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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2000년 7월 8일)

by 길철현 2016. 12. 1.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200078)

이 즈음에 와서 나는 시란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일조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알려진 세계일지라도 그 세계를 공고화하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이 말은 너무 거시적인 말이기 때문에, 상당한 설명과 주석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지만, 직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총체적인 판단에 이르기까지에는 상당한 나름대로의 생각과 시간이 있었으므로, 쉽게 바뀌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나희덕의 두 번째 시집을 감상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 나희덕의 시가 나의 주관적인 시관에서 보았을 때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렇다기 보다는 나는 나희덕의 시가 세계의 공고화하는 그런 류의 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일단 생각이 기운다. 거시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접고, 이 시집을 읽고 난 뒤의 직접적인 감상으로 넘어가보자.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시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읽힌다. 그리고, 또 첫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그 서술 태도나 접근 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은근해진 대신 좀 더 끈질겨 졌다고나 할까? 그것은 시의 주제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누구의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표지에 실린 다음 글은 이 시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희덕의 시는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이 생애에 대한 안타까운, 그러나 따스한 응싱의 눈길을 담고 있다. 그의 많은 시들이 비애를 말하지만, 그 비애를 차분히 감싸는 것은 지상에 뿌리내린 작은 것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 그리고 그 작은 것들에 숨쉴 곳을 내주려는 혼연한 자기비움의 자세이다. 그때 그의 시는 굳기 쉬운 심상들의 가두리를 넘어 넓게 번지면서 우리의 메마른 삶을 적실 물기를 얻는다. 나희덕의 시는 그의 한 싯구첢, 울음 끝에 고요해진 맑은 눈동자 같다.

 

몇 편의 시들은 반성문 같은 느낌도 주지만 전체적으로는 첫 시집보다 성숙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가 첫 시집 후기에서 말한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는 소망이 시로 체화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첫 시 풀포기의 노래부터 시인은 사정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려한다.

 

네 물줄기 마르는 날까지

폭포여, 나를 내리쳐라

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

일어설 여유도 없이

아프다 말할 겨를도 없이

내려꽂혀라, 거기에 짓눌리는

울음으로 울음으로만 대답하겠다

이 바위틈에 뿌리 내려

너를 본 것이

나를 영영 눈뜰 수 없게 하여도,

그대로 푸른 멍이 되어도 좋다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명료한 이 시는 전체적인 전개도 무난하지만, 풀포기의 입장만 아니라 폭포의 입장까지도 보는 그 눈, 그래서 나온 마지막 행이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찬비 내리고와 같은 시는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다.(나 자신의 시읽는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라고 했을 때, 그러하다는 것은 <빗방울들이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한다>는 말일까? 난간을 타고 흘러내렸기 때문에? 그 다음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가 아프지도 못하는 것처럼, 못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에서 <>는 자신이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여기서는 물방울과, 꽃송이가 되겠지.

시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대충된 듯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여전히 생각해보아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 이 밖에도 소리에 기대어,’ ‘못 위의 잠,’ ‘빈 의자,’ ‘그믐,’ ‘정도리에서,’ ‘태풍,’ ‘해질녘의 노래,’ ‘낙조,’ ‘땅끝등이 기억에 남는 시이다. 특히 땅끝은 내가 내 시 땅끝을 쓸 때 많이 참조를 했던 작품이다.

 

 

해질녘의 노래

 

아직은 문을 닫지 마셔요 햇빛이 반짝 거려야 할 시간은 조금 더 남아 있구요 새들에게는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고 해요 저 궁창에는 내려야 할 소나기가 떠다니고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들이 저 멀리서 흘러오네요 저뭇한 창 밖을 보셔요 혹시 당신의 젊은 날들이 어린 아들이 되어 돌아오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즈막 지치고 힘든 날들이었지만 아직은 열려 있을 문을 향해서 힘껏 뛰어오고 있을 거예요 잠시만 더 기다리세요 이제 되었다고 한 후에도 열은 더 세어보세요 그리고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것들은 아무것도 내쫓지 마셔요 어둠의 한자락까지 따라 들어온다 해도 문틈에 낀 그 옷자락을 찢지는 마셔요

 

 

 

땅 끝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