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시인이여, 시를 뭉개고 싶은가? 그렇담, 왜 좀 더 철저히 뭉개지 못
하는가?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서 장정일은 새로운 상상력과 파격을 통해 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적어도 얼마간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신한 방법이었든 것이 반복을 거듭하게 되면 식상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장정일의 시적인 방법은(장정일은 시에서 자신을 ‘한국에서 제일 가는 테크니션 시인이다’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새로운 변화를 찾지 못한 채, 이전 시집을 반복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비누 왕자>는 <샴푸의 요정>을 바꾸어 놓은 시이며, <진흙 위의 싸움>은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흉내낸 작품 정도로 보인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서도 시집 후반부에 실린 작품들은 매너리즘을 느끼게 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집은 그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매너리즘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우선 첫 시부터가 의심스럽다. 삼중당 문고와 자신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 <삼중당 문고>는 마구잡이로 막 늘어놓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자그마치 삼중당 문고라는 말이 마흔 아홉 번이나 반복된다). 장정일의 붓끝에는 묘한 마력이 있어 재미있게 읽히게 한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긴 하지만. 거기다 <냉장고> 같은 시는 초등 학생의 일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뻔한 이야기이다(내가 이 시를 잘못 읽고 있는 것일까? 장정일의 변은 무엇일까?)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없는 사이에 이모가 와서 내
햄버거와 과실과 콜라를 먹어치우고 있구나
편도선에 걸려 며칠을 누워 있는 동안 어머니는
냉장고 가득 햄버거와 과실들을 채워주셨지
그런데 이모가 와서 내것을 다 먹어치우는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잡고 부엌으로 갔다
그녀는 엎드려 믹서기 플러그를 꽂고 있었다
그가 등뒤에서 기척을 내자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주려고 토마토 주스를 만들려는 참이야”
그녀의 두 다리 위로 치마가 약간 올라가 있었다
“빨리 가서 누워라 넌 지금 많이 아파”
나는 부끄러워서 뛰듯이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장정일은 기운차게, 거침없이 시를 뱉아내고 있지만, 그의 글은 사실상 어떤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시는 시어의 조작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황, 그것도 상당히 극적인 상황에 의존을 하려 한다. <심야 특식>과 <미국 고전>은 둘 다 똑같은 방법(화자의 말, 그것도 죽어가는 화자의 말을 제시하고, 그 다음 그 말을 둘러싼 상황을 묘사하는 방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시적이지가 못하다. 초기시에서 보이던 언어적 긴장이 이 시집의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산문화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언어의 건축에 중점을 두지 않고, 상황의 건축에 몰두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비추어지기도 한다(김광규의 시가 첫 시집 이후로 퇴보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든, 나아가서 산문이든, 작가로서 언어적 추구가 없으면 굳건한 토대를 마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전봉건은 시인이 해야 하는 일로서 ‘시를 시 아닌 것과 가장 확연하게 구별짓는 일([한국대표시평설]p410)’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말은 장정일이 되새겨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에 실린 시 <슬픔>은 시라기보다는 산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많은 시들도 그런 지적을 가할 수 있지만, 그나마 시적인 틀은 유지하려고 한 흔적이 보이는데, 여기서는 그런 흔적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마찬가지로 쉽게 읽긴 했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마지막으로 시작의 과정을 보여준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같은 시는 한 번 되씹어보고픈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삼중당 문고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빧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발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하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앙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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