는 책이었다.]

 

영국의 19세기에 대해서는 대학원에서 산문 시간이나 여타 다른 시간에 많이 배웠기 때문에 나름대로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 또한 발췌독으로 수업 시간에 배우고 토론도 했었다. 그런데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다음 책 전부를 읽고 난 다음의 내 느낌은 그렇게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영국의 19세기는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로 영국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이고, 또 우리가 흔히 중산층(middle class)이라고 일컫는 사회 구성원이 사회의 중심세력이 된 시기이다. (이들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1,2차 선거법 개정(1832, 1867)이다.) 아놀드는 이 글에서 사회의 구성원을 Barbarians, Philistines, Populace로 삼등분하면서 각 계급이 지닌 문제점과 동시에, 당시 사회의 중심 세력인 Philistines에 의해 좌우되는 영국의 문제점을 진단하려 하고 있다. 그가 특히 우려하고 있는 것은 이 글이 나오기 얼마 전에 있었던 1866년의 하이드 파크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무질서(anarchy) 상태이다.


그는 급변하고 있는 영국의 상황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culture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교양을 인간적 완성’(human perfection)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살펴보자.

 

culture, with its disinterested pursuit of perfection, culture, simply trying to see things as they are, in order to seize on the best and to make it prevail, is surely well fitted to help us to judge rightly, by all the aids of observing, reading, and thinking, the qualifications and titles to our confidence of these three candidates for authority, and can thus render us a practical service of no mean value.

 

이 부분은 아놀드 생각의 지향점과 그것의 한계, 그리고 그의 이상주의적인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완성을 향한 추구라는 것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지향점이지만, ‘사심이 없다는 표현에서는 여러 의문이 떠오른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기본 관념에서부터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는 표현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 계급적 이익에서 자유롭기가 지난하며, 더 나아가 볼 때에는 국가적인 이익, 또는 범위를 확대할 때에는 인간 중심주의에 함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놀드의 이러한 견해는 19세기의 주류 생각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가 강조하는 그리스*로마적인 사고방식, 즉 고전적 사고방식의 되풀이일 수가 있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생각이 분명 필요하거나 또는 이전의 사고의 그릇된 부분을 버릴 필요도 있을 것인데, 그는 이 글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나온지 10년 가까이 지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을뿐더러, 무신론적인 태도 자체를 비난하고, 기독교 정신, 헤브라이즘의 기본 정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 인간관이 보수적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애쓴다라는 것도 그가 전통적인 사고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지닌 문제점이나 한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이에 반해 동시대인인 밀은 언어와 사물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취임 연설]) ‘최상의 것을 포착하여 그것이 성행하도록 만든다는 것 또한 애매한 말이다. 최상의 것을 판단하여줄 주체가 누군인가 하는 문제에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이 인용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아놀드의 태도는 물론 기본적으로 인간이 지나치게 성급하게 행동하기보다는 보다 진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의가 되지만, 그것이 전통이나 권위에 대한 지나친 숭배가 될 때에는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지적처럼 변화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아널드는 탁월함과 가치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면서도, 그 이면에는 필수적인 억압이라는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는 그런 무리의 원조 35. 교양과 무질서. 한길사)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도를 대체로 machinery라고 폄하하고(제도 자체가 의식에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오는지), ‘죽은 아내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에 대해서 결혼의 신성성운운 하면서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사회의 소요나 무질서 등은 국가가 용납할 수 없는 우리는 이 말을 권위주의 정부로부터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가?


이 책이 문화론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를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대 사회에 대한 진단으로서 영국 사회에 행동(에너지)을 중시하는 헤브라이즘이 팽배한 상황에서, 지성을 강조하는 헬레니즘적인 요소가 더욱 필요하다는 진단 자체는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윤지관이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는 것에는 (그런 부분을 내가 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널드가 말하는 교양은 . . . 작게는 영국의 물질적이고 광신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이면서 크게는 근대 문명 전체의 흐름에 대한 저항 (22)

 

아놀드의 생각에 내가 공감하기 힘든 것은 어떻게 보면 종교성을 강조하는 그의 기본적인 태도(당시의 영국 사회 자체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사회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임에도)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고전주의적인 그의 사고 방식에 대한 회의도 크게 작용한다.


  

[발췌]

culture being a pursuit of our total perfection by means of getting to know, on all the matters which most concern us,

the best which has been thought and said in the world;

and though this knowledge, turning a stream of fresh and free thought upon our stock notions and habits,

which we now follow staunchly but mechanically,

vainly imagining that there is a virtue in following them staunchly

which makes up for the mischief of following them mechanica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