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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나희덕, 뿌리에게, 창비, 재독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나희덕, 뿌리에게, 창비, 재독

 

이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의 느낌은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두 번 째 읽고난 지금의 느낌도 그다지 좋은 쪽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지난 육 개월 동안, 이선이 선생의 영향 밑에서, 아니면 그 이전부터 오규원 시집을 붙들고 읽은 까닭에, 시에서의 묘사적인 측면, 혹은 이미지즘적인 측면에 많이 경도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해석적 진술은 그것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결론일 때는 빛이 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때로 억지 춘향격으로 보여질 때가 있는 법인데, 이런 점이 나희덕의 이 첫시집의 약점이 아닌가 한다.

 

언제부턴가 몸의 피가 더이상 돌지 않게 되었다

고통과 울부짖음으로 입술은 벌어졌고

두 볼이 굳어지자 거기 맺혔던 웃음마저 사라져갔다

다음에는 팔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두 눈은 감겨져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석상은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석상을 생명체가 굳어버린 것으로 보는 눈, 그러한 시각이 보다 깊은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차용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는 그러한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보여진다. 대상을 관찰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은 시를 쓰는 한 방편이지만, 그러한 의미부여가 과도하게 드러날 때, 시는 직접적인 의사 전달 수단이 되어버리고, 울림을 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예는 [미국에서 온 편지], [마늘을 찧으며], [햄 한 덩어리]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마늘을 찧는 행위를 탄압이란 것으로 순식간에 치환해 버리고 마는 작가의 의식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나희덕의 시가 이런 약점 위에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나희덕은 김기택의 말처럼 건강하다. 그리고 윤리적이며, 모성애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모성애게 두드러지는 시편이 표제시인 뿌리에게이다. 자기 희생을 통해 뿌리를 살찌우겠다는 존재의 근본적인 동인 중의 하나를 이 시는 잘 형상해 내고 있다. 이 밖에 [지는 해][사표] 등도 가슴에 와닿는 시들이다. 특히 [사표]는 시인의 생활에서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어서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 밖에 시의 문장이 견실하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강점이자, 그 이면에는 좀 더 과감한 시도를 가로막는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처음에 읽었을 때에도 인용을 했지만, 그녀의 후기가 이 시집을 잘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 . .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 미더움을 버리지 않고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

 

 

 

뿌리에게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취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辭 表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창밖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하늘에 대고 몇 장이나 사표를 썼다.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오

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뒤로 하고

내가 밝히려고 찾아가는 그곳은

어느 어둠의 한 자락일까.

이 어둡고 할일 많은 곳에서

師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사표를 쓰게 된다면

그 붉은 노을을 언제 고개 들고 다시 볼 것인가.

하늘에 대고 마음에 대고 쓴

수많은 사표들이 지금 눈발 되어 내리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

교실문을 가로막는데

나는 차마 종이에 옮겨적을 수가 없다

붉게 퇴진하는 태양처럼

장렬한 사표 한 장 쓸 수는 없을까