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탁류> (문학사상사)(990510--22)
채만식의 소설이 식민지 시대의 궁핍화 현상을 철저히 하체쳤다든가, 전형의 창조를 통해 가족 구조를 형상화했다든가 사회와 가족의 관계를 높은 수준에서 그려내었다고 할 때 그러한 논의의 시각이 사회와 문학의 대응 관계를 전제로 한 리얼리즘론에 모아진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논의가 이러한 원론적인 자리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채만식이 독특하게 구사한 창작 방법론을 그것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그의 문학의 핵심에 접근하기 어렵다. 그렇게 하기 위해 채만식 문학이 갖고 잇는 어떤 지배적인 요인을 검토하는 일이 먼저 요구되는 과제이다. 그 지배적 요인은 곧 아이러니 또는 풍자적인 수법이다. (문학사상사, 509)
위의 글은 김윤식이 채만식의 소설에 붙인 ‘채만식이 지닌 삶의 태도와 작가적 방법’이라는 평론의 첫귀절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두 가지 사실은 채만식이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 글을 쓴 작가이며, 또 아이러니와 풍자적 수법으로 글을 썼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채만식의 소설은 ‘식민지 시대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것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제목에서부터 극도의 아이러니로 시작하는 <태평천하>뿐만 아니라, 이 작품도 식민지 시대의 현실을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은 좀 더 진지한 연구를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김 윤식의 글을 참고로 삼아 본다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선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채만식이 ‘가장 힘들여 비판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교육의 모순과, 고리대금업 * 도박과 같은 비정상적 자본 이동의 현상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면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주인공 초봉은 교육을 받기는 받았으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힘이 전혀 없는, 운명에 주저않고 마는 숙명론자이다. 거기다 부정적 인물인 곱추 형보는 수형 할인이라는 고리대금업으로 꽤 큰 돈을 손에 넣는다. 채만식은 식민지 현실을 엄한 검열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못하지만, 아이러니한 수법을 통해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을 일단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 나서, 세부적인 부분을 이야기 하도록 하자.
글줄께나 배운 정주사는 말단 서기를 하다 점점 가세가 기울어 군산으로 온다. 군산에서도 미두를 하다, 그나마 있는 재산을 홀라당 다 털어먹고는, 아내의 삯 바느질과 약국에 나가는 딸 초봉이의 벌이로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다. 초봉은 상당한 미모의 아가씨로 같은 집에 세들어 사는 승재라는 의사 지망생을 서로 좋아하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고태수라는 은행원이 상당히 부자라는 말에 넘어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아래 결혼을 한다. 공금을 횡령하고 그것이 들통나면 죽을 각오이던 고태수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친구인 형보의 고자질로, 평소 정을 통하고 지내던 김씨의 남편 한참봉의 손에 죽고 만다. 이 날 밤 초봉은 곱추 형보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래서 군산을 뜬다. 우연히 약국 주인인 재호를 만나 그와 한 일 년을 살지만, 재호는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정이 떨어졌다가, 마침 곱추 형보가 와 그녀가 낳은 딸 송희가 자기 자식임네 하고 오자 그녀를 형보에게 떠맞긴다. 곱추 형보는 그녀를 차지하고 살지만, 초봉은 자신의 원수인 형보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한다. 이 사이 계봉은 서울에 올라와 백화점 점원이 되었고, 승재는 의사 자격증을 따는 데, 두 사람 사이에는 은연중에 사랑이 싹튼다. 형보가 송희를 마구 다루는 것에 격분한 초봉이는, 급기야 그를 쳐 죽이고 만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당시 작품으로는 짜임새도 있고, 각기 인물의 성격도 살아나는 편이지만, 좀 더 깊은 인생의 철학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식민지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이 암담하고, 지옥같다. 초봉의 말대로, ‘죽자고 해도 죽을 수두 없고****** 살자구 해두 살 수두 없구(507)’ 그런 현실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담아내는 그릇이, George Eliot나 Thomas Hardy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좁고,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역량 문제이리라.
이 작품은 또 많은 면에서, ‘미모를 타고난 하층 여성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하디의 <테스>를 많이 닮아 있다. 초봉이 형보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러면서도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나, 테스가 알렉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러면서도 그와 나중에 같이 사는 것은 물론, 나아가 자신의 원수인 남자를 죽이는 것까지도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승재와 앤젤도 닮은 면을 보여준다. 반면 초봉이 수동적인 인물인 것과는 반대로, 테스는 자신의 운명과 싸워나가려 애쓰는 인물이다.
<테스>와 이 <탁류>를 비교해 보아도, 우리 문학이, 특히 장편에 있어서, 기량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 소설, 특히 장편은, 세계 문학에 내세울 만한 작품을 그닥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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