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87년
(앞의 시집과 중복되게 실린 시들은 제외하고, 새로 실린 작품들, 그러니까 <20밀리>부터 대상으로 하여 분석하도록 함)
이 시집은 장정일의 실질적인 첫 시집이자, 그의 시적인 성취가 한 정점에 다다른 것을 보여주는 그런 작품집이었다. 이 시집을 [김수영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결정하면서 쓴 심사위원들의 글은 이 시집의 특성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엇비슷한 시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특이한 면모--발랄한 상상력, 현실에 대한 개성적인 접근, 일반적인 시적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대담함--이와 같은 시인다운 패기를 사서 몇 가지의 난점을 무릅쓰고 이 시집을 수상작으로 정한다.
나는 앞의 시집과 중복되는 시들은 일단 분석에서 제외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앞 시집과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 사이에 어떤 뚜렷한 변화가 있다거나 해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들에는 크게 부각되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미 우리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든 미국과 미국 문화이다. 필시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고 있을 미국 문화는, 그러나 화자 자신이 그 문화에 거의 중독된 상태이기 때문에(그 대표적인 예는 팝송에 미친 사나이를 그린 <공기 가운데 들려 올려진 남자> 같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판적인 시각조차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안동에서 울다>, <텅 빈 껍질>, <험프리 보가트에게 빠진 사나이>, <실비아 플라스에 빠진 여자>, <p. 13--35>, <공기 가운데 들려 올려진 남자>, <엘비스를 듣는 미국인들>, <낙인>, <하숙>, 그리고 표제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 <신식 키친>, <아빠> 등 상당수의 시들이, 미국 문화, 즉 자본주의적인 소비 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을 맺고 있다. 앞의 시집에서의 주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 혹은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그의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나는 살펴 보았는데, 그 이후의 글에서는 그것이 미국 문화에 의한 모든 것 잠식이라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글은 더욱 빨라지고, 더욱 재미 있어지고, 외설스러워졌다. 그리고, 더욱더 일반적인 시의 관행에서 일탈해 갔다. 그의 서술 방식은 압축이 아니라 이완이며, 극적인 상황의 연출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혼외 정사를 하러 나선 여자가 횡단 보도에서 넘어지는 장면을 그린 <붉은 신호에 걸린 여자>나, 다리가 아름다운 여자를 쫓아갔더니 그 여자는 자기 아파트 맞은 편호수에 살고 있는 여자라는 <아파트 묘지> 등).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시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햄버거 같은 패스트 푸드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 달콤하고 맛있지만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몸에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그것만 먹으라면 물리게 되고 마는 그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점이다. 가령 <p. 13--35>와 같은 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재미있게 읽었지만, 남는 것은 없다.
물론 이 시집에 실린 장정일의 시들은 재미있고 읽기가 쉽다.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거기다 소비 사회의 부조화--앞서도 말했지만 만인의 평등한 소비를 보장하는 듯 하지만, 기실은 만인의 소비 욕구만 부추길 뿐, 그 실현에는 엄현한 불평등이 따르는--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그리고, 시에 대한 고정 관념을 흔들면서 황지우가 이미 선보였던 것과 다르면서도 유사한(김현은 ‘황지우의 시는 그가 매일 보고, 듣는 사실들, 그리고 만나서 토론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시적 보고서(혹은 보고서적 시)이다. 그 보고서의 형식은 다양하다. 그 다양함은 우리가 흔히 시적 형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부숴 버린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해설, p119}라고 말하고 있다. 다르다는 것은 장정일이 황지우와 같은, 보고서 양식이나, 만화 등을 시에 삽입하는 상상하기 힘든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유사하다는 것은 기존의 시가 보여준 단정함을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측면에서다.) 시도를 하고 있다. 그의 시도는 일단 이 시점까지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글쓰기는 새로운 방법론은 개척하지 못할 때 더 이상 흥미나 전진은 없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시집 이후 그의 시들이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가 소설과 희곡으로 돌아선 것 등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사실 쓸데 없이 무거울 필요는 없겠지만, 장정일의 가벼움은 경박함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 시집에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 점을 이윤택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장정일에 의하면, 많은 부분의 언어감각을 이국적 뉘앙스에 의존하고 있고(<신식 키친>, <아빠>, <험프리 보가트에게 빠진 사나이> 등), 80년대 벽두 해체된 요설의 영향권을 말끔히 벗어나 있지 못하며(시 <p. 13--35> 등), 대사회적 시각이 총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지리한 서술로 겉돌면서 삶의 깊이를 획득하는 데 실패(<백화점 왕국> 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쓸데없이 길어지는 문체가 그리 달갑지 않은 현상으로 느껴진다. (해설 p172--173)
특별히 기억에 남는 시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도 없었다. 다만 너무 고속 주행하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장정일의 시와 Allen Ginsberg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Beat 문화와의 상관성이다(이 점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좀 더 집중적으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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